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적(敵)이라는 한 글자 (5)
지금까지 살아오며 절망했던 순간도, 슬퍼했던 순간도, 기쁨에 젖어 함성을 질렀던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을 함께했던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전생한 이후에 만난 인연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마인들을 가족처럼 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마도의 신이 될 수 있었다. 마도의 신이 되고도 그 높은 자리를 부담스러워했을 뿐, 마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런 그는 볼 수 있었다. 보고 있었다.
신(神)을 위해서는 목숨조차 불태우는 충성심 깊은 노신(老臣)의 진심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달려왔는지.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오로지 교주의 안위를 확인하겠다는 그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달려왔다. 달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달려왔다.
실제로 고루마존은 죽어 가고 있었다. 육신은 진즉에 한계에 도달했고, 한 줌도 안 남은 마기는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내상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고루.’
고루마존은 서량에게 있어 처음으로 자신의 진가를 알아준 마존이었다.
나아가 소교 시절 중원에 나왔을 때도 목숨을 다해 달려와 주었으며, 오롯이 자신을 위해 분노해 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또다시 자신을 위해 달려와 주었다.
그리고 죽어 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험한 몰골을 한 채로.
“이…… 멍청한!”
서량의 마안이 휘황찬란한 흑청의 마기를 흩뿌렸다.
파지지지직!
중단에서부터 뿜어진 군림마황기가 전신을 누볐다.
서서히 손을 들어 노신의 육신을 가리키니, 파괴력으론 천하 정점에 올랐다던 염마제석(閻魔帝釋)의 뇌정마기(雷霆魔氣)가 올올이 풀려 나와 고루마존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파지지직! 파지지지직!
고루마존의 몸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뇌정마기는 고루마존의 몸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을 살리고 있었다.
모든 마의 정점, 천하제일마공 군림마황기는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온갖 기물을 파괴하는 죽음의 무공인바.
그러나 욕계문을 열고 정점의 마력을 손에 넣은 자라면, 그보다 하위의 마(魔)를 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바로 저 이천상처럼.
그저 지나치는 것만으로 타인의 온갖 내외상을 한순간에 치료해 버린 무적의 마신처럼.
이제는 서량도 가능했다. 그의 스승처럼 신과 같은 공능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마인의 생명력을 키우고 내상을 치유하며 텅 빈 단전의 마기를 무섭게 불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푸스스스스!
고루마존의 몸을 지배했던 뇌정마기가 어느새 사라지자, 그의 몸에서 흑갈색 마기가 치솟았다.
이전보다 한층 더 선명하고 짙어진 기운이었다. 전투 중에 얻은 깨달음과 서량의 마기가, 그의 마력을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서량이 아니었다면 그와 같은 내공의 질적 향상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오로지 교주의 안전을 위해 목숨조차 바친 충심과 생사의 결전에서 얻은 깨달음이 없었다면 이러한 바탕조차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의 늪에서 깨어나는 또 하나의 마왕이 여기에 있다.
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니, 신은 신도를 향해 호통친다.
다시는 그리 무모한 짓을 벌이지 말라고, 앞으로 또 한 번 이런 짓을 벌인다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라 호통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은, 한없이 무섭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공포의 마력으로 세상을 집어삼킨 신은 자신을 따르는 신도를 향한 애정의 따스함도 갖추고 있었다.
설령 이와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더라도, 그래서 이 늙은 충신이 또 한 번 목숨을 걸지라도.
절대 죽게 만들지 않겠다. 절대로 이런 험한 모습을 보여,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지어다.
그 형용할 수 없는 애정과 걱정 어린 마음이 고루마존의 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고루마존의 시야가 점차 또렷해졌다.
정신을 차린 그가 자신의 신을 올려다보았다.
“교주님……?”
“내,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한다.”
서량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다시 한번 이리 무모한 짓을 벌였다간 절대 용서치 않겠다.”
고루마존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용서치 않으셔도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고루마존이 그대로 절을 올렸다.
털썩!
절을 올리자마자 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겨우 생명의 끈을 이었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태였던 것이다.
서량이 외쳤다.
“대호법!”
“하명하시옵소서!”
“저 고집불통 늙은이를 마차에 처넣어!”
무담이 서둘러 고루마존에게 향했다. 동시에 마동필의 눈이 좌우로 향했다. 단숨에 호위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조심스레 고루마존을 들어 올린 무담의 눈이 깊어졌다.
‘참으로 고생하셨소.’
그가 어떤 심정으로 달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무담은 그런 고루마존의 충심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안전하게 모실 것이오. 걱정하지 마시구려.’
마차를 열자 주서윤이 냉큼 일어나 고루마존을 침상에 눕혔다.
마차 문이 다시 닫히고 나서야 서량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담사영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알겠소.”
서량이 서늘한 눈으로 담사영을 보았다.
담사영의 눈빛 역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천마신교가 왜 천마신교라 불리는지 알 것 같소이다. 천마라……. 천마의 힘은 모든 마인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구려.”
