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적(敵)이라는 한 글자 (8)
푸스스스.
담사영의 몸이 마치 강시처럼 일어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원혼이 등 뒤에서 그를 일으켜 세워 주는 듯했다. 섬뜩한 움직임이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어떠신가.”
“…….”
“한 방 맞고 나니, 정신이 좀 돌아오나?”
주르륵.
담사영의 오른쪽 눈에서 흐르던 피가 멎었다. 한껏 일그러졌던 그의 표정도 냉정함을 되찾았다.
냉정한 표정으로, 냉엄한 눈빛으로 서량을 노려본다. 그 모습이 귀신처럼 무서웠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 개전의 북소리로 네놈의 성장을 보겠다고.”
“……성장?”
“그래, 성장.”
후웅.
천마도의 도첨이 담사영에게 겨누어졌다.
자흑색 거대한 칼날에서 무시무시한 박력이 풍겼다. 자세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도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매서운 중압감이 생겼다.
“걱정하지 마라. 이 자리에서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으드득.
“다만, 그렇게 당해 주기만 한다면 내가 좀 서글플 거야. 그러니 제대로 해 봐.”
담사영의 얼굴이 재차 일그러졌다.
턱이 파르르 떨린다. 그의 눈에 서량은, 더 이상 서량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보다 체구가 더 작은, 얼굴 곳곳에 잔주름이 있는, 그러면서도 두 눈은 젊은이의 그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는 살수지왕의 모습으로 보였다.
천하진이다.
담사영은 상대를 천하진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았다.
“……제멋대로 도망친 개놈.”
“얼쑤.”
“주인을 배반하고도 감히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고, 도리어 칼을 겨누는 그 행태.”
후우우웅.
자연스레 늘어트린 담사영의 손에 칼날과도 같은 진기가 어렸다.
청천허상검(晴天虛像劍)이라는 수공(手功)이었다.
“용서를 바라지 말아라.”
장난기가 묻어 나오던 서량의 표정도 서서히 무심하게 변했다.
“이봐, 담사영.”
담사영.
이름 석 자를 당당하게 부른다. 예전에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발발 기었던, 한낱 노예에 불과한 놈이었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 사실을 지금 전해 주지 않으면 스무 합도 못 버티고 죽을 것 같으니, 내 큰마음 먹고 말해 주마.”
“…….”
“나는 네게 분노 이외의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얼마 전까지, 거의 평생을 그랬지.”
“……?!”
“날 노예라고 생각했나? 뭐, 생각은 자유지. 한데 그건 알고 있나? 나는 너의 암살을 수도 없이 성공할 뻔했다는 걸.”
담사영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네놈이 무서워 다 성공한 암살을 몇 번이고 포기한 줄 아느냐? 그럴 리가.”
“……!”
“고작 너 하나를 길동무로 삼고 죽기엔, 지난 내 삶이 지나치게 퍽퍽했다. 난 그저 자유로 충만한 일다경의 시간이 너의 고목 같은 목숨 한 줄기보다도 더 가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 요망한!”
“네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지. 생명의 가치는 다 다르다고.”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말이 옳다. 생명의 가치는 달라. 너의 목숨 수천 개를 모아도 천하에서 가장 비천한 자가 살아갈 찰나의 시간보다도 무가치하다는 걸 알아야지.”
우우우우우웅.
천마도가 떨려 왔다.
뇌전을 일으키지 않은 군림마황기. 수렴과 응축을 반복하는 천마의 힘이 천하제일마병의 힘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내가 수십, 수백 번을 살려 준 목숨이다. 그러니 너의 목숨은 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거두어 가지 않는 이상, 네놈은 죽을 때까지 천하를 상대로 그 난장을 치며 살 것임을 안다.”
“……!!”
“다만 나나 너의 어깨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오늘만큼은 네 목을 베지 않겠다.”
무심했던 서량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드리워졌다.
장난기가 엿보이지만, 진중함을 잊지 않은 표정.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하게 웃음 짓게 만드는 특유의 표정.
그 표정에 더 이상 살왕의 잔재는 없었다.
그것이 십대천마 서량의 얼굴이었다. 백 년이 지난다 한들, 천 년이 지난다 한들 스러지지 않을 그의 영혼이 멋들어진 미소 한 자락에 담겼다.
“하니 전력을 다해 봐. 죽음이 지척에 도사리고 있는 현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과거보다는, 뭐 하나라도 더 나아졌길 바란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내 이름은 알고 있었군. 하도 이놈 저놈 불러 대기에 이름 석 자도 모르는 줄 알았더니만.”
