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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504화 (503/774)

504화. 불공대천(不共戴天) (4)

“음.”

현천진인의 눈이 깊어졌다.

자정이 넘은 밤. 창밖에서부터 쏟아지는 별빛이 몹시도 뚜렷하게 두 눈에 아로새겨졌다.

별빛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제각기 크기와 빛의 강함은 다르지만, 어느 하나 미태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는 그중 각이 진 일곱 개의 별을 바라보았다.

“허허, 칠성(七星)이라.”

현천진인은 저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음을 먹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하늘이 이 갈 때가 다 된 늙은이의 마음을 진즉 알고 있었던 것인지, 저 고운 별 중 유독 눈에 띄는구나.”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때가 왔다.

펄펄 끓는 고열도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추었고 덜덜 떨리던 손끝도 무척이나 안정되어 있었다.

땅을 박차고 달리면 한달음에 이쪽 봉우리에서 저쪽 봉우리까지 건널 수 있을 듯했고, 신명 나는 검무(劍舞) 한 번에 구름이 놀라 흩어질 것만 같았다.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가 되었다. 비로소, 이제야.

현천진인이 눈을 감았다.

끼이이익.

“응?”

물그릇을 들고 온 주서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할아버지?”

현천진인이 사라졌다.

지이이잉.

마검이 울었다.

묵왕과 흑혈은 하나의 이름이며, 동시에 하나의 생명을 공유한다. 강호에서도 손에 꼽히는 신병이자 마병이기에, 검 스스로가 우는 일도 흔치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짙고 짙은 울림을 발한 적은 없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오직 마동필에게만 들리는 깊은 검명(劍鳴).

‘왜 이러지?’

마동필은 의아해하며 검병을 쥐었다.

우웅.

약간의 마기를 전달하자 검명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떨림은 여전했다. 주인의 마기 덕에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았지만, 검명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겁을 먹었다?’

그렇다.

검에 자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동필은 흑혈마검이 공포에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 된 자에게 전하는 검의 속삭임이 그러했다.

‘흑혈이 겁을 먹다니. 대체 왜?’

그때였다.

“괜찮네.”

깜짝 놀란 마동필이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뒷짐을 지고 선 현천진인이 있었다.

“어르신……?”

“허허, 기척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네. 많이 놀랐는가?”

당연히 놀랬다.

당황으로 물들었던 마동필의 얼굴에 한 줄기 근심이 어렸다.

“괜찮으십니까? 산중이라 바람이 찹니다.”

현천진인의 미소가 깊어졌다.

“자네는 참으로 순한 사람일세.”

“예?”

“자네와는 제대로 된 대화도 몇 번 없었지. 하지만 전부터 알고 있었네. 자네의 순후한 성품을.”

“아, 감사합니다.”

“자네는 마도 무림에 몸을 담아, 이윽고 교주의 호위무사가 되었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네. 자네가 마도에 몸을 담았든 정도(正道)에 몸을 담았든, 지금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줬으리란 걸.”

“…….”

“자네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보증하지.”

마동필은 머쓱하여 머리를 긁적였다.

큰 칭찬을 받은 것 같은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천진인이 크게 웃었다.

“나중에 흥미가 있거든, 도(道)에도 관심을 가져 보게나. 내 자네의 관상을 보아하니 도불(道佛)과는 연이 없는 듯싶네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한 줄기 평온은 안겨 줄 수 있을 것이야.”

“아, 예.”

왜일까?

마동필은 점점 현천진인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딱히 그를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유독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현천진인이 마동필의 요대에 걸린 흑혈마검을 바라보았다.

우우우웅.

검명이 눈에 띄게 커졌다. 마동필은 당황하여 검집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검이 아까부터…….”

마동필은 무엇이 죄송한지도 모른 채 그리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현천진인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바라네.”

“예?”

“바라고 또 바라네. 천인(千人)의 피에 젖을지라도 흔들리지 않을 강한 성품을 지닌 자네는, 그 마검이 주는 마력에도 휩쓸리지 않을 것이야. 하나, 그 검을 뽑을 일이 많아지는 것은 썩 좋지 못한 일이겠지.”

“아…….”

“나는 자네가 마검을 뽑을 일이 적기를 바라네. 적을 죽이기에 앞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이왕이면……. 그래, 먼저 간 땡중이 말했듯 자비로서 상대를 대해 주었으면 좋겠어.”

현천진인이 재차 미소를 되찾았다.

“잘할 수 있을 게야. 그리 믿어 의심치 않네.”

괜히 어쩔 줄 모르겠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긁적이던 마동필이 이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의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

“어르신?”

고개를 든 마동필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현천진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 어디 가셨지?”

“후우.”

한 시진이 훌쩍 넘는 대무와 가르침으로 여강휘를 크게 깨닫게 해 준 서량이 소매를 풀었다.

“이게 뭐라고 또 후덥지근하구먼.”

천재는 이래서 무섭다.

여극도가 무슨 말을 해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여강휘는 그 말을 바탕으로 껍데기를 깨려 노력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편협했기 때문이다.

그 편협함을 깨 주고 강제로 무공을 퍼부어 육신에 깨달음을 박아 주니, 쏟아 내는 빙백무가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서량의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문제는 변화의 속도였다.

‘아직은 무리겠지. 하지만…….’

틀을 잡았다.

벽을 뚫고 흘러야 할 강물이 자꾸만 벽면과 평행하여 외따로 흐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량은 그 강물이 흘러야 할 방향을 제대로 잡아 준 셈이었다.

