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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508화 (507/774)

508화. 불공대천(不共戴天) (8)

쿠르르릉.

새벽이슬을 머금은 무당산.

그러나 왜일까? 하늘에서 은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남쪽에서부터 몰려오는 거대한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무당산을 뒤덮고 있었다.

날씨가 서늘해졌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어두운 먹구름이 동녘에서 타오르던 태양마저도 가려 버렸다.

하늘도 알고 있는 것일까? 천지를 가득 메워도 남을 한의 주인이 원수와 만났다는 걸.

“그저 놀라울 따름이오.”

번쩍!

소리 없는 번개가 찰나지간 세상을 비췄다.

담사영의 얼굴이 한순간 하얗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기실, 당신에 대한 소문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얕잡아 본 것도 사실이오. 이립이 안 된 연배에 신교의 주인이 된 것도 모자라 나나 철혈성주에 필적할 만한 무공을 쌓았다?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누구라도 믿기 힘들지.”

“…….”

“지금에야 확신하오. 오히려 소문이 축소되었음을. 천년마도가 낳은 역사상 최고의 괴물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오.”

네가 만들어 낸 괴물이다.

서량은 저도 모르게 그리 말할 뻔했다.

천하 정점에 오른 무력, 신교를 다스리며 한과 분노만이 가득했던 과거의 자신과 결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한이 사념 한 자락은 남기고 간 모양이었다. 머리와 가슴으로 풀었지만, 몸이 저절로 반응하려 하고 있었다.

서량은 웃음으로 그 사념을 털어 냈다.

“칭찬 고맙소.”

“칭찬 이전에 내가 진심으로 놀랐음을 아셔야 하오. 다소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 지금껏 살아오며 타인에게 순수하게 놀란 적이 딱 세 번 있었소.”

“…….”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아지자 더는 놀랄 일이 없어졌소이다. 한데 오늘 또 한 번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군. 바로 당신, 서 교주를 통해서 말이오.”

“그 세 번의 놀라움 중 하나는, 당연히 전대 교주님 덕분이겠군.”

휘이이잉!

바람이 강해졌다.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다. 하나 그것을 감안해도 너무 차고 강했다. 마치 파도와도 같았다.

미친 듯이 펄럭이는 옷자락. 하늘이 두 사람을 비웃고 있었다.

“그렇소. 구대천마 이천상. 중원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력에 그저 절대마신(絶對魔神)이라고만 불리는 고금제일인.”

“…….”

“그는 짧지 않은 내 생에 있어 최고의 놀라움이자 최악의 재앙이었소. 아마 내세가 있어 다시 태어난다 한들, 전생이 될 지금 생에 그를 봤던 놀라움보다 더 큰 놀라움은 없을 것이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 그의 미소는 어떠한 감정도 담아 내지 못할 것이다.

“대단하신 분이지.”

“실로 대단한 사람이오.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에 어색함을 느낄 만큼.”

담사영 역시 마주 미소를 지었다.

서량의 그것과는 달리, 그의 미소는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만큼 상대에게 놀란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 내 눈에는, 언젠가 그 절대마신의 경지에 오를 또 다른 괴물의 씨앗이 보이고 있소이다.”

“그렇소?”

“그렇소. 진심으로 그렇게 보이오. 그래서 말이오.”

번쩍!

또 한 번 소리 없는 번개가 쳤다.

두 사람의 하얀 얼굴이 무심하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고민하고 있소. 그대를 살려 보내도 될지.”

무담과 마동필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가 보고 싶다면 그래도 되겠지.”

“허허, 어차피 우리는 결국 부딪치게 되어 있소. 나는 패배를 상정하고 있지 않지만, 행여나 그리되면 온 천하를 불태우고 사라질 것이오. 보아하니 당신이라고 나보다 못할 것 같진 않은데, 어차피 세상은 지옥이 되지 않겠소?”

서량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사바세계는 이미 지옥이외다. 이보다 나빠지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지. 그래서 난 더한 지옥을 만들 생각은 없소이다.”

“뜻밖이구려. 이 말이 칭찬이 될지, 모욕이 될진 모르겠지만 나와 당신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소. 당신이라면 나 못지않은 악업을 쌓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올시다.”

