495화. 운명이 부르다 (7)
서량이 떠난 후.
직접 철왕팔세의 수장을 불러 서신을 전달한 광마존이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다.
“뭐라고 하더이까?”
광마존이 덤덤하게 말했다.
“따로 할 말이 있겠는가? 교주님께서 직접 전해 달라 한 서신이거늘, 한낱 전투 부대 대장 따위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아마 수일 내로 전해질 걸세.”
고루마존이 피식 웃었다.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오. 혹 그 대장이란 놈이 도발을 하진 않았소?”
“그런 건 없었네. 만일 일이 터지면 즉각 정면 승부를 해야 할 상황이야. 철혈성주도 생각이 있는데 어중이떠중이를 보냈겠는가?”
“하긴, 원주 말도 맞소.”
주둔한 철왕팔세를 보는 광마존의 눈이 심연처럼 깊어졌다.
“상당하네. 그 무위는 화경에 이르지 못했으나, 보통 무인이 아니더군.”
“보통이 아니라 함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지모가 뛰어나 보였네.”
“그렇소?”
“그렇다네. 과연 철혈성주야. 저만한 사람을 휘하에 두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저런 이를 중앙에 배치한 안목도 놀랍네.”
“중앙?”
고루마존은 전형적인 마인이자 무림인이었다. 젊었을 적 부대를 지휘한 경험도 있었지만, 전략은 대개 휘하의 참모가 수립했다.
광마존은 달랐다.
“호남과 호북 사이, 말하자면 중원에서도 가장 중앙에 가까운 전선일세.
그런 곳이라면 무슨 일이 터지더라도 끝까지 밀고 들어갈 만한 전력을 파견하는 게 보통이야. 즉, 통상의 경우 화력이 좋은 고수를 배치하기 마련이라네.”
“그건 그렇소.”
“철혈성주의 판단은 달랐네. 그는 화력이 좋은 고수보다, 대국을 볼 줄 아는 지휘자형 무인을 파견했네.
중앙에서 좌우 병력을 철저하게 통제할 줄 아는 자. 본신의 무력은 강하지 않아도 병력을 유연하게 운용할 줄 아는 자.”
광마존의 눈이 까마득한 먼 거리를 지나 대화를 나누었던 대장 무인에게 향했다.
너무 멀리 떨어져서 그가 맞는지조차 가늠이 되질 않았지만, 그는 저자가 대장일 거라고 확신했다. 위치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만일 전투가 벌어지면 나는 이 군장과 병력을 통솔하여 최대한 빨리 중앙을 돌파토록 하겠네. 자네는 무조건 저 대장 놈부터 죽여야 할 것이네.”
“명심하겠소이다.”
그때였다.
“으음?”
두 사람이 남쪽을 바라보았다.
삐익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붉은 새가 있었다. 천공을 자유로이 노니는 혈응(血鷹)이었다.
“저 매는 군사부의 혈응신(血鷹神)이 아니오?”
“그렇다네.”
광마존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지? 어지간히 다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혈응신을 보낼 리가 없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잠시 후, 제법 덩치 큰 매가 고루마존의 팔뚝에 앉았다. 발톱은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용케 팔뚝을 뚫진 않았다.
혈응신의 발목에 매단 서신을 급히 끌러 읽은 광마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왜 그러시오?”
“…….”
“원주?”
광마존이 고루마존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서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교주님께서 호북으로 향하는 걸 막아 주십시오. 무당산이 수상합니다.
적의 함정일 가능성이 커요. 만일 교주님께서 호북으로 넘어가셨다면, 전선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두고 쫓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교주님의 이동 정보는 호남 상덕지부로 가면 알 수 있습니다.
고루마존은 대경했다.
“이, 이런!”
교주님께서 떠나신 지 벌써 반 시진이 넘었다. 지금쯤이면 배를 타고 호북으로 향하고 계실 것이다.
“어, 어떻게 하시겠소, 원주?”
광마존은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이럴 때 다급히 움직여 봤자 모두에게 손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철왕팔군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마도칠가가 우리의 뒤를 받쳐 주고 있다. 설령 나와 고루가 빠진다 한들, 천마이군만으로도 전투는 가능해.
유사시에는 후퇴하여 칠가의 병력과 함께 막으면 그뿐이다.’
문제는 그가 이쪽 전선의 책임자란 사실이었다.
교주님의 목숨은 그 어떤 일보다도 우선시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위험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황. 그렇다면 교주님께서 직접 내린 명령을 무시해선 안 된다.
‘게다가 저자.’
철왕팔세를 이끄는 대장 놈이 마음에 걸린다.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놈은 분명 절대의 무공을 연성하지 않고도 이쪽 전선에 크나큰 타격을 줄 만한 인재였다.
광마존이 빠르게 말했다.
“교주님의 뒤를 전력으로 따라가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북에 먼저 당도해야 하네.
호북에서 가장 가까운 지부로 가서 교주님의 이동 방향을 잡게 되면, 바로 그때 교주님과 접선하여 후퇴하게.”
빠르고 냉정한 판단이었다.
“만일, 교주님과의 접선이 자꾸만 어긋나게 되면.”
광마존의 눈이 불을 뿜었다.
“그대로 철왕팔세를 밀고 올라갈 것이네.”
* * *
“호오?”
촤아아아악!
거대한 선박이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는 속도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서량은 순수한 찬탄을 내뱉었다.
“나도 나중에 술법 좀 파 볼까? 이거 엄청나게 유용한 공부잖아?”
무담이 헛기침을 뱉었다.
“교, 교주님.”
“왜? 저거 봐 봐. 무공 강하다고 저런 게 가능할 것 같아? 나도 못 해, 저런 거는.”
