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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496화 (495/774)

496화. 운명이 부르다 (8)

츠츠츠츠.

가부좌를 튼 송금백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일렁이는 적기(赤氣)가 기괴한 용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의념으로 만든 용형(龍形)이 아닌, 자연스레 만들어진 용형이었다.

익히고 있는 무공 자체가 그러한 경지에 달했을 때 만들 수 있는 기공 형상이었다.

기(氣)가 빈틈없이 꽉 짜여 송금백의 몸을 휘도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고차원적인 경지에 도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번쩍!

송금백이 눈을 떴다.

동시에 몸을 휘도는 용이 서서히 사라졌다. 마치 환상과도 같이.

“후우.”

내뱉는 숨결에 답답함이 일었다.

“심마(心魔)인가.”

며칠 동안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내공 운기를 반복했다. 근 십 년 동안 이렇게 무공에 몰두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의 집중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무공 연마도 심란함을 떨쳐 내지 못했다.

심마다. 심마가 확실했다.

송금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공을 연마하지 않으면 자꾸만 잡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잡생각은 꼭 서량의 표정과 말을 떠올리게 했다.

- 너는 너보다 약자 앞에선 호탕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너와 대등하거나 강한 자 앞에서는 으르렁댈 줄만 아는 머저리라는 걸.

- 나나 담 늙은이가 없다 한들, 네놈은 평생 천하제일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콰드득.

손가락이 움켜쥔 대로 땅이 푹푹 파였다.

송금백의 눈이 순식간에 충혈되었다.

“……건방진!”

그는 서량이 소교였을 시절 처음 보았다.

그때 보았던 서량은 그저 가능성 넘치는 젊은이에 불과했다.

물론 그 재능이 하늘에 닿았고, 파격적인 행보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지만 진짜 정쟁(政爭)이라는 것을 겪어 보지 못한 애송이였다.

그렇다. 딱 그 부분만 애송이였다.

직접 대화를 주도했음에도 중원 판도를 뒤흔들 새끼 괴물이라고 생각했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대괴수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자신의 제자는 무공도, 지모도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사파제일의 천재라는 제자의 눈으로도 감히 쳐다보기 힘든 위치에 선 그는 이미 괴물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얼마나 성장했는가.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었으며, 무엇을 책임지고 나아갔는가.

다시 만난 서량은 진짜 괴수가 되어 있었다.

이룬 경지의 미숙함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것을 천재적인 전투 능력과 말도 안 되는 실전 감각,

무식하다 싶을 정도의 과격한 변수를 만들어 내며 동등한 승부를 이뤄 냈다.

무공만 해도 그랬다. 무공 이전에, 그곳에 이르렀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불가능해.’

송금백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었다. 한 인간이 고작 일 년 새에 그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무공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틀렸다고?!’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서량이란 인물을, 존재를 한계 지어서 봤다.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난 인재지만 규격 외의 존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다. 사람은 그렇게 성장할 수가 없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천재들이 간혹 태어난다지만, 서량은 그러한 수준조차도 넘어서 있었다.

송금백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것도, 하늘이 그런 존재를 버젓이 세상에 내놨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치이이이익!

벽에 걸린 태천검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송금백의 동공도 붉게 타올랐다.

‘나는 사파의 절대자다! 나의 무공은, 나의 지모는, 나의 욕심은 결코 그들에게 뒤지지 않……!’

그때였다.

묵혈괴룡공으로 시뻘겋게 물들었던 그의 동공이 일순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

꽉 쥔 주먹에서 돌 부스러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구나.’

송금백은 눈을 감았다.

불현듯 머리를 뒤흔든 깨달음. 그 깨달음은 너무나도 쉬운 정답도 깨닫지 못한 사파의 제왕을 비웃으며 적나라한 대답을 안겨 주었다.

“……나는 이미 그들과 같은 선상에 놓일 수가 없는 존재였어.”

능력이 부족해서? 아니면 존재감이 없어서?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만, 그따위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송금백은 강호삼세의 일익으로서 능히 담사영과 서량과 겨룰 만한 준걸이었지만, 단 하나의 요소만큼은 둘에 미치지 못했다.

‘욕심.’

그렇다.

