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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523화 (522/774)

523화. 작은 바람이 태풍을 만든다 (3)

"후우."

사흘 넘도록 업무의 바다를 헤쳐 온 서량은 판마정으로 들어왔다.

지이이이잉.

군림마황기가 치솟자 심장에 새겨진 유진도형결이 움직였다.

츠츠츠츠.

판마정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림자 하나 지지 않는 백색의 세상이 어느새 이름 모를 황량한 산의 절벽 위로 바뀌었다. 그 절벽에는 멋들어진 정자가 서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판마정 운용이 능숙해졌다. 이제는 눈 한 번 깜빡이면 곧장 세상이 바뀔 정도였다.

커다란 정자에 오른 서량은 난간에 앉아 절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람 좋네."

생각하면 할수록 신통방통한 진법이다.

인간의 의지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진법. 주인의 상상에 따라 환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천하에서 가장 기묘한 공간.

‘맛 들이면 큰일 나겠군.’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 말하자면 이곳에서만큼은 신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대화할 사람을 만들지는 못한다.

물론 이천상은 달랐다. 대상의 영기(靈氣)가 없는데도 실제로 듣고 말하는, 반응하는 사람을 만들었다는 데에서 새삼 이천상의 경지가 얼마나 지고한지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서량은 그럴 수 없다. 천마도의 선천마기를 이용해서 이천상을 불러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이천상 본인의 영기를 머금은 천마도가 있었기에 겨우 가능한 술수였다.

‘차라리 그게 낫지.’

판마정은 환상의 세계다. 실재하는 세상이 아닌 것이다.

이런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상황, 원하는 사람, 원하는 풍경만 만들며 살다가는 현실과 환상의 선(線)을 잃을 것 같았다. 아니, 그걸 따지기 이전에 밖에 나가기도 싫을 것 같다.

‘그런 걸 생각하면 판마정은 정말 잘 만들어진 진법이야. 애초에 상상하는 대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경지는 아니지만…….’

절벽 너머를 둘러보던 서량이 눈을 감았다.

우웅.

다시 눈을 뜨자 세상이 또 바뀌어 있었다.

화르르륵!

눈에 보이는 곳곳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콰지직! 쾅!

부서진 현판이 땅으로 떨어졌다. 부서진 돌담에 시체가 보였다.

반응하는 사람을 만들 수는 없지만, 시체는 만들 수 있다. 실제 영기가 실리지 않은 만큼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판마정에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뿐이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새삼 씁쓸했다. 놀라운 진법이지만 결국 만들어 내는 것은 죽음이다.

‘닮았군.’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붉게 물든 하늘에서 수십 줄기의 벼락이 떨어졌다. 화마에 휩싸인 대지 너머로 아득히 높은 해일이 밀어닥쳤다.

지옥이었다. 서량이 막연히 상상하는 지옥이 바로 이러했다.

‘이 세상과 너무나도 닮았어.’

씁쓸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서량이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척.

서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인기척?’

뭐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서량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호?"

화르르륵.

금호가 거기에 있었다.

쏟아지는 벼락 아래, 불타오르는 땅 위에, 불어닥치는 칼날의 삭풍 속에 금호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금호이자 금호가 아니었다.

‘뭐지, 저 몸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금호의 몸은 마치 불처럼, 혹은 연기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황금빛 털이 춤을 춘다. 사람의 그것처럼 또렷했던 두 눈은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몸통만큼이나 거대한 꼬리는 놀랍게도 두 개로 갈라져 있었다.

파지지지직!

그중 하나의 꼬리는 흑색의 번개를 흩뿌리고 있었다.

화르르륵!

다른 꼬리는 피처럼 시뻘건 화염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주르륵.

서량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이 만든 세상에, 상상하지 않았던 존재가 제멋대로 침범했다. 한데 그 존재가 바로 고죽림에서 쉬고 있을 금호였다.

‘금호!’

서량은 확신했다.

