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천하는 어디에도 없었다 (3)
마동필의 시선은 철저하게 야산 정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생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듯, 검을 품에 안은 채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여전하군.’
그런 마동필을 힐끔거리며, 무담은 내심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극마지경에 올랐음에도 오만함을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증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이전처럼 교주님을 위해 일할 뿐이었다. 당장 저곳에서 무슨 일이 터진다면 자신보다 더 빨리 도달할 것 같았다.
‘호법원에서 나갔지만, 여전히 훌륭한 호법이다.’
호법지도(護法之道)를 잃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아니 말할 수 없겠다.
그때, 여강휘가 무담에게 다가왔다.
“대호법님.”
“말씀하시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빙궁을 이어받을 소궁주다. 무담이라도 언사를 가벼이 할 순 없었다.
여강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무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위기?”
“그렇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만.”
“음, 그게…….”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하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우우웅.
여강휘의 몸에서 은은한 청백색 진기가 일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폐부가 시원해지는 서늘한 기운이었다.
“역시,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합니다. 이곳 전체에 둘러친 빙백기(氷魄氣)가 조금씩 요동치고 있거든요.”
무담의 눈이 번뜩였다.
빙백기가 요동친다? 뭔가 수상한 자들의 움직임이라도 포착했다는 뜻인가?
여강휘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치이익.
여인의 섬섬옥수보다도 아름다운 손끝에서 작고 새하얀 구슬이 만들어졌다. 빙백기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빙기(氷氣)의 결정체였다.
“빙백천라진(氷魄天羅陣)이라는 수법입니다. 그리고 이건 빙백천라진의 핵(核)이지요.”
“빙백천라진?”
“그렇습니다. 이곳으로 오면서 일정량의 빙백기를 대기에 박아 두었지요.
서서히 녹아, 대략 한 시진이면 사라질 기력이지만 그 전까지는 사소한 움직임 하나라도 포착할 수 있는 기공진(氣功陣)입니다.”
“움직임을 포착한다?”
“그렇습니다. 빙백기가 제게 알려 주거든요.”
무담의 얼굴에 흔치 않은 놀라움이 일었다.
저런 신묘한 수법이 있다면 누군가를 호위할 때 크나큰 무기가 될 것이다. 호법원의 수장으로서 무척이나 탐이 나는 능력이었다.
‘과연 새외의 무공들은 하나같이 독특하다더니.’
무공으로 기공진을 형성한다. 중원 무공으로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극에 이른 깨달음이 아닌 무학 자체의 특성으로 저런 것이 가능하다니.
“어느 순간, 이상할 정도로 많은 인기척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어? 지금도 계속 그러네요.”
“대체 얼마나 많길래 그러시오?”
“수백입니다. 이 기세면 족히 천은 되겠는데요.”
무담의 눈이 번쩍였다.
‘천 명?’
이 일대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데 느닷없이 천 명에 가까운 사람이 들이닥치는 중이라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고수요?”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능도 아니고, 신공(神功)을 십 성까지 익히고 난 이후에야 쓸 수 있는 수법입니다. 저도 처음이라서……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습니다.”
여강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움직임이 빨라요. 무척이나. 한데 너무 중구난방이군요. 백 명, 이백 명씩 나눠서 오는 듯합니다.
저희끼리는 체계적이지만, 모두가 다른 진형을 짜서 움직이는 듯합니다.”
다른 진형을 짜서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천 명이다.
어찌 되었든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무담이 마동필을 불렀다.
“들었는가?”
“예.”
“이곳은 나와 소궁주가 맡겠네. 자네는 일단 교주님께 가 보게.”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파악!
마동필이 순식간에 야산으로 달려 나갔다.
무담의 마안이 사방을 훑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여강휘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실력은 한참 아래지만, 그가 사용하는 빙백신공은 중원 정점의 신공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백 년 빙궁 역사의 총화였다.
분명히 뭔가가 있다.
찰칵.
엄지로 검을 살짝 뽑아 놓은 그의 마기가 조금씩, 조금씩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 * *
배신.
언제 들어도 불쾌하고 섬뜩한 단어.
고작 두 음절로 이루어진 그 단어가 주는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파급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마귀 덕에 송금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득이 없다.”
“음?”
송금백이 숨을 몰아쉬었다. 커져만 가는 심마, 그러나 지금껏 사파 무림을 다스려 온 절대자의 정신력이 어떻게든 그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담사영을 배신한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에게는 별 이득이 없어. 오히려 위험만 가중될 뿐이야.”
서량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수장이 제 역할을 못 할 때, 그나마 가장 안전한 지파가 어디인 줄 아나?”
“무슨 소리인가?”
“정파야. 그들은 일인 독재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연합체이기에 맹회의 수장이라도 주변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지.”
“……?”
“그러나 본교와 너희 철혈성은 다르다. 철저한 일인 독재에 중앙 권력을 유지하는 단체들이지.
그런 단체는 수장이 흔들릴 경우, 그 집단 전체가 사분오열하게 된다.”
서량이 엄지로 북쪽을 가리켰다.
“담사영과 손을 잡기 전까지의 너는 배포 넘치는 사파의 거두였다.
