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천하는 어디에도 없었다 (2)
잠시 침묵이 일었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밑에서 봤을 때는 그리 절경이더니만, 막상 올라와서 보니 썩 좋지는 않군. 황량하기 이를 데 없어.”
“그래서 좋지.”
송금백이 한 번 더 말했다.
“그래서 좋은 거지.”
“왜? 여기서 심마(心魔)라도 다스리고 있었나?”
송금백의 눈이 깊어졌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호흡이 퍽 불안정하군. 설마하니 천하의 수라제께서 마교주를 봤다고 호흡 조절도 못 할 실력은 아닐 테고, 심동(心動)을 일으킨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인가.”
상관이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송금백은 마음속으로 내뱉은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열둘이로군.’
이 작은 산 곳곳에 은신한 이들의 숫자였다.
하나같이 대단한 은신술을 익힌 이들이었다. 호천마황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흔히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것은 은신술에 한해서일 뿐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호천마황단의 고위 전력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성주를 지키는 이들. 철혈성에도 그러한 밀착 호위는 존재하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
서량이 송금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송금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담담하게 들리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이런 곳에서 자네와 드잡이할 생각은 없다. 내 호위들이 자네를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야.”
“재미있군.”
서량의 얼굴이 점점 무심해졌다.
“패도를 걷는 사파의 종주께서 왜 이리 낭창낭창해진 거지? 진짜 심마에 휩쓸린 건가?”
“내 변화가 어떠하든, 자네가 관여할 바는 아닌 것 같네.”
과연 그럴까?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지.”
송금백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해서, 날 보자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 앞서.”
서량이 눈을 빛냈다.
“내 요구에 응한 이유가 궁금하군.”
“무슨 소리인가?”
“내가 널 만나자고 한 요청에 왜 응했냐는 말이야. 마도대종사와 사파의 종주가 이름 모를 야산에서 만난다? 그 여파가 어느 정도일지 모르지도 않을 텐데.”
“…….”
“다른 걸 떠나, 이 일은 무조건 담사영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
“자네의 속내가 궁금해서 만나 보았다고 시치미 떼면 그만이다.”
“그거야 그렇지. 다만 네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냐, 이 말이야.”
송금백의 눈이 점점 깊어졌다.
끝 모를 혼란을 담고 있는 그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감흥에 젖게 만들었다.
마치 인간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사회를 경험했을 때, 딱 그럴 때 보일 법한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지쳤을 따름이다.”
지쳤다?
수라제라 불리며 패도를 지향하는 철혈성주에 입에서 나오기 쉽지 않은 말이었다. 서량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쳤다?”
“그래, 나는 지쳤다.”
“보아하니 자포자기한 건 아닌 듯싶은데.”
“어떻게 생각해도 좋다. 자네를 상대로 머리 아프게 떠보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진심이다.
서량은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느꼈다는 것은, 그게 사실이라는 뜻과 같다.
“나는 내 대답을 마쳤다. 이제는 날 보자고 한 이유에 대해 말해라.”
서량은 말없이 송금백을 바라보았다.
송금백은 서량의 침묵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나와 비슷한 경지에 이른 자의 속마음을, 그저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런데 읽히는 건 또 무슨 일인가.”
“말장난 상대가 없어서 부른 것인가?”
“이 판에서 빠지고 싶나?”
순간 송금백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왜 그리 무기력해진 건지는 모르겠다만, 너는 절대 이 판에서 빠질 수 없어. 너라는 존재 자체가 거대한 장기판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말장난? 웃기는 소리. 한번 무림에 발을 담근 자, 누구도 그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어. 죽지 않고 이 판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
“하늘에(天上) 오르는 것.”
“……!”
“이 시대에서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하나 있었지. 안타깝게도 후계를 위해 등선을 포기했지만.”
“……구대천마.”
“그래, 나의 스승 이천상 그분을 말함이다.”
너무도 깊고, 너무도 높아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신비의 경지.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그러한 경지를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단순히 신화경(神化境)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대체할 뿐이었다.
신화에 이르지 못한 자, 그저 한없이 깊고 깊어질 뿐이다.
그것이 바로 조화의 경지요, 극마의 경지였다. 그래서 그 경지에 오른 자들의 격차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끔, 수 세대에 한 번씩 인지가 불가능한 심연의 세상을 들여다보게 되는 이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일컬어 신선(神仙), 부처, 입신(入神)의 경지에 든 자라고들 했다.
“지상에서 얻을 깨달음을 전부 얻어, 더는 사람으로 불릴 까닭이 없어질 때.
이 지상에 육신을 잡아 둘 이유가 없어지는 때. 바로 그때가 아니면 이 지독한 사바세계의 인과율에서 헤어 나올 수 없지.”
“…….”
“무림은 그런 세상이다. 인과율의 법칙을 가장 원시적이고 폭력적으로 구현한 세상.”
“…….”
“그리고 너는, 그러한 세상에 누구보다도 깊게 발을 들이고 있다. 그러니 그따위 혐오스러운 낯짝을 내게 보이려거든, 입신에 들든지 자살을 하든지 해.”
“…….”
“너 스스로도 너의 그 모습이, 네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나에 대해 모른다.”
“몰랐지만, 지금 알았다. 그것도 많이.”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너의 열망은 어설프고 어중간해. 그러니 그 좋은 실력을 갖고도 제대로 펼쳐 보질 못하는 것이다.”
“……!”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정곡을 찔렸다.
송금백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 표정은 목적 없는 분노와 광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서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지금 그 표정은 한결 낫군. 강호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무림인, 그 자체야.”
