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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503화 (502/774)

503화. 불공대천(不共戴天) (3)

늦은 밤.

스르르.

은은한 백색으로 주변을 환하게 물들였던 여강휘의 진기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후우.”

뱉어 내는 숨결은 몹시 뜨거웠다.

천하에 다시 없을 빙공(氷功)을 수련하고 있지만, 그 역시 인간일 뿐이었다.

대자연의 힘을 빌려 특수한 무공을 연마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을 구현해 내는 것은 사람이니 몸 자체가 얼음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여강휘는 아쉬웠다.

아버지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 빙백무(氷魄武)는 빙궁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그래, 마치 서 교주가 익히고 있는 군림마황기와 같지.

군림마황기는 초대천마가 창안한 절대마공으로 수백 년을 거쳐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들었다.

빙백무도 그와 같다. 초대 궁주께서 창안하신 빙백무는 수백 년의 세월을 거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지.

수백 년.

말은 쉽지만 하나의 무공을 수백 년간 보완해 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代)를 이어 무공을 완성시킨 역대 궁주들의 끈기와 정성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빙백무와 군림마황기는 다른 점이 있었다.

- 서 교주에게 듣기로, 군림마황기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미 극한의 위력을 발하는 절대마공이었다고 하였다.

빙백무는 그렇지 않아. 빙백신공의 원형은 빙륜심법(氷輪心法)으로, 네가 처음 무공에 입문했을 때 익혔던 무공이다.

우리의 빙백무는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 하늘까지 닿은 절세의 무공이다.

그만큼 빙륜심법이 탄탄한 무공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기실, 빙궁의 무사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기본공에 불과하지만,

그 기본공이 없었다면 빙궁은 새외제일(塞外第一)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 그래서 궁주의 혈육은 빙륜심법을 대성한 연후에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간다. 자,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네가 익히고 있는 빙백무를 진정 대성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찰이 필요할 것 같으냐?

무엇을 이해해야 빙백무를 너의 몸에 온전히 때려 박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여강휘의 연배에 빙백신공을 십 성의 경지까지 익힌 자는 빙궁 역사에도 몇 없었다.

말하자면 천재다. 여강휘는 두말할 나위 없는 무공의 천재였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재능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진정 무공의 이치를 뛰어넘어 무(武) 자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재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여강휘는 그것이 궁금했고,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 얼음을 다루려 하지 말고 네가 얼음이 되어라. 이미 네 몸이 하나의 얼음이 되었거늘 무공이 대수고, 대성이 대수랴?

단순히 신공을 완성한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재능으로 오를 수 있는 영역은 딱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영역까지다.”

얼음이 되어라. 여기서부터는 재능이 필요치 않다.

‘그거 진짭니까, 아버지?’

여강휘는 서량의 말을 떠올렸다.

- 재능? 재능이라…… 뭐,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어떠냐? 어차피 평생을 걸어야 할 무공지로(武功之路)인데 말이야.

더 빨리 가는 것보다는, 더 확실하게 가는 게 중요하지.

물론 극치에 오르면 또 달라져. 단순한 골격이나 감각을 떠나 지금껏 네가 쌓아 왔던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니까.

다만, 지금의 네가 그 경지를 논하기에는 아직 무리라 할 수 있지.”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다.

자존심이 상하되, 그것이 진실이다. 그는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 누구보다 빨리 지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크나큰 벽에 절망하고 있었다.

강해지고 탄탄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벽을 뛰어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얼음…… 얼음이 되어라…….”

“뭔 웃기지도 않는 소리냐?”

깜짝 놀란 여강휘가 옆을 바라보았다.

“헉! 언제 왔습니까?”

“뭘 언제 와? 한참 전에 왔지.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앉아서 잡초만 뜯고 있다가, 네가 웬 헛소리를 하길래 투덜거려 봤다.”

놀랍게도 여강휘 옆에는 서량이 앉아 있었다. 손만 뻗어도 닿을 거리였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무슨 고민이 그렇게 깊어서 사람이 온 줄도 몰랐어? 딱히 기척을 숨긴 것도 아니구먼.”

“아…….”

여강휘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하는 고민이지요.”

“무공 대성?”

“딱히 그것만은 아니지만…… 예, 뭐 비슷합니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비슷한 건 또 뭐야? 썩을.”

여강휘가 씨익 웃었다.

동생 여상린을 되찾은 이후, 그는 어지간해서는 우울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항상 웃으면서 살고자 했고, 실제로 웃음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참 웃기가 힘들다.

“내일 가실 겁니까?”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말도 안 해 줬는데 어떻게 알았대?”

“뻔하지요. 지금껏 제가 봐 온 교주님은 시간을 끄는 걸 좋아하는 분이 아니니까요.”

“허허.”

“게다가 옛날부터 그랬잖습니까. 반드시 담사영을 죽이고 싶다고.”

“그랬나?”

“예. 그랬지요. 기억 안 나십니까?”

“글쎄다. 근래 원체 바쁘게 살다 보니까 기억력이 점점 감퇴하는 기분이야. 하긴, 그놈 죽이는 걸 목표로 이 악물고 버텼으니, 너한테도 말했을 수 있겠다.”

여강휘는 전혀 섭섭해하지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그래서 강해지신 겁니까?”

“음?”

“그를 잡기 위해서, 그와 대치했을 때 멋지게 한 방 날려 주고 싶은 마음에 아득바득 거기까지 올라가신 겁니까?”

서량이 피식 웃었다.

“조금 다르지.”