마치 천마도에 봉인된 선천마기로 만든, 진짜이면서도 가짜이며 허상이면서도 실체를 가진 이천상처럼.

저 금호 역시 실체이자 허상이다. 다른 게 있다면 서량이 불러낸 것이 아니라, 금호 스스로 이곳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일 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그때였다.

「왜 이 정도밖에 되지 않지?」

서량은 경악했다.

"뭐, 뭐라고?"

「너는 약해.」

대화의 대상은 놀랍게도 금호였다.

대호처럼 커다란 여우 요괴가 말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제아무리 판마정이라지만, 설마하니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서량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약하다고?"

「너는 빨라. 그러나 약해.」

약하다.

전생한 후, 누군가에게 약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의 성장 속도는 누구라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고, 손에 넣은 강함을 완전하게 체득시키는 시간 역시 남들보다 수십 배는 더 빨랐다. 그렇게 쌓고 또 쌓아 온 지금의 강함이었다.

그러나 금호는 말한다. 서량이 약하다고.

당대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를 보며 당연하다는 듯 약하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약하다…… 그런가?"

서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그리 보일 수도 있지."

그는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실제로 강했으니까.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자신(自信)이었다.

그러나 금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금호는 존재만으로 운명에 관여할 수 있는 거대한 기(氣)의 집합체였다.

금호는 짐승의 몸을 한 요선(妖仙)이었다. 짐승으로 태어나 영물이 되는 과정을 거쳐, 스스로 선도(仙道)의 영역까지 다다른 불가해한 존재였다.

그런 금호와 동격으로 인정받을 사람은 당대 한 명뿐이었다.

「그는 강했어.」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금호가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그는 강했어. 너는 약해. 그는 네가 자신을 뛰어넘을 거라 말했어. 하지만 여전히 약해.」

서량이 피식 웃었다.

왜일까? 뭔가 금호의 말투가 투정처럼 들렸다.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풀렸다. 뜻 모를 긴장도 사라져 버렸다.

"그분의 말을 다 믿지 마라. 그분은 그냥 날 인정해 주었을 뿐이야. 누구도 그분처럼은 되기 힘들어."

「하지만 그는 확신했어.」

"그분이 뭐라 말했든 나와는 상관없어. 사부님의 말에 희망을 품고 있다면, 이만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별안간 나의 약함에 실망했나?"

금호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그 신비한 눈으로 서량을 응시할 뿐이었다.

서량 역시 아무 말 없이 금호를 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금호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뭐?"

「나는 영원히 살지만, 그만큼 죽어. 이제는 죽고 싶지 않아.」

뭐라는 거야, 이 녀석?

일순 금호의 두 눈이 분홍빛으로 변했다.

파지지지지직! 콰르르르릉!

서량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이내 금호의 눈빛이 완연히 선홍빛을 띠는 순간, 금호의 몸이 호왕보다 몇 배는 더 커졌다.

파지지지직! 콰콰쾅! 콰르릉!

귀청을 떨어 울리는 폭음이 울렸다.

그것은 금호의 꼬리 때문이었다. 다시 하나로 합쳐진 금호의 꼬리는 가히 산봉우리처럼 거대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꼬리는 온전한 흑색 뇌전으로 휩싸여 있었다.

마치 태초의 거인 반고(盤古)가 휘둘렀을 법한 뇌전의 신창(神槍)처럼.

「그는 이 정도로 강했어.」

충격적이다.

눈에 보이는 금호는 실재가 아니다. 환상이다. 하지만 실제 금호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이것이 고금제일마의 진신진력……!’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큰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금호가 기억하는 이천상의 힘의 크기는 산처럼 거대했다. 그에 비하면 서량의 힘은 거대한 바위만도 못했다.

‘이 무슨 불합리한 전력 차란 말인가.’

자신의 강함은 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육신을 지녔기에 저 강인한 힘을 다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육신으로 저 초월적인 힘을 봉인했다는 것 자체도 믿기지 않았다.