촤아아악!
거대한 선박, 거의 함선이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배의 이동 속도는 어지간한 쾌속선보다 몇 배는 더 빨랐다.
제아무리 함선에 사람이 없다 해도 호왕을 실었고 마차를 실었다. 게다가 영물에 가까운 명마도 여섯 필이나 태웠으니 무게가 상당할 터였다.
한데도 빠르다. 바람이 돕는 것도 아닌데 가히 폭풍 같은 속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종의, 수왕의 힘이었다.
푸화아아악!
쏟아져 들어오는 강물이 좌우로 찢어지며 거대한 암초를 만나 하늘 높이 솟구쳤다.
우우우우웅.
기종의의 두 눈이 흰자위까지 하늘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담은 바다처럼 격렬하고도 맑은 빛이었다.
‘역수(逆水), 양위(兩位).’
촤아아아악!
엄청난 물살이 함선의 속도를 올렸다.
전방의 물살을 미리 좌우로 가르고, 후방에서 미는 강물의 힘을 증폭한다. 수력(水力)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힘이었다.
일월(日月), 그리고 오행의 대사제들은 제각기 담당하는 기(氣)의 극한에 이른 술법을 이용해 싸운다고 하였다.
마왕령이 맞닥뜨린 화왕(火王)은 불을 뿜었고, 소교 시절 서량이 만났던 목정의 대사제도 목기(木氣)의 특성을 이용해 사이한 무공을 펼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처럼 놀라운 일을 벌이지는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강물의 흐름을 조종하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만일 저놈이 황궁에 있었다면 황제를 납치하지 못했겠군.’
설령 수로(水路)로 빠지는 것까지 성공했다 한들, 속도에서 잡혔을 것이다. 굳이 속도를 내지 않더라도 물 자체를 조종해 큰 피해를 입혔을 수도 있겠다.
‘세상에는 참 신비한 공부들이 많아.’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는 기종의의 얼굴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그의 기를 느꼈다.
‘엄청나게 무리하고 있군.’
기종의의 등은 흠뻑 젖어 있었다.
물이 튀어서 젖은 게 아니라 땀이다. 이 강물의 흐름을 조종하는 것은 수왕이라 불리는 그에게도 힘든 일인 듯했다.
‘하긴, 당연한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는 일이다. 나아가 물을 조종한다는 것은 곧 엄청난 무게를 조종한다는 뜻. 무위가 화경에 달했다 해도 가벼이 볼 일이 아니었다.
퍼어어엉!
한차례 거대한 물기둥이 터져 나온다 싶더니, 이내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허억. 허억.”
기종의가 헐떡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곧바로 운기를 시작했다.
꽤나 당찬 배포였다. 바로 옆에는 희대의 악마 집단 수장이라는 마교주와 극마의 고수들이 있는데도 거침없이 운공에 들어간 것이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 해도 이런 배짱을 보여 주긴 쉽지 않았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적이기는 해도 최소한 뒤통수를 칠 인물은 아니로군.’
기종의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천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터득한 것이 으레 그러하듯, 제대로 연마되지 않은 신중함은 결정적인 순간 사태를 악화시킬 확률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도 마찬가지겠지.’
그때, 무담이 말했다.
“교주님 말씀대로 대단하기는 합니다.”
“그렇지?”
“대단하기에 위험합니다. 저 정도 고수가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 선호하는 지형에서 전략을 잘 짜면 가히 재앙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
“고로, 지금이라도 죽여 없애는 것이 이롭습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성격에 안 어울리는 발언이군.”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제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하여 위험을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안 이상, 길잡이는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겠지. 하지만 저 친구는 다른 의미로도 필요해.”
“예?”
서량이 턱으로 북동쪽을 가리켰다.
‘아!’
무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으로 치고 올라가는 마황단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의문이 들었다.
‘이 자는 담사영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자다. 오히려 이 자를 없애고 중원 곳곳에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
그게 훨씬 더 적을 모호하게 만드는 길이다. 애초에 이번 일은 미끼가 되어 옥새를 탈환하는 것이지, 담사영과 담판을 짓기 위한 중원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고민했던 무담은 이내 생각을 접었다.
교주님의 생각을 뉘라서 짐작할 수 있으랴. 이 젊은 교주님께서는 그간 숱한 싸움을 벌이며 신교를 살찌우신 분이었다.
이번에도 분명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계실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잠시 후, 기종의가 운공을 풀고 일어났다.
“어때? 살 만한가?”
“그렇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창백했다.
짧은 순간 퍼부은 기가 상상을 초월하는바, 오히려 고작 그 정도 운공으로 어느 정도 내공을 다스렸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서량이 강물을 바라보았다.
‘수기(水氣)가 가까울수록 회복도 빠르다. 이런 건 알아 두는 게 좋겠군.’
기종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틀 상간으로 이런 식의 이동을 병행하겠소. 북서로 방향을 잡으면 금세 육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고, 육지에 오른 후에는 엿새 정도가 걸릴 거라 예상…….”
“북서가 아니라 정북(正北)이다.”
기종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북쪽으로 가라고. 들를 곳이 있으니까.”
“안 되오. 나는 주군께 명령을…….”
“그럼 여기서 죽을 텐가?”
“…….”
“걱정하지 마라. 시간이 좀 늦어질 뿐, 무당산으로 가서 네 주군 놈 낯짝 볼 생각은 있으니까.”
“대체 어딜 들르겠다는 것이오?”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말이오?”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줘야 하거든. 그 연락이 없으면 뭐…… 며칠 논다고 생각하자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서량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지금쯤 다 나았으려나 모르겠군. 하긴, 그쪽에도 좋은 의원은 많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