칭찬? 모욕?

둘 다였다.

철천지원수에게 최고의 평가를 받는 기분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다만 기쁘기도 했고, 역겹기도 했다. 그래서 칭찬이었고, 그래서 모욕이었다.

서량의 미소가 점차 희미해졌다.

“우리 싸움이 거기까지 가겠소? 둘 중 하나가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때, 다른 한쪽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져 있을 것이외다.”

담사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그럴 수 있겠소. 보아하니 당신도 후환을 남겨 놓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적지에는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쓸어 버리는 걸 선호하오.”

“나 역시 그렇소.”

하늘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대지가 침음하고 있었다.

둘은 말 그대로 천하를 휩쓸어 버릴 힘을 지닌 절대자들이었다. 그런 둘이 마주하니 세상이 긴장하는 듯했다.

한참이나 서량을 바라보던 담사영이 입을 열었다.

“황제는 무사하오?”

“본교의 숙수들이 고생하고 있소. 밥을 그렇게 잘 먹더이다.”

“허허, 용신일원공 덕을 톡톡히 보는군.”

담사영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해서 내 누누이 말했거늘. 고독(蠱毒)을 쓰지 말고, 이참에 편히 보내 드리자고. 허허, 천륜(天倫)이 무엇이고 패륜(悖倫)이 무엇인가. 천하를 얻고 싶다면 혈육이라도 단호히 베어 낼 냉혹함이 필수이거늘.”

무서운 말이었다.

듣자 하니, 본래 주청을 중독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던 듯했다. 담사영은 아까운 혈고를 낭비할 바에야 주청을 죽이고 황태자를 황제로 추대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반대한 것은 주천양이리라.

“만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내 그걸 모르지는 않지만, 굳이 그랬어야 했나 싶소이다. 천하를 손에 넣은 뒤 대관을 치르든, 미리 치르고 천하를 손에 넣든 결과는 다르지 않은 것을.”

물끄러미 담사영을 보던 서량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의 말씀이 맞구려.”

“무슨 말이오?”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은 마도에 어울리는 인재라 하였소. 만일 당신이 마도를 택했다면, 나 못지않은 괴물이 되었을 거라 하셨지.”

담사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것 참 기분 좋은 말이외다. 내 그래도 절대마신에게 가능성을 인정받았으니, 인생을 아주 헛산 것은 아닌 듯싶소. 다만…….”

“…….”

“그 말은 곧, 지금의 내가 서 교주에 비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들리는구려.”

번쩍! 콰르르릉!

쿵!

기어이 내리친 벼락이 나무 한 그루를 박살 낸 모양이었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나무가 바위를 밀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섬뜩한 굉음이었다.

“대단하오. 절대마신은 그 무공만큼이나 후계자를 향한 자부심도 컸던 모양이외다.”

서량이 싱긋 웃었다.

“그러셨던 모양이오. 다만 세상의 섭리를 관통하신 분이라, 나 역시 그분의 말이라면 뭐든 믿고 따랐지.”

담사영 역시 서량과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감을 보일 만한 사람이오, 당신은.”

“칭찬 고맙소.”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소? 내 정말로 당신을 죽이지 못할 것 같았소?”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소. 나 역시 그렇소.”

“이유가 궁금하오. 그리 확신하는 이유가.”

“당연하지 않소? 내게는 황제가 있소이다. 그리고 황제와 거래까지 끝났소. 이곳에서 나를 죽이면, 당신은 분노한 본교의 힘을 감당해야 함은 물론 황제의 함성 속에서 평범한 악인(惡人)으로만 남게 될 것이오.”

“평범한 악인이라도 천하를 손에 넣는다면 상관없지 않겠소?”

“그런 악인으로 역사에 남고 싶을 리 없을 텐데?”

담사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투명한 눈으로 서량의 모든 것을 본다. 그 눈은 귀신처럼 무서웠다.

“당신 말이 맞소. 기실, 내가 의천맹주가 된 것은 무림사에 내 이름 석 자를 하얗게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오. 먹물 한 점 묻게 하고 싶지 않았더랬지.”

“알고 있소.”

“알고 있다? 놀랍군. 그 말은 마치 나를 충분히 분석한 걸로 들리오.”