담사영의 볼이 씰룩였다.
“내 목숨이 네놈의 것이라고?”
우르르릉.
천마도에서 벼락이 쳤다.
담사영은 자신을 겨누고 있는 칼날의 압력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오만방자한 놈! 마교로 기어 들어가 운 좋게 교주가 되더니만, 이제는 제 주인조차 못 알아보는……!”
“내 설교는 끝났다.”
번쩍!
서량의 몸이 담사영의 측면에서 나타났다.
담사영의 눈이 커졌다.
엄청난 속도였다. 정말이지, 순간적으로 서량의 움직임을 놓쳤다.
“이제 주둥이질은 그만하고, 네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 주지 않겠나?”
번쩍! 콰르릉!
담사영의 몸이 후방으로 쭉쭉 밀려났다.
무자비한 참격이었다. 거의 참마도(斬馬刀)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는 칼로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쾌공을 구사했다.
청천허상검으로 막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 죽음의 위기가 담사영의 정신을 곧추세웠다.
파바바바박!
서량이 재차 접근해 왔다. 이전처럼 빠른 몸놀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빈틈이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빤히 보고도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어떻게 반격해야 할지, 심지어는 먼저 공격해도 좋을지 말지조차 판단이 서질 않았다.
서량이 천마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담사영이 벼락처럼 청천허상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엉!
두 자루의 도검이 부딪치며 엄청난 충돌음을 만들어 냈다.
‘……?!’
담사영의 눈이 흔들렸다.
파아아앙!
그의 몸이 또다시 뒤로 밀려났다.
‘힘으로?!’
힘에서 밀렸다.
서량은 여전히 그 자리, 그곳에서 천마도를 휘돌리고 있었다. 일도(一刀)에 담사영을 날려 버렸지만, 그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모양이었다.
담사영의 동공이 더 짙은 청색을 발했다.
쾅!
무서운 속도로 달려든 그가 청천허상검을 휘둘렀다.
그물처럼 베어 내는 난격의 초식이 압권이었다. 사람은 물론 그 어떤 외물이라도 수십 토막을 내 버릴 듯 빠르고 격정적인 초식이었다.
서량의 대응은 냉정하고도 간결했다.
파지지직! 콰아앙!
“큭!”
담사영이 재차 뒤로 물러났다.
이번 충돌의 파괴력은 실로 대단했다. 허극신을 이용해 속도를 높인 만큼, 반탄력에 튕겨 나갈 때의 충격도 엄청났다. 전신의 관절이 삐걱거릴 정도였다.
‘무어냐, 이 무공은?!’
천하진이 구사한 적 없는 무공이었다. 암영기로는 이런 힘을 낼 수가 없다. 구유인화도법도 마찬가지였다.
담사영이 멍하니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은 왼손을 내민 채였다. 큼직한 그의 손 전체에 시퍼런 뇌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장법?!’
만압금마장(卍壓禁魔掌).
천하 모든 마를 제압하는 장공으로 천마의 권위를 상징한다. 마인이라면 경지를 불문하고 힘을 쓰지 못할 것이며, 마인이 아니더라도 초절한 위력을 발휘하는 강공(强攻)의 무공이었다.
“아직 정신 못 차렸군.”
번쩍! 번쩍!
서량의 안광도 더 어두워졌다.
지금껏 보여 주었던 그 어떤 뇌기보다도 더 강렬했다. 흑청빛 뇌기가 회색으로 물들고, 그 회색빛 뇌전에 조금씩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
순간 담사영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퍼퍼퍼퍼펑! 퍼퍼펑!
서량이 선 땅 주변이 제멋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뇌공(雷公)의 강림이요, 제석천(帝釋天)의 강림이었다. 파순의 노예가 된 벼락의 신이 지상에 내려와 온전한 신성(神性)을 드러낸 듯했다.
“삼초의 기회를 주지. 그 안에도 여전히 그 꼬락서니라면, 그냥 여기서 죽이는 게 낫겠다.”
담사영의 눈이 깊어졌다.
죽여? 나를? 누가? 네놈이?
콰아앙!
서량이 돌진했다.
달린다 싶더니 어느새 코앞이다. 당황한 담사영이 청천허상의 신검을 휘둘렀지만, 서량의 주먹은 신검의 예기조차 통하지 않는 강철과도 같았다.
쩌어엉!
‘큭!’
폭발하는 경파가 반경 십여 장을 휩쓸었다.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기물이 무차별로 터져 나갔다.