처음 소교 시절의 서량과 만났을 때, 그는 오래간만에 본 괴물 같은 인재를 보며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세상에는 저런 규격 외의 천재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나아가, 간만에 천하일통이라는 네 글자를 들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꼈다.

차갑게 식어 버린 절대자의 심장을 한순간 뜨겁게 달군 서량을 보며, 사파 종주로서의 책임감과 운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담사영이 만나자고 했을 때, 그가 손을 잡자고 했을 때 잡았다.

전대 마교주 이천상이 오라고 했을 때, 그 서신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의천맹이라는 기반을 잃은 담사영에게 재차 연락이 와, 또 한 번 손을 잡고 중원을 도모해 보자고 했을 때 거부하지 못했다.

‘그래선 안 되었다.’

그는 어중간했다.

강한 욕망을 품은 것도, 초탈하여 세상사에 관여한 것도 아니다. 그저 철혈성주로서 타성에 젖어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바쁜 세월을 보냈을 뿐이었다.

‘나에게도 진짜 욕심이 있었다면, 내가 진정 내 삶을 주도할 만한 욕망을 품었다면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담사영이나 서량처럼 한계 없는 욕심을 품었다면 어땠을까?

서량의 요구를 들어줌과 동시에, 호시탐탐 그를 죽여 없앨 생각을 했을 것이다. 위험하니까.

담사영이 손을 잡자고 했을 때, 손을 잡기 전에 병력부터 모았을 것이다. 거치적거릴 테니까.

이천상이 오라고 했을 때, 그 서신을 무시했을 것이다. 이길 수 없으니까.

혹 그가 철혈성으로 진군했다면 주요 병력을 끌고 도망이라도 쳤을 것이다. 담사영처럼.

그리고 담사영이 다시 손을 잡자 다가왔을 때. 그때라도 욕심이 있었다면…….

앞에서는 웃으며 손을 잡고 뒤로는 마교와 연수하여 담사영을 잡아 죽였을 것이다. 그 끈질긴 생명은 언제고 반드시 위험이 될 테니까.

“허허허.”

송금백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반년 동안 괴롭혔던 심마가 일순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심마보다도 더 지독한 자괴감이 찾아왔다.

“퇴물이 되어 버린 것이로군.”

강호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강호삼세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고작 사파의 왕 노릇을 하며 편히 즐겼던 그는, 더는 예전과 같은 패왕이 아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 발톱 빠진 사자.

날지도, 신통력을 부리지도 못하는 반쪽짜리 용이 되어 구렁이처럼 바닥을 기고 다녔다.

“꿈을 좇겠다 말하면서도, 진정 그 꿈을 좇는 자들의 판에 끼어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바빴던 철혈성주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 놈인가?”

송금백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하늘까지 울려 퍼질 듯 쩌렁쩌렁한 웃음에 숨길 수 없는 비참함이 묻어났다.

더 웃긴 것은, 이미 절벽을 내려가는 마차에 올라타 버려서 중간에 내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내릴 수도 없다.

왜냐? 자신은 선택했으니까.

자신이 선택한 도박패에, 철혈성에 살아가는 무수히 많은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이 무슨 웃기는 희극이란 말이냐! 하하하! 제자를 가르칠 자격도 없도다! 군주? 크하하하!”

피눈물을 쏟아 내는 절규였다. 이제야 자기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한 절대자의 절망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웃음을 터트렸을까.

서서히 잦아드는 웃음소리에 맞춰,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성주님.”

“……무슨 일인가?”

“호북과 호남 경계, 철왕 중앙군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송금백의 눈이 번뜩였다.

“들라.”

무인에게 서신을 받은 그는 재빨리 펼쳤다.

순간 그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뭐라?!”

서신을 보낸 것은, 놀랍게도 서량이었다.

서신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용을 떠나, 이 서신을 써서 보낸 자가 서량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말 못 할 충격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

송금백은 나직이 심호흡을 했다.

그는 한 자, 한 자 세밀하게 읽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화르르륵!

삼매진화로 서신을 태워 버린 송금백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시점에? 굳이 나를?’

순간 그의 눈이 서늘해졌다.

‘이쪽에 타격을 가할 생각인가.’