“네놈…….”
“이제야 좀 얘기할 맛이 나는 것 같아. 기실, 네가 단번에 수락해 줄 줄은 몰랐지 뭐냐.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담사영이 만들어 놓은 똥구멍들이나 지져 볼까 싶었더니만, 대뜸 만남이 성사되었군.”
송금백이 차갑게 말했다.
“할 말은?”
서량은 더는 질질 끌지 않았다.
“너, 담사영 뒤통수칠 생각은 있냐?”
송금백은 어이가 없었다.
뒷골목 파락호들이나 쓸 법한 교양 없는 말투는 둘째 치고, 그 내용이 너무나도 파격적이었다.
“나더러 담사영을 배신하라?”
“배신? 배신은 상대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너 설마, 정말로 담사영을 믿고 있었던 거냐?”
“…….”
“그럴 리가 없지. 네가 제아무리 욕심이 없어도 진심으로 담사영을 믿었을 리가 없어. 그건 욕심의 문제가 아니라 지능의 문제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송금백은 진심으로 담사영을 믿지 않았다.
더 웃긴 것은 그를 믿지 않는데도 그에게 끌려다녔던 자신이었다.
서량의 말마따나 그는 담사영을 믿지 않는 스스로의 자세가 만족스러워 휘둘리는지도 몰랐던 멍청한 놈이었다.
이 정도면 한 단체의 수장직을 박탈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송금백은 새삼 자신의 무능력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일까? 갑자기 화가 났다.
자신의 무능력함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에 더 화가 났다. 서량이 말했다시피 일신의 능력은 부족하지 않은데, 왜 결과는 이따위로 나왔을까.
답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인정했다. 이 분노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에서 나오는 분노니까.
“할 말은 그것뿐인가?”
“이것저것 많았지만, 결국 그게 본론이었지.”
“약속은 지키겠다. 이만 가라.”
“안 지켜도 좋아. 애초에 믿지도 않았으니까.”
“…….”
“그러니 너도 담사영을 믿지 마라. ‘진심’으로.”
송금백이 버럭 소리쳤다.
“나더러 협잡이나 일삼는 병신 머저리가 되라는 뜻이냐!”
“그게 뭐 어때서?”
“뭐라?!”
“놈은 장기판에 바둑돌을 들고 와서 규칙을 바꿔 버린 놈이야.
하지만 난 담사영의 방법 자체를 욕하고 싶지 않아. 오히려 칭찬해야지, 판을 흔들었는데. 그것도 능력 없으면 못 하는 거야.”
“……!!”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 적어도 나와 너, 그리고 담사영 셋이서 이기겠다고 나선 이 대국은 협잡이나 배신 같은 말랑말랑한 방법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것까지 제한하며 싸우기에는 내 어깨에 지고 있는 목숨이 너무 많아.”
송금백이 입술을 깨물었다.
수장으로서의 덕목. 그는 절강에서 서량보다 더 수장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수장으로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는 따로 있으나, 전투를 벌일 때는 주변 도움을 받아서라도 생존해야 마땅했다.
서량은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자신을 뒤쫓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죽으면 전쟁이 터지니까.
그랬던 서량이, 지금은 자신 앞에서 수장으로서의 덕목과 천하 패권을 쥐려는 이로서의 자세를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이 미친 전장에 한해서만큼은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나는 이미 그와 손을 잡았어. 너의 교언(巧言) 따위에 사파 종주로서의 자존심을 뭉갤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은 하나이고, 취할 행동도 하나밖에 없다.”
“……?”
“철혈성부터 쓸어 버리겠다.”
송금백이 눈을 부릅떴다.
서량이 미소가 희미해졌다.
“적의 약점을 공략하는 것은 전술의 기본이지.
어차피 담사영은 이쪽을 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우리는 놈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상처 난 곳부터 쑤시고 들어가야지.”
“뭐라……?!”
“수장의 정신머리가 이따위이니, 병력 조금만 파견해서 뒤흔들면 손쉽게 무너질 것 같군. 너 같은 놈들 상대하는 방법이야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라.”
“이…… 이!”
“왜? 비겁하다고 생각하나?”
“닥쳐라! 진정 본성과 일전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주마!”
“오호?”
서량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거 좋지. 오늘의 자리에서 전쟁의 북소리가 울릴 줄은 상상 못 했지만, 뭐 그것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우우우우웅!
송금백의 몸에서 시뻘건 용형의 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묵혈괴룡공의 발현이었다.
“적의 수장인 네놈부터 묻어 주마!”
호왕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할 수 있잖아?”
“무슨 헛소리냐!”
“방금 네 스스로 뱉은 말도 얼마든지 깨 버릴 만한 놈이잖아, 넌. 오늘만큼은 날 건드리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
“너는 그런 놈이다. 욕심도 사라졌고, 이빨도 반쯤 빠져 버렸지만 아직 발톱은 그런대로 쓸 만한 놈이야.”
“그것은!”
“화난다고 제가 뱉은 말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놈. 너나 나나 딱 그 정도인 거야. 그래서 천하를 얻으려고 이 난리를 치는 것이지.”
송금백의 얼굴에 허망함이 깃들었다.
왜일까? 점점 서량의 몸이 거대해지는 것 같았다. 그 거대해진 몸으로 양손을 펼쳐 자신을 조종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실에 묶인 인형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농락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은 아직 심마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그 심마를 일으킨 자의 혓바닥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더 깊은 심마에 빠져들었음을 증명한다.
서량이 악마처럼 웃었다.
“전쟁 외교에서의 배신, 그거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