서량의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렴풋이 짐작했던 이천상의 힘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강인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해지고 싶다.’

수련은 일상이고, 무의 궁구는 당연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지닌바 열망이 예전만은 못했다. 너무 바쁘기도 바빴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금호는 그런 서량을 꾸짖고 있었다.

너의 본질을 잊지 말라고 외치는 듯했다. 네가 진정 천마(天魔)의 무(武)를 잇는 자라면, 이 정도는 올라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질책하고 있었다.

서량은 그 질책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저 거대한 힘을, 대자연의 섭리조차 붕괴하는 신력(神力)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 힘으로 적도들을 날려 버리고, 마도의 이상향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내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내 사람들의 자손들을 지킬 수 있다면.

금호는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는 서량을 보다가 이내 훅!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콰르르릉!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익숙한 판마정의 풍경이었다.

"어?"

서량은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자신이 만들었던 절벽 위의 세상도, 지옥도 없었다.

‘뭐지?’

갑자기 왜 환상이 사라져 버린 거지?

순간 서량은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격통을 느꼈다.

"큭!"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서량.

그의 눈이 흔들렸다.

- 나는 영원히 살지만, 그만큼 죽어. 이제는 죽고 싶지 않아.

파아아악!

재빨리 판마정의 문을 박차고 나간 서량은 순식간에 고죽림의 입구로 들어갔다. 오는 길에 수많은 마인이 고개를 조아렸지만 그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였다.

파라라락.

고죽림으로 들어서자 오랜만에 보는 마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물 중 누구도 서량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레 나타난 서량을 보며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달아나기 바빴다.

서량은 단숨에 고죽림의 비처로 들어섰다. 과거 금호를 처음 만났던 그때 그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에 금호가 있었다.

"……!!"

서량의 얼굴에 충격이 깃들었다.

「쌕…… 쌕…….」

금호는 예전 처음 봤던 그 자리에서 꼬리로 몸을 말고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금호는 새끼처럼 작아져 있었다.

서량은 깨달았다. 금호가 죽었음을.

대호처럼 거대해졌던 금호의 육신은 죽어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새로운 금호가 있었다.

서량이 무릎을 꿇었다.

금호의 커다란 귀가 짧게 펄럭였다.

서량이 금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번쩍!

순간 서량의 머릿속에 과거의 환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금호가 겪은 과거였다. 사건이었다.

천하에서 유일무이한 요선이 힘을 잃고 죽게 된 경위였다.

"그랬구나."

금호는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죽었다.

서량의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네가 사부님을……."

그것은 이천상 때문이었다.

천리(天理)를 거부한 이천상은 마땅히 사람으로서 죽어야 한다. 혼과 백이 나뉘고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야 마땅했다. 그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금호는 사람으로서, 천마로서 죽은 이천상의 육신을 세상으로 흩어 버렸다.

세상과 하나가 된 게 아니었다. 천리를 거부한 자를 금호라고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저 현천진인처럼.

금호는 죽어 가는 이천상을 인간이 아닌 반선(半仙)으로서 죽게 했다.

죽은 이천상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현천진인은 무당산과 하나가 되었지만, 이천상이 간 곳은 알 수가 없었다. 금호는 거기까지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지니고 있는 요력의 대다수를 소모해 버렸다. 그래서 죽음이 빨리 찾아온 것이다.

만일, 서량에게 저 현천진인만큼의 깨달음만 있었다면.

깨달음은 그에 도달하지 못했다 한들, 이 세상 누구보다 강해지고 깊어졌다면 금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힘을 빨아먹고 다시 살아났을 테니까.

말하자면 금호는 서량이 약해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자신을 도와준 금호가 죽은 것은, 전적으로 서량이 약해서였다.

"미안하다."

서량이 금호를 껴안았다.

금호가 크게 하품을 하더니 맑은 눈으로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천진난만한 그 눈빛은 처음 금호를 봤던 그때와 똑같았다.

"다시는 널 죽게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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