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천하는 어디에도 없었다 (4)
무담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암살자?!”
여강휘가 즉각 손을 뻗었다.
쾅! 푸스스스스.
강력한 냉기를 머금은 일장(一掌)이 바위에 박힌 기종의의 몸에 적중했다. 기종의가 또 한차례 피를 토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내상 위에 내상, 기절은 덤이었다. 십대고수급의 내공을 지닌 그라고 해도 당분간 깨어나기 힘들 것이다.
여강휘가 말했다.
“가십시오.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고맙소!”
파아아악!
무담이 엄청난 속도로 야산을 향해 내달렸다.
신법을 이 정도 속도로 구사해 본 것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가 필요했다.
무담의 눈이 번뜩였다.
마공의 기감으로 파악했던 암살자들의 모습이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많다! 이럴 수가!’
암살자들의 수준은 둘째다.
여강휘의 말은 정확했다. 복면을 쓴 암살자들이 거의 천 단위로 몰려드는데, 다른 의미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하나하나가 일류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정련된 살기였다.
개중에는 무담조차 아차 하는 순간 놓칠 정도로 고도의 은신술을 발하는 암살자도 있었다.
일류를 넘은 초일류, 새로이 창설된 강호십대살수조직의 수장급 무공이었다.
‘십대살수조직? 이런!’
그렇다.
저들은 강호십대살수조직에서 선별한 최고의 암살자들이었다. 십대살수조직 중 몇 개의 방파가 끼어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절반 이상이 참여한 것 같았다.
‘대체?!’
누가 이 많은 살수를 보냈는가?
아니, 이곳에서 교주님과 철혈성주가 만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는가?
파파파파팡!
순식간에 나무 십여 그루를 뛰어넘은 무담은, 문득 저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강력한 검기를 느꼈다.
암살자가 아님에도 은신술이 대단했다. 그리고 검기는 지닌 은신술보다도 더 날카롭고 강력했다.
무담이 검을 뽑았다.
차아아아앙!
삼척장검을 뽑아 든 그가 솟구치는 검기를 향해 무자비한 일격을 내리쳤다.
콰앙! 콰드득!
검기를 뿌린 무인이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상대는 암살자가 아니었다. 아마도 철혈성주를 지키는 호위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무담은 냉정했다. 지금은 상대가 누구라도 봐줄 때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주님의 안위였다.
퍼퍼퍼펑!
우측 삼십 장 밖에서 마동필이 전투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에는 철혈성주의 호위가 넷은 붙은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번쩍!
붉은 화광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호위들의 기세가 공중분해 되었다. 몇 번의 수 싸움 이후 일격에 마무리 지어 버린 것이다.
‘좋아.’
쾅!
거칠 것이 없었다. 신교의 대호법과 전(前) 호법이자 현(現) 교주 밀착 호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거의 정상에 도달했을 때쯤.
커허어어엉!!
천지를 뒤흔들 사자후가 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무담과 마동필의 몸이 주춤했다. 그 사자후에서 느껴지는 살기와 위엄이 얼마나 대단한지, 극마의 고수인 그들조차도 음파(音波)에 휩쓸려 날아갈 뻔했던 것이다.
‘엄청나군.’
호왕의 포효였다.
안 그래도 괴물 같았던 동체가 더 성장한 이유는 서량의 구유마공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 마공의 성장이 호왕의 이지(理智)를 일깨웠다. 전신에 충만한 기의 질적 향상을 도왔다. 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 했다.
내공심법과 외가무공만 모를 뿐, 호왕은 어엿한 무림 고수나 다름없었다.
파아앙!
“교주님!”
무담과 마동필이 서량의 곁으로 다가왔다.
서량이 표정을 굳혔다.
“뭐야, 저것들?”
서량과 송금백에게서 제법 떨어진 거리에 오십여 명의 살수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있었다.
사자후 직격탄이었다. 호왕의 사자후에는 실제 구유마기가 잔뜩 실려 있었고, 그 막강한 마기로 펼친 음공(音功)을 살수들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처음보다 열 배, 아니 스무 배에 가까운 전력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교주님! 일단 뒤로 피하시지요!”
그때, 송금백이 물었다.
“무슨 짓이지?”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 짓이라니?”
“설마 내게 살수를 보냈나?”
“장난하나? 댁이 살수 몇 보낸다고 죽어 줄 만큼 만만한 양반이었으면 진즉에 내 손에 죽었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송금백은 서량의 눈을 보았다.
‘거짓이 아니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일은 서량도 모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잔뜩 찌푸린 얼굴 너머의 의아함과 솔직한 당황이 묻어났다.
‘그럼 누구지?’
그때, 서량이 말했다.
“대호법, 동필 그리고 호왕.”
“예!”
“일단 저 치들 좀 막아. 쪽팔리게 당하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존명!”
파아아악!
무담과 마동필, 호왕이 제각기 몸을 날려 살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퍼어엉! 콰직! 서걱!
온갖 파공성이 일대를 울렸다.
철벽의 검법을 구사하는 무담, 광기 어린 마공을 난사하는 마동필, 야수의 살상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호왕의 분투.
넓은 범위에서 올라오는 살수들의 공격을 빈틈 하나 없이 차단한다.
절대고수의 무력은 하나의 군단이라고도 칭해지는바, 그들이 막아 주는 한 살수들이 이곳으로 올라올 확률은 낮았다.
게다가 산 중간에는 송금백의 남은 호위들도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서량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네가 날 죽이겠답시고 몰래 끌고 온 건 아닐 테고…….”
“자네가 했던 말, 그대로 돌려주지.”