정확한 건 아니었다. 기실, 지금 대국에서는 그 어떤 판단도 정확하다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담사영과 손을 잡았다.

그런 자신이 마교주와 손을 잡았다? 이 사실이 저쪽에 알려지게 되면?

‘절대 안 될 일이다. 나와 담사영은 이미 한배를 탔어. 이 상황에서 굳이 분란의 씨앗을 만드는 것은…….’

둘러댈 수도 있었다. 서량을 만난 것은 그저 적의 흉계가 어떠할지 들어 보기 위함이었다고. 그 정도 믿음도 없냐고 되레 역정을 내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과연 놈은 무엇을 의도했는가? 그리고 난 놈의 의도가 무엇이든 만날 용의가 있는가?’

송금백은 고심했다.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리고 이각 후, 결정을 내렸다.

* * *

“오랜만에 와 보는 것 같군.”

소교 시절 호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워낙 바빠서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던 지역이었다.

후욱.

무담의 몸에서 불편한 기파가 흘러나왔다.

어지간한 고수도 알아차리지 못할 은밀한 기파. 언제 어느 때라도 일검을 내칠 수 있는 준비가 된 상태였다.

‘확실히 다르군.’

호남과는 다르다.

호북에 진입하자마자 사방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눈이 느껴졌다.

분명한 적지(敵地)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눈이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세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눈 중 절반 이상이 은은한 살기를 발하고 있었다.

‘알아차린 것이겠지.’

천하의 마교주가 마차 한 대와 몇 명만 대동하고 나타났다?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쪽을 주시하는 눈들은 하나같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만큼 안목이 날카롭다는 뜻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군.’

그것은 마동필도 느끼고 있는 바였다. 무뚝뚝한 표정 속,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긴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서량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더 선명한 살의를 느끼고 있을 텐데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풍경을 감상했다.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봐, 물귀신.”

기종의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왜 그러시오.”

“형문 쪽에서 기다리고 있어. 일 다 보고 오면 거기로 갈 테니까.”

“그럴 수 없소.”

“내 손님 만나러 간다는데 거기까지 낄 셈인가? 미안하지만 그건 허락할 수 없다네.”

“나 역시 마찬가지요.”

“음?”

기종의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며 말했다.

“나는 그대를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대 역시 동의했소.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귀하와 함께 움직일 것이오.”

“오호?”

“언제 가냐 재촉하지 않겠소. 다만 나 홀로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오.”

“목숨이 날아가도? 그럼 임무 완수 못 할 텐데?”

기종의의 눈이 서늘해졌다.

“이곳 주변에는 물이 많소. 당신들이라면 날 죽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한 명은 안고 갈 수 있소.”

그가 호왕과 마차를 힐끔거렸다.

“덤으로 저 안에 있는 사람이나 거대한 짐승까지도.”

“그래?”

“그렇소.”

기종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서량이 이룬 무(武)의 위치를.

같은 극마라도 말도 안 되는 격차가 벌어져 있음을, 어쩌면 기종의가 평생 연마해도 도달하지 못할 곳에 있음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지만큼은 확고해 보였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나는 배짱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좋아, 함께 가지.”

“……좋소.”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헛물켤 수도 있어. 그 사람 워낙에 바빠서 말이지. 오늘은 못 볼 수도 있거든.”

오늘은?

‘그 말은, 몇 번 왕래했다는 뜻인가?’

대체 만날 손님이란 게 누구인 거지?

그때였다. 저 멀리서 마의를 입은 소년 하나가 서량을 향해 뛰어왔다.

스릉.

무담과 마동필이 검을 반쯤 뽑았다.

서량이 손을 들었다.

“괜찮아.”

잠시 후, 소년이 서량 앞에 서신을 툭 던지곤 그대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서량이 떨떠름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허헛, 새로운 전달 방식이로군.”

바닥에 떨어진 서신을 주워 펼친 서량.

그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난 배짱 있는 사람이 좋아.”

절강에서 일생의 승부를 겨루었던 자.

당대 천하제일마인 서량이 살기에 몸을 던지지 않고서는 승패를 논하기 어려웠던 또 다른 무신.

철혈성주 송금백의 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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