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화. 천하제일(天下第一) (4)
"그런가?"
"예."
"알았네. 이만 나가 보게."
"……."
"왜? 더 할 말이 있는가?"
"성주님."
"말씀하시게."
우물쭈물하던 황곤이 결심한 듯 말했다.
"이 전쟁에서 빠지는 것은 어떨는지요."
잔을 든 송금백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그대로 잔을 들이켰다.
황곤이 말을 이었다.
"성주님께서 이뤄 놓은 이곳, 철혈성이라는 조직은 사파의 유일무이한 기둥입니다. 강호삼세의 어떤 곳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지만, 굳이 다른 산의 호랑이들 싸움에 끼어들어……."
"이보게, 황곤."
"……예, 성주님."
"한잔하겠나?"
황곤이 읍하고는 송금백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비가 빈 잔을 가져오자, 송금백이 그 잔을 채워 주었다.
"자네, 나와 만난 지 얼마나 되었지?"
뜬금없이 과거 얘기를 꺼낸다.
황곤은 순간 지금 이 자리를 군사로서의 자신을 보여 주어야 할지, 젊고 혈기 넘치는 자신을 보여 주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판단을 내렸다.
"기억도 안 납니다."
"허허, 그런가?"
"요새 워낙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고 있어서 말입니다. 이제는 작년 일도 흐릿할 지경인데요."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우리 군사님 건강에 신경 좀 써야 했는데, 내가 그걸 못 했구먼."
황곤이 미소를 지었다.
"뭐, 괜찮습니다. 성주님께서 건강하시면 제 건강도 알아서 좋아집니다."
"껄껄껄."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황곤의 말을 달리 해석하자면, 지금 송금백이 건강치 못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몸이든 정신이든, 패도를 지향하는 문파의 수장에게는 실례되는 말이었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기에 더더욱.
송금백은 황곤의 말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우리 군사님을 위해서라도 내가 건강해야겠군. 유념하겠네."
"제발 좀 그래 주십시오."
"허허."
두 사람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이보게, 황 군사."
"예."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네. 어쩌면 나는 군주가 될 만한 그릇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황곤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고민이십니다."
"음? 왜 그런가?"
"저는 군주답지 못한 자를 모실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허허허."
"만일 성주님께서 군주답지 못한 군주였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철혈성에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 거짓말,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사적인 친분이 있더라도 장난을 칠 때가 있고, 쳐서는 안 될 때가 있다.
황곤은 그것을 구분할 줄 아는 자였다. 그래서 송금백은 황곤이 좋았다.
"그렇다면, 자네가 보았던 과거의 군주와 지금의 군주가 많이 달라진 것이로군."
"……."
"요새 이런 생각이 든다네. 나도 다 됐구나, 하는."
"……."
"측근에게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네. 하지만 어쩌겠나? 내 안의 심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져만 가는데. 심마 따위, 쉽사리 뽑아낼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이겨 내기가 쉽지 않구먼."
"그 심마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송금백의 눈이 흔들렸다.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담사영이 아닌 서량의 얼굴이었다.
과거, 소교주 시절의 서량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 천재였다. 당시의 그는 천하를 삼등분한 조직의 수장을 만났음에도 아무런 심동이 없었다.
그리고 교주가 된 서량은, 소교주 시절과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성장하여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비록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구석은 있었지만, 능히 자신과 대면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인이 된 것이다.
나아가 얼마 전, 호북에서 다시 보았을 때.
가능성 넘치던 젊은이는, 어느새 자신을 앞질러 욕망의 괴물이 되어 버린 담사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 너는 그런 놈이다. 욕심도 사라졌고, 이빨도 반쯤 빠져 버렸지만 아직 발톱은 그런대로 쓸 만한 놈이야.
냉혹한 미소와 함께 자신을 조롱하던 서량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도 안 나는군.’
철혈성으로 돌아온 송금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이야말로 그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굳이 더 넓은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는 소국의 왕이 자신이었다.
그리고 또한 깨달았다.
수라제라는 별호로 천하를 질타했던 철혈성주라는 땔감은 이미 다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는 걸. 억지로 불씨를 다시 일으키려 해도, 이제는 부시조차 남지 않았다는 걸.
‘심마…….’
송금백이 씁쓸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서 교주 때문인 줄 알았네."
"……."
"하지만 아니었어. 물론 서 교주의 말을 듣고 혼란을 겪기는 했네만, 그는 본래 있던 심마를 끄집어내 준 사람일 뿐, 심마를 일으킨 사람은 아닐세."
"……."
"심마를 만들어 낸 사람은 나 자신일세."
송금백이 눈을 감았다.
"패도지향의 사파대종사. 수라제라 불리며 당대 무림 최고수로 명성을 날리는 무림의 절대고수."
"……."
"그러한 명성이, 굴레가 오히려 나의 행동을 제어하고 있었다네. 그 정도 거인이라면 마땅히 천하일통을 노려야 마땅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야."
"……."
"정작 내가 원한 것은 그저 높은 자리에 앉아 땅땅거리며 사는 것이었는데 말일세. 생각해 보면 철혈성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지. 역대 성주들이 닦아 놓은 기반이 없었다면 언감생심 어찌 이만큼 키울 수 있었겠는가."