“말씀해 주십시오.”

“글쎄? 너도 알다시피 본교는 상당히 살벌해. 뭐, 요새는 그런 분위기가 많이 죽기는 했다만 아직도 강자존(强者存)의 원칙이 마인들의 가슴속에 뿌리내리고 있지.”

“강자존. 강자만이 존재한다. 강자만이 가치가 있고, 강자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 게다가 내 스승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감정 표현을 안 하시는 분이었거든. 뭐랄까, 알아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지.”

“그렇군요.”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기는 했어. 주화입마 걸려서 내공을 다 잃은 제자를 고죽림에 던져 두다니. 참나, 지금 생각하니까 진짜 웃기네.”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즉, 강해지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라. 이 말입니까?”

“그거야 기본이겠지. 네 말마따나, 담사영을 죽이고 싶어서 단련을 더 탄력적으로 한 것도 맞아.”

“그럼 무엇이 다릅니까?”

“음?”

하얀 달빛을 받는 여강휘의 얼굴은 평소보다 유독 하얗게 보였다.

“당신과 나의 차이점. 북해빙궁의 소궁주와 천마신교 교주의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

“환경이 다르고 익힌 무공이 다르지요. 그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강해지고 싶어 하는 열망은 저나 교주님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제가 더 강할지도 몰라요.”

“…….”

“욕심이 과하면 그나마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들 하지요?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도 그래.”

“예. 그렇지요. 즉, 강해지고 싶어 하는 저의 일념은 교주님을 뛰어넘었습니다. 실례인 말씀이지만, 단순한 무학적 재능도 제가 더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맞는 말이야.”

“한데 왜 이런 격차가 발생한 것인지, 저는 왜 아직 천위(天位)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는지 궁금합니다.”

여강휘가 한숨을 쉬었다.

“예, 궁금하네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혼란과 답답함을 모조리 쏟아 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강휘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 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일순 여강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좀 못난 모습을 보였지요?”

“혹시 이거 알아?”

“예?”

“너는 참 한계 짓는 게 많은 놈이라는 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 생각하고 혼자 답을 내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맹신하고 있지.

말을 들으면 그런가 보다, 하면서도 자신의 주관은 절대 바꾸지 않아. 허! 그런 면에선 너나 린이나 비슷하구먼.”

여강휘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이 웃으며 검지를 흔들었다.

“그런 태도는 좋지 않아. 뭐든 당연하다 생각지 말고, 뭐든 의문을 가지는 게 필요해.

몸이 충분히 단련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턴 머리고 쪼개질 때까지 고민해야지.”

“당연하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습니까?”

“음.”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오늘만큼은 푹 자 두려고 했다. 잠이 오지 않아도 어떻게든 수면에 들려고 했다.

내일은, 그리고 내일의 자신은.

지금 이때까지 살아왔던, 어떤 의미로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존재와 만나러 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멋진 날을 위해 잠을 충분히 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른 것 같다.

여강휘의 순수하고도 솔직 담백한 눈을 보니, 도무지 들어가서 잘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눈은 주서윤의 그것과 닮았고, 종리영의 그것과 닮았다. 그 안에는 마동필이 있었고, 피와 살점이 튀는 전장에서 미친 듯이 함성을 지르는 염라가 있었다.

“……하긴, 굳이 특별할 필요가 없지.”

“예?”

“아니다.”

내일을 준비한다고, 오늘을 나답게 살지 않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아까 네 입으로 얘기했지. 환경이 다르고 익히는 무공은 다르다고. 그건 이해하지만,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같은 거 아니냐고.”

“그랬습니다.”

“그걸 왜 고민하지 않지?”

“예?”

“환경이 다르고 무공이 달라. 바로 거기서부터 너와 나의 차이는 극심해. 그건 절대 당연하게 받아들일 게 아니란 말이다.”

“……!!”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자연의 섭리밖에 없어. 심지어 세상에는 자연의 섭리마저도 거역하는 힘을 휘두르는 자들도 많아. 대표적으로 수왕이란 놈이 있었지?”

“…….”

“절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절대 우습게 보지 마. 그 어떤 것도 절대 그냥 넘기지 말고, 현상 그 자체를 파헤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런…….”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같다? 웃기는 소리다.

그럼 이 세상에 약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나? 강함을 향한 욕구는 대자연에 나고 자란 모든 생물의 본능이야.

한낱 곤충도 강함을 추구하는데, 너의 강함은 뭐 얼마나 특별하다고 그리 강조하는 거지?”

“…….”

“그런 것이야말로 당연한 거야. 그것이 왜 당연한지를 깨달았으면, 바로 그때부터 그 이상을 바라봐야지.”

“아…….”

“무공이 다르면 왜 다른지, 저 무공의 특색은 무엇인지, 환경이 다르다면 저 환경이 주는 이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지금의 나는 과연 옳은지.”

여강휘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그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때,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이다.”

“……!”

“그리고 그러한 행위야말로 무도(武道)를 통한 자아실현, 자아의 완성이다.”

순간 벼락과도 같은 충격이 여강휘의 머리를 강타했다.

‘얼음이 되어라…….’

빙백무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빙백무가 추구하는 것이, 과연 내가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가.

파삭!

단단한 껍질에 한 줄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서량이 소매를 걷었다.

“너 때문에 잘 생각도 접었는데, 뭐라도 성과가 안 나오면 섭섭하지. 오늘은 고귀하신 빙궁의 직계 혈통이나 두들겨 패면서 놀아야겠다.”

담사영을 만나기 전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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