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천하제일(天下第一) (3)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하던 단리후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이대로는 안 돼.’
마교 놈들은 하나같이 정상을 벗어났다.
그것은 교주도, 교주의 호위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마교주가 진심으로 사부님을 죽일 생각이라면, 사부님이라도 생존을 장담키 힘들어.’
일대일 대결이라면 오히려 마교주가 밀릴 수도 있다. 그는 사부님의 힘이 천마를 웃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마교의 대호법까지 끼어든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호법의 무공이 둘보다 아래라 한들, 그 역시 극마의 고수. 능히 전황(戰況)을 바꿀 만한 무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사부님이 위험하다. 그리고 만일 사부님이 죽는다면 그 파장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본진에서 수장이 죽는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아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화르르르륵.
핏빛 화벽을 만든 마동필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자신의 죽음에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 죽음의 공포 따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목숨을 걸어라…….’
단리후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상대는 본인의 수장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마교주가 신이기 이전에, 수하로서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못 하고 있었다. 잴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 된다. 이쪽 전력을 대폭 깎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수장을 구해야 했다.
"칠십이정귀 전원, 술력을 내게 집중……."
그때였다.
팟!
사방을 뒤덮은 불길이 일순 꺼졌다.
쏴아아아아.
동시에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물이 뜨거운 공기를 식히며 자욱한 수증기를 만들었다.
단리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쑤욱!
흑혈마검을 뽑은 마동필은 지저화룡신까지 풀어 버린 상태였다. 창백해진 안색을 보니 무리한 마공 운용으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한데도 자세에 흔들림이 없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기세였다.
단리후가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짓이오?"
스르릉.
와중에 납검까지 한다. 전투 의지가 없음을 내보이는 행동이었다.
‘뭐지? 믿는 바가 있는 건가?’
기감을 퍼트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지종열화벽의 잔존 마기만이 느껴질 뿐, 어떠한 살기나 공격 의도도 읽히지 않았다.
‘기회…….’
일단은 상대를 짓누르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
단리후가 손을 들었다.
"적을 제압하라."
그때였다.
후우웅.
단리후는 순간 흠칫 떨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소름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쩍. 쩍.
빗물에 짓무른 땅을 밟는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번쩍!
소리 없는 번개가 허공을 갈랐다.
단리후는 자신의 바로 옆을 지나가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후우우.
엄청난 체구다. 너덜너덜해진 전포를 걸치고 참마도 같은 칼을 어깨에 턱 얹은 모습이 적군을 몰살하고 돌아온 대장군의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이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다. 당연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는 듯 발길 닿는 곳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호랑이의 살기에 질려 옴짝달싹 못 하는 양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실제로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서량의 존재감은 호랑이처럼 거칠고 위엄이 넘쳤다.
‘천마……!’
단리후를 지나친 서량이 입을 열었다.
"몸은?"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고생했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마동필마저 지나친 서량이 그대로 산을 내려가자, 그 뒤를 마동필과 무담이 따랐다.
그렇게 무적을 논하는 단 한 명의 천마와 두 명의 마인이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허억! 허억!"
"콜록! 콜록!"
칠십이정귀 절반 이상이 호흡 곤란을 일으켰다. 서량이 지나친 곳에 가까이 있던 자들일수록 호흡이 더 거칠었다.
단리후는 침을 삼켰다.
‘몰랐다니.’
천마의 기를 느끼지 못했다.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임에도 읽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극한의 전투로 달아오른 서량의 마기는 너무도 거대해서 단리후의 인지 능력에서조차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느끼지 못한 것이다. 착각해 버린 것이다.
세상이 불구덩이로 변했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무당산 오솔길 앞에 도착했을 때의 서량은 예전과 달리 기도가 무척이나 안정적이었다. 천하에 다시없을 고수임이 분명하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단정한 기도에 내심 실망이 컸다.
이후, 무시무시한 속도로 산길을 파괴하며 올라가는 마교주와 사부님을 보며, 천마의 무공이 퇴보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마교주는 과거 자신의 팔 하나를 날렸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때처럼 강했고, 그때처럼 무지막지했다.
그리고 지금, 단리후는 깨닫는다.
천마는 과거보다 더 강해졌다. 사부님께서 천룡의 비기를 꺼내 들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진정 무적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제 자신 정도의 힘으로는 발치에도 이를 수 없다. 아니, 예전에도 그랬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능히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단리후는 보이지 않는 담사영에게 물었다.
"저런 괴물을 지금 죽이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사부님?"
* * *
크르르릉.
고생했다는 듯 호왕이 서량의 가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무거워, 인마."
서량이 호왕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호왕이 입을 쩍 벌리며 그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사람 팔뚝보다도 굵은 송곳니가 서량의 피부를 슬쩍슬쩍 눌렀다 떨어졌다.
몸뚱이는 집채만 한 놈이 하는 짓은 고양이나 다름없다. 서량은 호왕의 머리를 꾹꾹 눌러 진정시키곤 주서윤을 보았다.