그러나 담사영과 손을 잡은 후, 너는 제 인생조차 주도적으로 끌고 가지 못하는 한낱 인형에 불과하게 되었지.”
“……!!”
“너는 지금 충분히 위험해. 이유인즉, 네가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야. 네가 위험하니 널 따르는 철혈성도 위험하다.”
송금백이 입술을 깨물었다.
“궤변이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아. 게다가 본성은 그리 물렁물렁한 조직도 아니다.”
“이제 그만하지.”
“뭐?”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현실을 외면하는 멍청한 수장 연기는 그만하라는 거다.”
“……!”
“철혈성은 위험해. 그리고 철혈성을 위험하게 만든 건 네놈 탓이야. 너의 잘못과 과오를 인정해라.”
송금백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상대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답은 간단했다. 그 역시 서량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는 충분히 실수했어. 보통 그 정도 실수를 저지르면 만회가 불가능하지. 하지만 천하일통을 노리는 바보 두 명으로 인해, 너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
“우릴 도와서 담사영을 쳐라.”
강렬한 유혹이었다.
정말이지 놀랍게도, 송금백은 담사영을 치라는 서량의 말에 형용하기 힘든 유혹을 느꼈다.
서량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자신은 지금껏 실수했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달콤했다.
송금백이 입을 열었다.
“무림에 발을 들인 자, 죽지 않는 한 도망칠 수 없다고 했지?”
“그래.”
“그래도 내가 이 판에서 발을 빼겠다고 하면, 너희 마교는 우리를 칠 것인가?”
아까 했던 말의 반복이다.
하지만 서량의 대답은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건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다?”
“담사영도 같은 마음일 거란 말이다. 이유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당연하다.
서로 힘을 뭉치기도 했고, 배신도 했다. 그런 놈이 이제는 더 싸우기 싫다며 빠지겠다고 한다.
그걸 두고 볼 멍청이는 없다.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없애고 난 이후 전쟁을 재개할 것이다.
“나와 담사영은 말하지 않아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너희는 무림맹과 마교를 동시에 상대하게 되겠지.”
“그것이 규칙이기 때문에?”
“전장의 법도이기 때문에.”
송금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의 한숨은 이전의 그것과 달랐다. 그간 자신을 고통받게 한 미망에서 벗어나고 있는, 한숨으로 심마를 뱉어 내는 또 다른 송금백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도망칠 수 없는 전장에 발을 들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송금백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네 말이 맞아. 그래,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그 당연한 진리를 나보다 삼십 년도 더 늦게 태어난 청년에게서 다시 확인받다니.”
“…….”
“나도 다 되었군. 수장 실격이야.”
“…….”
“하지만.”
송금백의 눈이 빛났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심마를 준 사람과의 대화로 인해 심마에서 벗어난다.
이래서 인생은 재미있는 것이다.
“그래도 난 이 판에서 빠지겠다.”
이전과 같은 말이되, 완전히 다른 말이기도 하다.
사람이 바뀌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법,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송금백의 말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이 판에서 빠지면? 나와 담사영의 힘을 감당해야 할 텐데?”
“고민해 봐야지. 하지만 내 생각기로, 이 판에서 끝을 보는 것보다는 후퇴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게 더 나아 보이는군. 지금 당장은 말이야.”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나?”
송금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
서량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좋아.’
송금백의 배신?
애초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상태가 정상이든 아니든, 그는 명분이 없으면 배신을 하지 않을 남자니까.
다만 담사영을 박살 내는 데에, 철혈성이라는 큼직한 짐을 떨쳐 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마음의 부담을 하나 덜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서량은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
“고맙군.”
송금백의 얼굴에 편안함이 드리워졌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자네 덕분에 그 망할 심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어. 그 부분만큼은 분명한 감사함을 표하고 싶군.”
“고마우면 답례가 있어야지.”
“그래서 빠져 주잖나? 그것만으로도 자네에겐 큰 선물 아닌가?”
서량이 피식 웃었다.
여유롭게 툭툭 내뱉는 것을 보니 확실히 돌아온 모양이었다.
외교 담판이 중요한 이유였다. 말 몇 마디, 대화 몇 번으로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서량은 오늘의 만남으로 또 한 번 대국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결과를 만들었다.
“빠지려면 빨리 빠져라. 신경 거슬리니까.”
“교양 없이.”
“나야 너희가 마귀 집단이라는 부르는 조직의 수장 아닌가.”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이제야 진심 어린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근래 들어 가장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그럼 난 이만 간다.”
“방심하지 마라. 언제 돌변해서 자네들부터 공략하려 들지 모르니까.”
“싸움은 얼마든지 받아 주지.”
두 사람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응?’
몇 발자국 걷던 서량이 멈추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지? 뭔가 공기가…….’
송금백도 비슷한 것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이 일대가 이리 텁텁했던가.”
순간 서량은 익숙한 기운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필이?”
크르르릉.
호왕이 긴장한 듯 자세를 낮추었다.
멀리서 마동필의 외침이 들려왔다.
“교주님!”
두두둥.
기다렸다는 듯 저 멀리 남쪽, 서쪽, 북서쪽에서부터 시커먼 인파가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서량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