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화. 적(敵)이라는 한 글자 (3)
퍼어엉!
거대한 불덩이가 박살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흩어진 불꽃이라도 잔열이 엄청났다. 나무에 닿으면 순식간에 나무를 시커멓게 태웠고, 돌담에 붙으면 꺼지지도 않은 채 담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했다.
굉장한 열기였다. 이 정도면 이미 열양공(熱陽功)이라 부를 만한 수준을 뛰어넘었다.
극한의 화력, 그러한 화기를 육신에 담아 휘두르는 화왕의 힘은 재앙 그 자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보는 지왕은 알 수 있었다.
‘안 좋아.’
화르르르륵!
무섭게 작렬하는 불꽃이 부드러운 인력(引力)을 따라 허공을 휘돌고 있었다.
불꽃을 뿜어내는 자는 화왕이었지만, 그 불꽃을 유린하는 자는 고루마존이었다.
화왕의 화력이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면, 고루마존의 마공 역시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마력은 둘째 치고서라도, 화왕의 저 강한 힘을 자유자재로 흩어 내고 있었다.
지왕의 눈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기량의 차이가 커.’
딱 봐도 알겠다. 고루마존은 극마에 들어서도 꾸준한 수련으로 마공과 영혼을 갈고 닦은 진짜 무인이었다.
반면 화왕은 달랐다. 그가 구사하는 칠요집전의 염화술(炎火術)은 능히 극마의 고수를 죽일 만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다루는 화왕의 깨달음은 아직 화경의 초입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 아무리 화력을 쏟아부어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힘은 압도적이지만, 그것을 상대에게 맞추지를 못한다.
신병이기를 쥐고 휘두르는 일류와 부러진 철검을 쥐고 휘두르는 절정고수 간의 승부였다.
쉬이이익! 퍼엉!
“이익!”
화왕의 몸이 주춤거렸다.
온갖 화공(火攻)을 흩어 내더니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일수(一手)를 내쳤다. 그리 빠르지도, 위력적이지도 않은 수공(手功)이지만 명확히 드러난 빈틈을 후려치니 작은 힘으로도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
화르르륵!
고루마존의 눈이 빛났다.
‘제대로 안 들어갔군.’
두 사람의 무공 격차는 상당했다.
그러나 상대를 단숨에 몰아치기에는 고루마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본래 실력의 절반이라도 낼 수 있으면 다행일까.
반면 화왕의 술수는 중원 무공의 상리를 벗어나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이 화염 그 자체가 된 듯, 공격이 성공해도 훅 하고 밀려나기만 할 뿐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고루마존의 몸에서 흑갈색 마기가 타올랐다.
일순간 강력해진 기세, 화왕의 눈이 흔들렸다.
파아아악!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특유의 번개 같은 신법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쉬이 물러날 수가 없었다.
콰드드드득!
화왕의 두 발이 대지에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엄청난 인력(引力)이었다.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을 끌어당기는데, 그 압력이 만근의 힘을 발했다.
“이놈!”
퍼어어엉!
화왕이 발출한 열화삼첩장(熱火三疊掌)이 고루마존에게 쏟아졌다.
결목신수의 고목인(枯木引)으로 상대를 끌어내는 와중이었다. 열화삼첩장의 공격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퍼퍼펑!
세 번의 타격이 한 번의 타격처럼 보이고, 들린다. 고루마존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그때였다.
콰앙!
“크윽!”
화왕의 몸이 대지를 구르며 무지막지한 속도로 밀려 나갔다.
한순간에 고목인에서 생목일척(生木一斥)으로 바꾸어, 힘의 흐름을 상단에서 하단으로 비틀었다.
중력을 열 배, 스무 배로 불려 짓누른 것이나 진배없다. 인력과 척력을 상하좌우 자유자재로 다루는 무리(武理), 상대의 몸을 부수기 전에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마공이었다.
타아아앙!
생목일척으로 화왕의 움직임을 봉쇄, 비천행공(飛天行功)으로 접근했다.
굳이 상대보다 빠를 필요가 없다. 더 강한 힘과 기운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필살의 일격을 날리면 그뿐이다.
백전노장의 싸움 방식이었다. 근거리 박투술은 물론 기공전(氣功戰)의 역량도 뛰어났다.
