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적(敵)이라는 한 글자 (6)
암영기.
정식 명칭은 천살암영진결(天殺暗影眞訣)로, 섬뜩한 이름과는 달리 정파 무림의 아홉 기둥, 구대문파의 비전심법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절정의 무공이었다.
암영기는 구파의 무공을 기반으로 한 신공답지 않게 조용하고 음습했다. 빠르고 유연했다. 소림의 강력한 항마불기를 토대로 했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 공능은 없었다.
암영기에 구파의 색과 도불성(道佛性)이 빠진 이유는 간단했다. 정파 무림을 위협하는 적을 처리하기 위한 특공부대(特功部隊)의 양성을 목적으로 만든 무공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무공을, 담사영은 자신의 수하 중 가장 감각적인 수하 한 명에게 전수했다.
그리고 그 무공을 익힌 수하는 살수지왕(殺手之王), 통칭 살왕이라 불리며 전 무림의 공포로 군림했다.
담사영은 암영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암영기는 뛰어난 절학이면서도 아무나 익히지 못하는 무공이었다.
대저 사람들이 신공이라 부르며 감탄하는 공부들은 하나같이 난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암영기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암영기는 재능이 없으면 입문조차 못 하는 건 기본이요, 체질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단전을 축소하거나 기경팔맥을 파괴하는 등, 지독한 이상 현상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체질이 적합한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천하진!’
살왕 천하진.
담사영이 기억하는 천하진은 그야말로 흔치 않은 인재였다. 그놈의 반골 기질만 아니었다면 제자로 삼을까 고민했을 정도의 인재였다.
하지만 놈의 성품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중하(中下)였다. 그릇이 커서가 아니라, 애초에 누군가의 밑에 있을 놈이 아니었다. 성격 자체가 독불장군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런 놈이 암영기를 익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최강의 암검이 되었다.
이후 재능이 있는 수하들을 선별해 암영기를 익히게 했지만,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폐인이 되어 버리고야 말았다. 애써 고른 철검을 녹여 명검으로 만들까 했더니, 하나같이 녹슨 고물 덩어리가 되어 버린 격이었다.
무공에 입문하지 않은 어린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태반이 죽었고, 살아남은 몇몇 아이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 담사영은 믿을 만한 사람들과 함께 암영기를 분해해 파헤쳤지만, 도통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암영기를 버렸다. 심지어 소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쪽으로 필사본을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도 암영기가 아쉬웠다. 암영기 하나를 만들기 위해 구파의 무공들을 훔치거나 몰래 빼 오는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암영기, 천살암영진결이었다.
담사영에게는 집착과 아쉬움, 크나큰 도움을 줌과 동시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유일무이한 무공이었다.
한데 그 무공을 익힌 놈이 눈앞에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무공을 기반으로 한 마공을 익힌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쿠구구구궁!
담사영의 몸에서 뻗어 나간 청색 기운이 사위를 짓눌렀다.
엄청난 기파였다. 천하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독특한 기운, 그러면서도 기질의 농도는 천하제일을 달린다.
이것이 바로 담사영의 힘이었다. 의천무제라 불리며 천하제일을 논하는 절대고수의 힘이었다.
‘…….’
그런 담사영을 보는 서량의 두 눈은 여전히 좌청우홍의 마안을 유지했으되,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에 젖어 들어 있었다.
그 감정의 정체는 욕망이었다.
지금껏 잘 참아 왔던 욕망이, 쌓이고 쌓인 한이 저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튀어 올라 단숨에 입 밖으로 뛰쳐나올 듯 요동치며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다.
‘내가 천하진이다!’
‘내가 바로 살왕이다!’
‘네놈의 밑에서 개처럼 굴렀던 천하제일살수가 바로 나다!’
‘이제 와 비로소 네 앞에 섰다! 너라는 존재를 지워 내기 위해 죽음을 뚫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서량은 외치고 싶었다. 그 지독한 열망과, 그 열망이 자아내는 분노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하늘이 비로소 우리 둘을 만나게 했으니, 지금이야말로 한의 고리를 끊어 낼 때라고 애써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
서량이 눈을 감았다.
푸스스스. 파지직!
구유마공이 사그라들고, 군림마황기의 압도적인 패기가 흘러나와 담사영의 기파를 밀어젖혔다.
번쩍!
재차 눈을 뜬 서량의 동공에서 벼락 세례가 뻗어 나왔다.
“개소리는 거기까지 듣겠다.”
“……!”
“마음 같아선 네놈을…… 정말이지 네놈을 이 자리에서 찢어 죽이고 싶다만, 내 오늘을 참겠다.”
누구도 상상 못 할 감정을 한껏 담은 대사다.
담사영은 그 목소리에서 깊고 깊은 인내력을 느꼈다.
서량이 차갑게 말했다.
“이 병신 같은 대화를 더 이상 지속할 필요는 없겠군. 그렇지?”
“…….”
“네놈을 만났고, 네놈이 어떤 놈인지를 확인했다. 애초에 더는 얻어 낼 것도 없고, 있어 봤자 살심만 커질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지.”
“…….”
“기대해라. 너희가 감당해야 할 재앙을. 그리고 기억해라. 오늘 내가 보여 준 인내심을.”
서량이 몸을 돌렸다.
“가자.”
그때였다.
담사영조차도 왜 제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몰랐다. 그저 ‘그’를 확인하기 위해 이 말을 던져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뿐이었다.
상대가 저승에서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얼굴이 다르고 체격이 다른데도 왜 ‘그’임을 확신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암영기는 그렇게 녹아들었군. 하면 인화도(靭禍刀)와 제천기(提天技)도 그럴까?”