물론 잡아 준다고 잡히는 게 아니기도 했다. 한데 여강휘는 그걸 잡았다. 한순간에.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그것참, 역시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그때,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으나, 또한 성기고 질겨서 무엇 하나 놓치는 법도 없지. 이것이 나고 저것이 사라지는 데엔 다 그 나름의 뜻이 있는 걸세.”

몸을 돌린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움직일 만하오?”

현천진인이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는 알고 있었는가?”

“글쎄? 확신은 없었소. 이런 데에 확신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반드시 일어나겠구나, 라는 생각은 했었지.”

서량이 주루 삼 층을 힐끔거렸다.

“서윤이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으니, 당연히 털고 일어나야 정상 아니오?”

“허허.”

현천진인의 웃음소리는 몹시 듣기가 좋았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신기하군.”

“무엇이 말인가?”

“노선배의 상단전(上丹田)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빛나고 있소.”

“그게 보이는가?”

“보이오. 태양처럼 맑게 빛나는 상단전, 그곳에서 한 줄기 실이 내려와 원정을 꽉 쥐고 있구려.”

“놀랍군. 자네가 벌써 신안(神眼)까지 틔운 줄은 몰랐네.”

“신안?”

“말이 신안이지, 결국 심안(心眼)의 연장선이라고 봐야겠지. 다만 자네가 나의 상태를 그리 훤히 볼 수 있는 까닭은 땡중이 건넨 무상대능력 덕분이기도 하네.”

“그렇군.”

서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극에 이른 영력(靈力)을 이용해 마지막 원정을 열었구려.”

“그게 가능할 줄은 나도 몰랐지.”

한 번 깨진 원정은 다시 수복되기 힘들다. 적송이나 현천진인처럼 기(氣)를 한계까지 연마한 자들이라면 치료를 받고 얼마간의 생을 더 살 수 있겠지만, 보통은 원정이 소멸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그런 면에서 현천진인은 또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 번 깨진 원정지기를 끈끈한 힘으로 조여 붙이더니, 몸을 회생(回生)했다 속이고 상단전의 힘으로 재차 원정을 깨트려 버렸다.

두 번 연속의 원정 개방. 그것도 이전보다 훨씬 깊은 곳을 건드린 완전한 개방이었다.

무한(無限)에 가까운 힘을 쓸 수 있되, 이번에는 기적 따위 일어나지 않는다. 힘이 소모되는 시간도 훨씬 빠를 것이다.

현천진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적송과 함께 신(神)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한 위대한 무인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할 방법이었다.

서량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가는 거요?”

“그렇다네.”

현천진인이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무당의 선산(仙山)이 나를 부르고 있네. 오늘따라 칠성(七星)이 그곳을 향해 있었어.”

“…….”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그 하나의 생각은 크고 구체적인 형태가 되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었다네.”

“형태?”

“이제 오랜 세월 입어 온 이 육신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이지.”

육신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

서량의 얼굴에 격동이 일었다.

“신화(神化)…….”

“신화는 아닐세. 나는 그 깊고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지 못했어. 그럴 용기도 없었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네.”

“…….”

“다만, 그 심연이 시작되는 곳에 서 볼 수는 있었다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시오.”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네. 다 자네들이 나를 아끼고 보살펴 준 덕분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어찌 그곳에 발이라도 담가 봤겠는가.”

현천진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도 땡중이 한 말을 들었지? 도에서 멀어졌음을 자각했으니, 그 또한 깨달음이 아니냐고. 내가 언젠가 하늘에 이를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

“기억하오.”

“땡중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네. 나는 땡중과 달리 악(惡)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마(魔)를 향해 호통쳤네. 나의 깨달음에는 살업(殺業)이 함께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구려.”

“나는 득도(得道)에 미련이 없었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

“…….”

“한데 어인 일인가? 자네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중원을 가로지르던 와중, 이런 생각이 들지 뭔가?”

“무슨 생각이 들었소?”

“도(道)는 만물에 있고, 만물이 곧 도(道)이며, 그렇기에 도는 사람과 축생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길을 열어 두지 않았겠는가. 한데 나는 어찌 지난날을 후회하기만 하고,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빛을 외면하고 있었던가.”

현천진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네의 스승, 이천상의 손에 묻은 피는 헤아릴 수 없을 걸세. 하나 그는 하늘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했네. 나라고 다를 게 무언가?”

“…….”

“그것을 깨닫는 순간, 창밖에 칠성이 보였네. 바로 그때 나는 심연의 앞에 설 수 있었어.”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바라십니까.”

“바라는 것은 없다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보이는 것도 없다네.”

“무엇을 듣고 계십니까.”

“들으려 하니 멀어졌네.”

“어디로 향하십니까.”

현천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나를 태어나게 해 준, 현천이라는 도호를 안겨 준 선산(仙山)으로 갈 것이네.”

그는 하늘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만한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그가 나고 자란 산(山)과 하나가 될 수는 있었다. 그것이 그가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현천진인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승에서 더 얻을 깨달음이 많았지만, 더 이상의 깨달음을 원치 않았다.

이미 그 자신이 무당산(武當山)이므로.

“무당산으로 오게. 와서 자네의 운명을 시험하게.”

서량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천마신교의 삼십육대 교주 서량이오. 그간 함께한 시간, 영광이었소.”

현천진인의 포권은 부드러웠다.

“선산(仙山) 무당(武當)에서 나고 자란 산의 자식이 이 시대의 천마에게 감사를 표하네. 자네의 영혼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한 사람은 사라졌다.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현천진인의 말마따나, 오늘따라 칠성의 빛이 몹시 밝았다.

“편히 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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