살수 정도로 죽일 수 있었다면 진즉에 죽였을 거란 말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아니겠지?”
“아닐 거다.”
똑같이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의심 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담사영?!’
서량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 혹시 감시당하고 있었냐?”
송금백의 눈이 깊어졌다.
“그건 알 수 없다.”
담사영이라면 충분히 사람을 붙이고도 남는다.
하지만 송금백은 그가 그런 악수를 둘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걸리면 관계가 악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걸 떠나 살수 조직에게 의뢰할 이유가 없다. 담사영 역시 천하제일을 논하는 고수, 몇 개의 살수 조직을 퍼부어 봤자 송금백을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순간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황태자?”
송금백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황태자 전하 말인가?”
퍼어엉! 화르르륵!
구유마공의 지종열화벽이 서쪽 일대를 전면 통제했다. 마동필이 마공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막기가 힘들다는 증거였다. 살수들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숫자가 너무 많은 탓이리라.
“담사영이 소환했을 확률은 낮아.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서 만나는 걸 알 사람은 담사영뿐이다.”
“……!”
“혹시 담사영이 황태자에게 사소한 것까지 보고하나?”
송금백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서량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서량의 미소를 본 송금백은 깨달았다.
‘정말로 황태자가?!’
적어도 무림인인 이상, 마교주와 철혈성주가 만나는 자리에 살수를 보낼 영향력 있는 인사는 없다고 봐도 좋다.
그렇다. ‘무림인’이라면 그럴 리가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무림인이 아니라면?
무림인이 아닌데도 저 많은 살수 조직을 부릴 만한 영향력과 자금력을 갖춘 사람이 당금 중원에 얼마나 있겠는가?
“확신은 금물이다. 온갖 미친 짓이 난무하는 전장이야. 담사영이 그랬을 수도, 혹은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누군가가 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네도 알고 있겠지. 확률 낮은 쪽을 배제하고, 확률 높은 곳부터 주시하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물론 그렇지.”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누구야? 아니, 뭘 어쩌겠다고 저런 승냥이들을…….”
그때였다.
서량의 머리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살수 조직을 보내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구지?’
담사영? 황태자?
아니면 송금백?
‘그럴 리가. 오히려 이득을 봤으면 내가 봤…….’
순간,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이 미친놈이?’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서량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냐?”
송금백은 대답이 없었다.
서량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일단 싹 청소하고 갈 길 가자고. 각자가 직접 알아보는 게 좋겠군.”
“……그렇군.”
송금백이 날카로운 눈으로 서량을 노려보았다.
“자네들이 아니라는 것, 믿고 가겠다.”
서량의 응수는 기가 막혔다.
“지랄하지 마라. 널 죽일 거였다면 살수 따위 쓸 것 없이 지금 날 호위하는 호위단을 퍼부어도 끝나는 문제야.”
일부러 호천마황단을 언급했다. 송금백의 얼굴에 의심의 빛이 사라졌다.
우우우웅!
서량의 손에 천마도가 잡혔다.
송금백의 손에 태천거검이 들렸다.
“후딱 해치우지.”
“발목은 잡지 말도록.”
“너 나한테 진 거 기억 안 나냐?”
“시끄럽다.”
파아앙!
두 절대고수가 산을 오르는 살수들 한복판으로 날아들었다.
반 시진 후.
“후우, 지독한 새끼들. 아예 죽을 생각을 하고 왔군. 그래도 그렇지, 벽력탄까지 터트릴 줄은 몰랐네.”
전포를 털어 내는 서량의 얼굴은 검댕투성이였다. 그나마 옷은 멀쩡했다.
무담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나야 뭐. 대호법은?”
“괜찮습니다.”
서량이 마동필을 바라보았다.
마동필이 헛기침을 했다.
“다쳤어?”
“조금 긁혔을 뿐입니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동필의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노력해라.”
“……송구하옵니다.”
오히려 덩치가 큰 호왕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성장하기 전에도 이미 금강불괴에 가까운 몸뚱이를 지니지 않았는가.
전신 털에 피가 묻어 있었지만 긁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서량이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송금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호위들과 이동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서글퍼 보였다.
“속고 속이는 판이라…… 어쩌면 저놈이 원하는 천하는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르지.”
“예?”
“아니다.”
서량이 몸을 돌렸다.
“돌아가면 총군사 머리통이나 두들겨 주자고.”
느닷없이 호요성을 언급한다. 무담과 마동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누가 천마신교 총군사 아니랄까 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감히 교주까지 속이고 살수를 불러 모아? 나중에 돌아가서 회초리를 때려 줘야겠어.”
“예, 예?!”
무담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설마 살수를 보낸 것이 총군사란 말입니까?”
“아마도?”
말은 그러했지만 확신하는 듯했다.
“살수를 불러 의심의 싹을 틔운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은 담사영도, 황태자도 그 누구도 아니야. 바로 나다.”
“……!”
“총군사라면 충분히 이런 짓을 벌일 만하지. 전과가 없는 것도 아니고. 뭐, 이름 모를 제삼자의 짓이라면 고마워해야겠지만.”
마동필이 입을 뻐끔거렸다.
“하, 하지만 총군사라면 교주님께 언질이라도…….”
“그럴 새가 없었잖냐. 게다가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지.
만일 내가 살수의 출현을 알고 있었다면 송금백이 단박에 의심했을 거다. 미망에 빠져 허우적대곤 있다 해도 놈은 나에 필적하는 강자니까.”
무담과 마동필은 충격적인 얘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서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사부님이 총군사 하나는 잘 뽑았어.”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일만 잘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