“……!!”
담사영은 볼 수 있었다. 서량의 몸이 움찔한 것을.
그가 분명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껏 차가운 이성으로 스스로를 제어했던 그에게서 처음 보는 본능적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지독한 분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담사영은 멍하니 서량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마교 소교주의 살법(殺法)은 의심할 나위 없는 천하제일이라, 특유의 감각적인 살법으로 구현해 내는 도법(刀法)은 살법의 극치이자 기공의 총화인바. 마치 천라지망을 돌파하던 그놈의 무공과 몹시 닮았습니다.”
“……!!”
“과거, 보고서에는 그리 올라와 있었지.”
서량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담사영의 표정이 점점 바뀌어 갔다.
두 눈은 놀라움을 담아 커졌고, 입은 쩍 하니 벌어졌다.
두근두근!
심장에서 뿜어내는 혈류량이 한순간에 몇 배로 불어난 것 같았다. 신체 말단부는 차가워졌지만 목덜미는 화끈화끈했다.
“너……?!”
천룡궁의 공부를 익힐 때 담사영은 생각했다.
자신의 젊음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까?
실제로 젊음을 유지하는 술법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작용이 극심했고, 성공 확률도 낮았다.
그럴 바에야 최고의 경지를 구축하여 신체의 나이를 젊게 유지하는 것이 나았다. 그래서 그는 술법을 익히면서도 무공의 극의를 이루었다.
처음 화경을 깨달았을 때, 담사영은 또 한 가지를 생각했다.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술법은 없는 것일까. 그러한 비술은 정녕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혹시라도 천하를 제패하는 와중, 실수로라도 죽으면 다시 깨어날 방도는 없을까.
영원(永遠)이란 정녕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그래, 그런 방법은 없었다.’
그것은 역천이다. 저 마교의 마공보다도 더한 역천이었다.
하지만 담사영은 바랐고, 또한 믿었다. 그러한 방법이 분명 있을 거라고. 내가 모르는 오묘한 이치가, 세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자신이 모르고 있던 역천의 총화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그러한 방법을 추구했기에, 자신의 암검이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한 점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다.
‘아!’
동시에 담사영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껏 이천상이 아닌,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어떻게 중원에 나와 그리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자신의 의도를 귀신처럼 파악했는지, 어떻게 그처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도대체 저놈은 어찌 그 어린 나이에 완성형(完成形)의 패왕으로 만천하에 위엄 넘치는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었는지.
하나의 조각을 들자, 그 조각에 딸린 무수히 많은 실이 또 다른 조각들을 끌어왔다.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의 진실을 완성한 순간.
담사영의 입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폭포수가 터져 나왔다.
“천하진!!”
천하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무당산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파지지지직!
그 순간 서량의 몸에서 뻗어 나온 군림마황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정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비록 잠깐일지언정 놀랍도록 평온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장마가 든 것처럼 먹구름이 그득했다.
‘그래, 참을 만큼 참았지.’
여기서. 놈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은 복수에 미친 살왕 천하진이 아니라 천마신교의 삼십육대 교주, 십대천마 서량이었다. 양어깨에 짊어진 무수한 목숨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껏 참을 수 있었다.
또한, 그래서 딱 거기까지만 참기로 했다.
“……왠지 모르게 아쉬웠더랬지.”
의미를 알기 힘든 말이었다.
아쉽다니? 무엇이 아쉽단 말인가?
“천마신교의 주인으로서, 만마의 대종주로서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장애물을 보며, 그의 그릇을 확인함과 동시에 정보도 탈취할 수 있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지.”
우우우우웅.
호왕의 옆구리에 걸려 있던 천마도가 두둥실 떠오르더니 서량의 앞에 멈추었다.
서량은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보는, 신을 주시하는 신도들은 웃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 허울에 불과했던 모양이야. 내 더는 한과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을 강인함을 얻었으나 짙고 짙은 아쉬움 한 자락을 떨쳐 내지 못했으니, 과연 스승님의 말씀대로 아직 멀었어.”
서량이 천마도의 도병을 쥐었다.
위이이잉!!
천마도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도명(刀鳴)을 터트렸다. 그 도명은 천하진이라는 메아리를 덮고 천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비천(飛天)의 도명에, 마지막 아쉬움과 미련을 훨훨 떨쳐 낼 수 있었다.
그 미련을 떨쳐 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은, 영험한 무당산의 선기(仙氣)가 아닐는지.
‘노선배.’
문득 현천진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 무당산으로 오게. 와서 자네의 운명을 시험하게.
과연 나의 운명은 무엇인가.
나는 이 자리에 와서, 그에게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인가.
서량이 눈을 감았다.
“소개를 다시 하지.”
비천의 도명을 욕계(欲界)의 절규로 덮었다.
“나는 천마신교의 삼십육대 교주이자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이천상의 제자이며, 당대의 천마(天魔)로서 하늘에 올라 만천하를 손에 넣으려는 야심가다.”
파지지지직!
서량이 몸을 돌렸다.
그의 몸 전체에서 뿜어지는 뇌기가 바스러진 살얼음처럼 잔영을 남겼다.
후욱.
천마도의 거대한 칼날이 담사영을 겨누었다.
경악한 담사영의 얼굴 위로 무서운 긴장이 드리워졌다.
“네놈! 어떻게 살아……?!”
“그냥 가기는 나도, 너도 너무 아쉽겠지?”
서량이 멋들어진 웃음을 지었다.
“개전(開戰)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다. 어디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해 볼까?”
콰아앙!
서량이 담사영에게 달려들었다.
지금까지처럼, 그는 오직 서량으로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