화왕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으아아아!”
번쩍!
고루마존의 눈이 빛났다.
‘화륜(火輪)?!’
상대의 두 발, 복숭아뼈 근처에 불꽃의 수레바퀴가 생겨났다.
동시에 상대의 힘이 강해졌다. 생목일척에 모든 마력을 집중했음에도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화력만큼이나 인상적인 출력이었다.
‘안 되지.’
이놈은 아직 보여 주지 않은 술수가 무궁무진하다. 애초에 저 이름 모를 염화술은 무공의 틀로 봐선 안 되는 공부였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분명 후환이 되리라.
고루마존의 발이 화왕의 복부를 향해 휘둘러졌다. 단숨에 결판을 낼 요량이었다.
콰앙!
고루마존의 발에 찍힌 땅이 무차별로 터져 나갔다. 누구라도, 설령 서량이라도 막지 못하고 직격을 당했다면 치명상을 면치 못했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어디?!’
당황한 고루마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억! 허억!”
어느새 저 멀리 떨어진 화왕이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피한 거지?’
생목일척으로 끝까지 붙잡아 두고 있었다. 아무리 술법 출력이 강해도 벗어날 수 없다고 확신했다.
‘……?!’
의아함으로 가득했던 고루마존의 얼굴이 순간 싹 굳어졌다.
‘이건!’
그때, 지왕이 화왕 옆에 섰다.
“과연 구대마존. 그리 지친 상태에서도 화왕을 몰아붙일 수 있다니, 마교 최강의 전력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무슨 짓을 한 거냐?”
지왕이 씩 웃으며 중지와 엄지를 세워 들어 보였다.
“궁금한가?”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
순간 고루마존은 볼 수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지왕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실타래 같은 무형의 기가 펼쳐진 비단 폭처럼 넓게 퍼져 인근 땅으로 스며드는 것을.
딱! 콰드드득!
동시에 화왕과 지왕이 쑥 멀어졌다. 거의 십 장 거리였다.
‘어떻게?’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고루마존은, 자신의 뒤쪽 땅이 제멋대로 깨부숴진 것을 보았다.
‘이럴 수가!’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저 둘이 멀어진 게 아니었다. 고루마존, 그 자신이 멀어진 것이었다.
‘땅을 움직여?!’
고루마존이 선 땅을 접어서 밀어 버렸다.
세상천지에 신묘한 무공과 기괴한 술법이 많다지만 이런 공부는 또 없을 것이다. 땅과 땅을 종이 끝을 잡고 모으는 것처럼 접어 밀어 버리다니?
인간의 공부가 아니었다. 이런 것은 위대한 십대천마께서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천룡의 토주, 토정의 대사제다. 내가 선 곳의 모든 땅을 내 의지대로 다스릴 수 있는 자이며,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선 자라면 그 누구도 나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지왕이 재차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이든 의미 없지. 내가 움직이는 건 땅 그 자체니까.”
화왕이 버럭 외쳤다.
“왜 끼어든 거냐!”
지왕이 한숨을 쉬었다.
“너, 내가 안 도와줬으면 저 삐쩍 마른 노괴 놈한테 죽었어. 고맙다고 인사를 해도 모자랄망정.”
“웃기는 소리!”
차아아앙!
화왕이 등 뒤에서 한 자루 금빛 창을 꺼내 들었다.
“이제부터 전력을 내려고 했어. 내 전력이면 저따위 다 늙어 빠진 마귀 나부랭이는……!”
“너는 다 좋은데 스스로를 너무 높게 보는 경향이 있어. 그리고, 실전에서 어떤 미친놈이 상대가 전력을 끌어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냐? 네가 화첨창을 꺼내기도 전에 압도한 거, 그것만 봐도 넌 저 마인의 상대가 안 돼.”
화왕이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한마디였다. 지왕 말마따나 실전에서 변명은 필요치 않다. 심리전이든 뭐든, 그는 이미 고루마존에게 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지왕이 고루마존을 노려보았다.
고루마존 역시 차가운 눈으로 지왕을 보고 있었다.
“사실 말이야, 처음엔 그냥 화왕에게 맡기려고 했지. 한데 그러기에는 당신, 너무 위험하군. 몸이 정상이었다면 나라도 승부를 논하기 힘들었겠어.”