“충분한 만큼은 분석했소이다. 당신, 그렇게 어려운 사람은 아니더군.”

“대단한 배포시오. 탄복했소이다.”

“칭찬도 자주 들으면 질리는 법이오.”

“허허! 허허허허!”

콰르릉!

하늘을 보며 앙천광소를 터트리는 담사영. 우연의 일치인지 바로 그때 천둥소리가 울렸다.

마치 담사영의 웃음소리가 천둥을 불러들인 듯했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한참이나 광소를 뿜은 담사영이 웃음을 멈추었다.

“하나 물읍시다.”

“그러시오.”

“옥새는 어디에 숨겼다더이까?”

서량이 눈을 치켜떴다.

“설마 내가 대답해 줄 거라 생각한 것이오?”

“그렇소.”

“왜 그리 생각하셨소?”

“당신은 죽이지 않을 것이오. 쉽지도 않을 것 같고, 당신 말마따나 내 이름에 먹물이 튀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다만…….”

담사영의 눈이 주변인들에게 돌아갔다.

“보아하니, 당신은 아랫사람을 무척 아끼는 것 같소. 부하지만 도통 부하처럼 느껴지지 않소. 전우(戰友)에 가깝군.”

서량은 상대의 안목에 놀라지 않았다.

담사영의 안목이 날카롭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옛날보다 더 강해졌고, 더 신중해졌으며, 더 악랄해졌다.

무엇을 해도 놀랍지 않다. 그렇기에 더욱 놀랍다.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느낀 감정이었다.

“아랫사람의 목숨을 제 목숨처럼 챙기는군.”

“…….”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하더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당신도 그런 부류이고.”

담사영의 눈에 사이한 살기가 어렸다.

“당신만 살려 두고 나머지를 모조리 찢어 죽이면 어떻소? 옥새의 위치를 알려 주겠소?”

물끄러미 담사영을 보던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난 이들의 목숨만 등에 지고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오. 한없이 슬퍼하겠지만, 옥새가 어디에 있는지는 말해 줄 수 없소이다.”

담사영의 눈이 번뜩였다.

서량은 옥새의 행방이라 말하지 않고 옥새가 어디에 있는지 라고 말했다. 그 말인즉, 아직 마교도 옥새를 손에 넣지 못했음을 뜻했다.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서늘한 그 미소로 득의양양함을 숨겼다.

“당신 말이 맞소. 애초에 옥새의 위치를 알려 줄 만큼 만만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소이다.”

“한데도 그리 도발했소이까?”

“허허, 못된 버릇이외다. 상대를 자극하여 그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는 것 말이오.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주시기를 바라오.”

서량이 씨익 웃었다.

“그런 부분에서는 묘하게 나와 다르구먼.”

“다르다? 어떻게?”

“나는 함부로 날 도발한 놈을 그냥 두지 않소이다. 상대가 누구라도 입을 찢어 놓고야 말지. 황제 주청 역시 날 떠보려다 목이 달아날 뻔했소이다.”

담사영의 얼굴에 미세한 긴장이 떠올랐다.

“내가 그걸 두고 봐 주는 경우는, 내가 그에게서 따로 얻을 게 있을 때뿐이외다.”

“허허.”

“자, 말해 보시오. 당신은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소?”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하듯, 당신 역시 나를 죽일 수 없다고 한 것 같은데?”

“맞는 말이오. 맞는 말인데, 내 성질머리가 오죽 지랄맞아서 말이외다. 일단 죽여 놓고 다음을 생각하는 선택지도 매혹적이지 않소이까?”

진심이다. 담사영은 서량의 그 말에서 진심을 읽었다.

담사영이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는 언사로 분위기를 어지럽혔소이다. 사과하겠소.”

서량이 흡족한 듯 웃었다.

“그 사과, 순순히 받아 드리겠소.”

“허허허.”

“인사는 이쯤으로 충분한 것 같소.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럽시다. 어떤 본론부터 꺼내 들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오.”

하늘도 먹구름은 불렀지만, 감히 비마저 쏟아 내게 하진 못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마주 웃었다.

영원토록 그 자리에서 죽일 듯이 서로를 노려볼 것 같은, 현실과 지독하게 유리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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