"……."
"여기까지가 내 그릇의 한계였던 모양일세."
황곤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송금백이 눈을 떴다.
"안타까운가?"
"안타깝습니다."
"허허, 솔직하군."
"저를 믿지 못하셨다는 걸 지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송금백의 눈이 커졌다.
"자네를 믿지 않았다니?"
"성주님께서는 변하셨습니다. 하지만 성주님의 천성은 변하지 않았지요. 성주님의 그릇은 처음 뵈었을 때보다 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습니다."
황곤의 눈이 빛났다.
"그래도 저는 성주님을 군주로 모셨습니다.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
"내 주군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송금백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무례임을 알지만, 감히 한 말씀 올립니다. 성주님께서는 그때도, 지금도 천하제일을 노릴 만한 그릇은 아닙니다."
"……!"
"마교주? 담사영? 그들은 다르지요. 고백하자면, 저는 그 두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림사에 천하일통을 원하는 자는 많았지만, 당대 그 두 사람만큼 광기 어린 추진력으로 현실로 만들어 가는 자들은 달리 없었습니다."
황곤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저는 성주님이 좋습니다."
"……그릇이 부족한데, 어찌 좋다고 하는가?"
"제가 그들에게 갔다면, 과연 그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가 되었겠습니까?"
"……!"
"저는 군사이며 수하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함께해 줄 동반자를 찾고 있었지요. 꿈을 홀로 이룰 수 있는 자는 제게 필요치 않았습니다."
송금백의 눈이 떨려 왔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게 성주님만큼 적격인 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주님의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함께 천하일통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지요."
"……."
"하지만 성주님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저는 제 무언가가 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변하다니?"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고."
"……!!"
황곤이 활짝 웃었다.
"천하일통? 좋지요. 사내로 태어나 천하를 손에 거머쥘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보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 위대한 꿈보다, 자신의 영역을 지킬 줄 아는 거인과 함께 살림이나 하며 지내는 게 더 재미있습니다."
"……."
"그것이 성주님입니다. 천하일통을 이룰 패자의 자질 이전에, 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데에 있어 누구보다도 큰 그릇을 갖고 계십니다."
"허허."
"저는 천하일통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목숨을 걸었지요. 성주님께선 그런 저의 욕망마저 희석시킬 만큼 출중한 매력을 갖춘 분입니다."
황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제 성주님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하를 손에 거머쥐려는 놈들은 저희끼리 싸우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군주를 위로하겠답시고 없는 말을 하진 않습니다."
"허허허."
송금백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만감(萬感)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씁쓸함과 안타까움, 기쁨과 편안함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자네가 나를 알고 있었군. 나도 나를 모르고 있었는데 말일세."
"물론입니다."
"나의 그릇, 나의 자질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
"처음 뵈었던 그때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송금백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한데 어찌 나를 막지 않았나? 담사영과 손을 잡았을 때, 자네라면 어떻게든 날 막을 수 있었을 걸세."
"성주님께서 귀를 닫고 계셨지요."
"이 사람, 그래도 막아 줬어야지."
"저희 아버지께서 절 어떻게 키웠는지 아십니까? 어떤 일이든 절대 막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경험하게 한 후 충격을 받으면 위로해 주시곤 했지요."
황곤이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살아왔으니, 제가 성주님을 고를 수 있었던 겁니다."
"허허허! 참으로 건방진 사람이로고. 그게 주군에게 할 말인가?"
"사실입니다. 이젠 받아들이실 때도 되었습니다."
"크하하하!"
송금백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웃었다.
씁쓸했지만, 그만큼이나 기뻤다. 천하를 얻을 배짱은 없었지만 적어도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제 받아들일 때가 되었지. 나의 그릇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으셨습니까?"
"깨달았다네."
송금백이 미소를 머금었다.
"천하일통은 포기해야겠네. 하지만 내가 싸 놓은 분뇨는 치우고 가야 할 것 같네."
황곤이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내일부터 군사 회의를 열 테니, 오늘은 푹 쉬시지요."
"허허, 그러세나."
그래, 인복이 있는 게 어딘가.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셨다. 오늘은 이대로 마시고 죽자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억지로 내공을 짓눌러 마음껏 취한 두 사람이었다. 어느새 취해서 곯아떨어진 황곤을 앞에 두고, 송금백은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으음, 이걸로 끝인가."
병에 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송금백이 병을 들어 잔을 채우려는 그때였다.
‘……?’
손이 병목이 아닌, 황곤의 목을 쥐고 있었다.
송금백의 눈이 커졌다.
부르르르.
황곤의 목을 감싼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당장이라도 황곤의 목을 분질러 놓을 것처럼.
‘헉!’
깜짝 놀란 송금백이 뒤로 물러났다.
우웅. 우웅.
그의 손에서 은은한 화기(火氣)가 일렁였다.
묵혈괴룡공이 아니었다.
‘……천룡기(天龍氣)?!’
담사영과 함께하며 얻은 혈화(血火)의 천룡기가 제멋대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묵혈괴룡공이 일며 주기(酒氣)를 날리고 천룡기를 억제했다.
송금백이 주먹을 꾹 쥐었다.
"……대체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