고루마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확실히 저 모닥불보다는 강한 것 같구먼.”
화왕의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부으려던 그는 지왕의 손짓에 주춤했다.
“그럴 수밖에. 칠요의 모든 힘을 손에 넣은 용신(龍神)을 포함, 본궁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은 셋을 넘지 않아.”
쿠구구궁.
지왕의 손끝에서 신비로운 기운이 올올이 퍼져 나왔다.
그 기운은 이내 대지로 스며들며 은은한 떨림을 만들어 냈다. 마치 전진(前震)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칠요의 대사제 중 화경에 오른 자는 둘뿐이지. 그리고 그 둘 중 하나가 바로 나다.”
지왕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혈신기는 화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위력을 발휘하는 법. 화왕의 반쪽짜리 혈화신기(血火神氣)를 압도하는 완전한 혈지신기(血地神氣)를 보여 주마.”
그때였다.
‘살기!’
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고루마존이 서 있던 땅의 반경 오 장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대규모 지진술(地震術)이었다. 살기를 읽고 재빨리 벗어나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땅에 파묻힐 뻔했다.
훅!
‘……?!’
고루마존의 눈이 흔들렸다.
지왕이 어느새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화왕처럼 빠른 신법을 펼친 것도 아니요, 그저 한 발자국 내디뎠을 뿐인데 코앞이다.
‘축지성촌(縮地成寸)!!’
경신술의 최고 경지 중 하나를 축지성촌이라 한다. 전설상의 축지를 구사하는 것처럼 신묘하고 빠른 보행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왕이 펼친 것은 호사가들이 말하는 축지성촌 수준이 아니었다.
진짜 축지법(縮地法)이다. 땅을 접고 수축시키는 술수, 내 힘이 아닌 대지의 힘을 빌려 이동하는 극상승의 술법이었다.
콰앙!
게다가 지왕의 힘은 혈지신기뿐이 아니었다.
강하게 진각을 밟는데,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힘이 충격적일 만큼 대단했다. 거의 구대마존 수준의 거력이 오른 주먹에 담겼다. 지왕, 땅의 대왕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힘이었다.
지왕이 힘차게 주먹을 뻗었다.
고루마존이 다급하게 쌍장을 휘둘렀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날아간 고루마존이 왈칵 피를 토했다.
‘엄청난 위력!’
땅은 곧 힘이다.
말하자면 지왕은 힘 그 자체를 다루는 자였다. 고루마존보다 깨달음은 낮을지언정 다루는 힘의 농도는 능히 비견할 만하며, 힘의 크기는 오히려 고루마존조차 압도한다.
‘이것이 천룡칠주, 천룡궁 최강의 전력이란 말인가.’
번쩍!
어느새 지왕이 그의 측면에서 나타났다.
땅을 자유자재로 접어 버린다. 사각을 파고드는 축지법에, 또다시 진각을 이용한 거력의 권법을 구사했다.
지왕의 성명절기, 대지충산권(大地衝散拳)이었다.
콰아앙!
이번에는 크다.
고루마존의 몸이 연신 뒤로 물러났다. 충격을 흩어 내려 해도 디딘 땅이 물렁물렁해서 제대로 힘을 받을 수가 없었다. 과도한 내공 소모로 인한 내상이 더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땅에서는 승부가 안 돼!’
콰앙!
고루마존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때, 빛살처럼 빠른 불덩이가 고루마존을 향해 쏘아졌다. 기다렸다는 듯 내친 공격이었다.
우우우우웅!
고목인의 수법으로 불길을 휘게 했지만 반 박자가 느렸다. 미처 꺾이지 않은 불길이 훑고 지나간 좌측 어깨에 뜨거운 통증이 일었다. 화상을 입은 것이다.
쿠우우우웅!
고루마존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지왕이 이 장 거리 앞에 도달해 있었다. 한데 허공에 떠올랐던 그의 두 발이 땅에 닿아 있었다.
대지를 끌어 올린 것이다.
“잘 가시게, 늙은 마귀.”
대지충산권이 고루마존의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콰앙!
그의 몸이 관도 옆 주루의 지붕을 뚫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