"별일 없었지?"
"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주서윤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웠다. 편안해 보였다.
"검이 울고 있다."
주서윤이 자신의 검을 들었다.
검신에서 희뿌연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상쾌해지는 선기(仙氣)였다.
선기임에도 마공을 익힌 그들에게 아무런 위해가 되지 않았다. 극에 이른 선기는 마기마저도 포용하는 법, 물극필반의 이치가 여기에 있었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노선배로구나."
"네, 할아버지예요."
무당산을 보는 주서윤은 진심으로 기분 좋은 듯 웃었다.
"할아버지가 저희를 지켜 주고 계셨어요."
"그랬구나."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싸움이 과열되면 무당산을 공략해야 할 수도 있다."
"네."
"그러한 순간이 오면, 무당산으로는 너를 보낼 것이다."
주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 마지않아요."
어떤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데도 걱정이 없다는 투다.
무모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그녀 자신과 현천진인의 인연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음을.
그녀에게 현천진인의 깨달음이 함께하는 한, 적어도 무당산에서 그녀가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까지 적어도 여기 계신 소림 방장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 노력 정도로는 부족해. 반드시 그래야만 해. 그 정도가 되지 않고선 널 보내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칫 무례하게 느낄 수도 있는 대화였다. 하지만 혜심은 아무런 동요 없이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들은 이런 대화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다. 소림 방장의 무(武)를 깨달음의 척도로 삼을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혜심이 물었다.
"다 끝났소?"
"그래."
"어땠소, 상대는?"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이 되질 않더군. 하지만 감당할 만은 하겠다."
혜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 게다가 이 싸움은 수장 중 누가 더 강한가를 따지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중원 전체의 운명을 결판 짓는 전쟁인 것이다.
개인적인 무(武)로도, 거대한 조직을 운용하는 수장으로서도 감당할 만하다. 서량의 대답은 그러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아쉽군. 나는 당신이 이곳에서 그를 죽이길 바랐소."
"담사영이 죽으면 놈들은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당장은 그게 좋을 수 있어도, 그리되면 장강 이북에 사는 양민 모두가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될 거야."
"……."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쉽게 결판을 낼 만한 상대는 아니더군. 게다가 이곳에는 내 사람들도 있어. 함부로 도박을 걸 만한 상황이 아니었지."
혜심이 한숨을 쉬었다.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그저 답답해서 그런 것뿐이외다."
"이해한다."
서량이 호왕의 등에 올라탔다.
"우리는 이대로 돌아갈 것이다. 당신들은 어디로 향할 텐가?"
혜심이 반장례를 하며 말했다.
"속인이 되었으니 세상천지 못 갈 곳이 없소이다. 큰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 민심을 안정시킬까 하오."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부디 몸 건강하길 바라겠어."
"교주께서 가시는 길에 광명이 가득하기를 바라오."
"웃기는 소리로군."
서량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마음 깊이 따르는 부처의 대척점에 선 자가 바로 천마다. 천마라는 자리는 마냥 즐겁기 힘들지."
"그래도 즐거웠으면 하오. 결국 천마 역시 부처를 완성시켜 준 자이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서량이 호왕의 등을 툭 쳤다.
몸을 돌린 호왕이 선두로 이동했다.
"죽지 마."
그렇게 서량 일행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본 혜심이 나직이 불호를 뱉었다.
"당신은 이미 부처요."
그날, 천마신교의 교주 염라마제 서량과 전(前) 의천맹주이자 황궁의 수장 담사영과의 만남은 중원에 사는 모두를 숨죽이게 했다.
그날 같은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두 절대자가 서로의 무(武)를 견주어 봤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가벼운’ 비무로 인해 무당산의 봉우리 하나가 크게 망가졌다는 것도.
당대 무림 정점에 오른 이들의 싸움은 그러했다. 무림인들은 그때의 싸움이 천신(天神)과 마신(魔神)의 겨룸이었다며 입방정을 떨길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지혜로운 자들은 깨달았다.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누가 이기든, 세상이 공포와 광기로 가득 찰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 갈 것이며, 그중에는 죄 없는 양민도 속할 것임을 알곤 걱정을 금치 못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흘러넘치는 대란의 공기는 흑도 패거리나 산적, 수적들마저도 숨을 죽이게 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가슴으로는 아는 것이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전쟁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터질 수도 있음을.
그래서일까? 오히려 양민들은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잠깐의 평화를 만끽했다.
서량과 담사영의 대담이 이뤄진 지 스무 날 후.
호요성은 직접 천마신교의 외성 대문에 나와 있었다. 그들 뒤로는 신교의 수뇌부 대다수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잠시 후.
"성신(聖神)께서 오십니다!"
호요성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군림성교! 천마불사! 미욱한 마의 자식들이 성신을 알현하나이다!"
서량이 희미하게 웃었다.
"배고프다. 한 상 기깔 나게 차려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