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사영을 보는 그의 두 눈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방금까지는 보여 주지 않았던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담사영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도 거리끼지 않는 자유. 마인들이 천마라 부르는 자의 힘은 그리도 자유로운 것이었소이다.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힘이기에, 오로지 하나의 힘으로 충분하지. 나처럼 여러 가지를 배울 필요가 없었어.”
왜일까?
담사영의 말투가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일세.”
치이이이익!
그의 몸에서도 무섭도록 강렬한 힘이 번져 나왔다.
서량의 군림마황기가 점점 어두워져 어느새 흑청의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면, 담사영의 기운은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순청(純靑)의 색깔이었다.
너무나도 파래서 도리어 섬뜩함이 느껴진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그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우주(宇宙)의 어둠을 느낄 수 있듯, 담사영의 기운 역시 묘한 섬뜩함을 품고 있었다.
이마저도 닮았다.
두 사람이 발산하는 기의 색은 그렇게 닮았고, 닮은 만큼이나 달랐다.
“자네는 좀 심했네.”
“…….”
“이 나를 만나러 왔으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어야지. 감히 내 앞에서 나의 수하를 죽이다니, 그러고도 이 만남이 평화롭게 마무리될 거라 생각했나?”
담사영은 서량과 달랐다.
서량은 수하의 죽음 그 자체에 슬퍼하는 사람이었다. 자존심이나 명예 따위는 차후의 문제다. 나를 믿고 따르는 자가 나를 위해 죽었으니, 분노보다 슬픔을 느끼고 슬픔에 앞서 좌절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 담사영에게 수하의 죽음이란 곧 자존심의 문제였다.
날카로운 안목으로 직접 골라 기른 수하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수하들이 적의 손에 죽어 나가고 있었으니, 그것은 곧 자신의 안목이 그만큼 형편없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분노하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수하를 죽였기 때문에.
그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이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얼마나 가벼이 봤으면 빤히 보고 있는 가운데 내 사람을 죽였겠는가. 그것은 담사영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치욕이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서량의 대답은 압권이었다.
“고루마존이 죽었더라면, 오늘 무당산에 두 발 딛고 선 놈들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였을 것이다.”
담사영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자리 잡았다.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널 죽이고, 네가 부리고 있는 모든 수하를 날려 버린 뒤 곧장 황궁으로 향했을 것이다. 천하가 불타 신음하더라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서량의 표정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놈에게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마디 하지. 앞으로 수하 관리를 똑바로 하도록 하라. 네놈의 땅에서, 네놈의 수하가 내 사람을 건드렸다.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바로 그것이다.
이 자리는 천하의 판도를 조정하는 자리지만, 동시에 천하를 끝장내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자리라면, 내가 조심하는 것처럼 상대도 조심해야 했다. 서량이 보는 고루마존은 교주를 위해 불덩이에도 뛰어들 사람이지만, 사태의 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필시 먼저 건드린 자는 상대 쪽일 것이다. 서량은 그것을 확신했다. 아예 다른 여지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담사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존씩이나 되는 자가 그렇게 멍청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신처럼 떠받드는 교주가 있는 땅에서 난동을 부려 봤자 위험해지는 건 신이다. 당연히 고루마존이 먼저 나섰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더는 이유 따위 필요치 않겠지.”
담사영이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화왕과 지왕을 잃었다. 마교로 치자면 마존 둘을 잃은 것이나 진배없는바. 그 두 명의 목숨에 책임을 지도록.”
“상처가 많다.”
“뭐?”
“고루마존의 몸에는 상처가 많아.”
파지지지직!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군림마황기.
더하여.
화아아아악!
그 뒤로 핏빛 화염까지 치솟았다.
순간 담사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상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가 달라졌다.
대하는 것만으로 등골이 서늘한 군림마황기에 이어, 몸의 첨단부터 타들어 갈 듯한 끔찍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화왕의 화기보다도 더 지독한 겁화의 기운이었다.
번쩍! 번쩍!
천마의 두 눈이 청홍(靑紅)의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좌청우홍(左靑右紅)의 절대마안이었다. 한데 섞일 수 없는 극강의 마공 두 개가 동시에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놈…… 저런 힘을 또 하나 숨기고 있었다고?’
그때였다.
담사영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 상처 하나에 목숨 하나를 취해도 부족할 판이다. 이 내가 어느 때보다도 많이 참고 있음을 알아라. 마음 같아선 네놈부터 당장…….”
“너, 뭐냐?”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담사영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딘가 얼이 빠진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두 눈에 살기가 가득하니, 그 역시 냉정하다고 평가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네놈…… 대체 정체가 무어냐?”
“말장난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냐?”
“어떻게 그 무공을 익히고 있지?”
“뭐?”
아마도 담사영이란 인간의 역사에 또 하나의 놀라운 순간이라 새겨 넣어야 할 것이다.
“구파비기! 오직 단 한 명을 위해서 만들어진 궁극의 무공을 네놈이 어찌 익히고 있냔 말이다!”
“……!!”
서량의 안색이 변했다.
담사영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암영기(暗影氣)! 네놈은 암영기를 어디서 얻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