“일초.”
번쩍!
정신을 못 차리는 담사영의 전방 상단에 나타난 서량이 천마도를 십자로 휘둘렀다.
육중하면서도 빠른, 빠르면서도 유연한, 유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도초였다.
지극히 빠른 칼질임에도 조화롭고 도도했다. 풀어 나가는 마병의 무리(武理)는 마치 정파 무공을 집대성한 무신(武神)의 무공 같았다.
담사영이 허상검 최후의 초식을 휘둘렀다.
콰르르릉!
대지가 터져 나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새들이 일순 날갯짓을 멈추고 떨어져 내렸다. 뻗어 나가는 무형의 음파에 상상을 초월하는 내력까지 담겨, 날다가 죽어 버린 것이다.
푸화아악!
담사영의 가슴에 십자형 도상이 새겨졌다.
깊지는 않지만 평생 흉이 질 만한 상처였다. 천마도의 십자참(十字斬)이 기어이 천라무허신공의 내공 방벽을 깨부수고 그를 베어 낸 것이다.
“이초.”
콰앙!
담사영의 눈이 번뜩였다.
대지를 뒤흔드는 진각은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넋이 나갔던 절대고수조차 다시금 정신을 꽉 잡게 해 주는 긴장감 넘치는 진각이었다. 그리고 그 진각으로 힘을 끌어 올린 상대의 마력은, 그가 봤던 무인 중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최강을 논해도 될 만큼 압도적이었다.
‘이놈…….’
뭔가, 정신이 드는 듯했다.
‘천하진…… 천하진!’
그렇다.
하늘에 닿을 듯 크고 높은 그의 자존심은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그는 그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는 것을 죽는 것만큼이나 싫어했다.
그 자존심을 뿌리부터 박살 낸 상대가 눈앞에 있다.
담사영이 서량을 바라보았다.
좌수를 전방으로 내밀고, 천마도를 쥔 오른손은 뒤로 뻗었다. 과격하면서도 폭발적인 일격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담사영의 눈이 흔들렸다.
어느새 적당한 체구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던 얼굴은 사라지고, 칠 척 장신에 천하를 굽어보는 절대자의 나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천상?!’
그때 이천상이, 서량이 말했다.
“삼초다.”
번쩍!
날아온다. 절대의 일격이.
굵직한 검질 한 번에 의천맹의 전각 일곱 개를 그 자리에서 소멸시켰던 무적의 검공(劍功)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담사영의 생존 본능이 일순간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콰콰쾅!
도파(刀波)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채만 한 바위도, 장정 열 명이 둘러서도 껴안지 못할 굵은 거목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전방 십여 장 안에 거하는 모든 외물이 부서지고 박살 나 버렸다. 형(形)은 일참(一斬)을 따르되, 그 안에 무적의 마력을 끼얹은 극치의 기공술이었다.
군림마황기, 일휘마황혼(一揮魔皇魂)이었다. 비기인 정반합(正反合)을 제외, 칠십이신기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공부였다.
한 번 휘두름에 마황의 혼을 싣는다.
그 이름 그대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이었다.
“삼초가 끝났다.”
푸스스스스스.
깨끗했던 하얀 비단옷이 여기저기 부스러졌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담사영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용케 피했군.”
그렇다. 담사영은 이 절대의 일격을 피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칠 만한 무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행위가, 상대의 무공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이 담사영의 이성을 본래의 그것으로 되돌려 주었다.
“……짖을 대상도 못 찾은 개 주제에, 제법 성장했군.”
서량이 유쾌한 듯 눈을 찡긋거렸다.
“개가 된 늑대를 호랑이로 만들어 주는 사람도 있더라고. 그런 걸 보면, 넌 참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쓰레기 같은 놈.”
콰앙!
담사영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상처 입은 자존심은 뒤로 미뤄 둔 그가 투명한 눈으로 서량을 노려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제정신을 차린 것이다.
“버릇을 고쳐 주마.”
“스승님도 내 버릇 못 고치셨다. 너 따위가 노력한다고 고쳐질 천성이 아니야, 인마.”
담사영은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량은, 놀랍게도 담사영을 마주하며 모두가 아는 그로 돌아왔다. 언제까지나 땅 밑을 전전할 것 같던 사람은 모든 것을 털어 냈고, 언제까지나 날아오를 것 같던 사람은 땅 밑으로 내려와 버렸다.
두 사람의 역량이, 영혼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서량이 다시 천마도를 들었다.
“준비됐나, 쭉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