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마(魔)의 미학 (2)
“준비되셨습니까?”
“물론임다.”
“…….”
“……?”
“커험.”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뭔가 위 령주를 보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어요. 역시 인생은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위홍련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저 놀리시는 거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위 령주의 그런 모습이 좋습니다. 자신만의 도(道)가 있는 삶. 캬! 정말 멋져요.”
“그럼 저 데리고 사시든가요.”
호요성은 신교의 총군사가 된 이래 처음으로 오금이 저리는 걸 느꼈다.
위홍련이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안 됩니까? 쳇, 총군사한테 시집가서 팔자 좀 피나 했더니만.”
“농담이죠?”
“당연히 농담이죠. 저는 나이 많은 놈보다는 빠릿빠릿한 젊은 놈이 좋아요.”
“다행입니다. 다시 위 령주가 좋아졌어요.”
“본인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는 취미 있어요? 변태예요?”
“사내들은 다 변탭니다. 근데 왜 이렇게 날이 섰습니까?”
“날 안 섰는데요?”
“그래요?”
“당연하죠.”
“뭐, 알겠습니다. 혹시나 해서요.”
기다렸다는 듯 위홍련이 쏘아붙였다.
“근데 왜 하필 지금입니까? 한창 수련으로 바쁜데 말이죠.”
역시 삐졌군.
호요성이 헛기침을 했다.
“전쟁의 판도를 우리한테 유리하도록 바꿔 볼까 하고요. 이번 임무를 수행할 사람이 위 령주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많죠. 호법원의 전대 노선배님들 엄청 많잖아요. 마존 어르신들이야 저 개 같은 놈들이 주시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신장부만 보내도 될 테고.”
“신장부 역시 적들에게 알려진 조직입니다. 게다가 신장부 성격상 이런 은밀한 일은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울 겁니다.”
“쥐새끼 같은 짓은 나더러 해라?”
“그렇습니다.”
표정을 구기며 호요성을 노려보던 위홍련이 일순 히죽 웃었다.
“임무에서 돌아오면 저랑 찐하게 한잔해요.”
“……왜요?”
“무진장 취하게 만들어서 확 덮쳐 버리려고요.”
“농담이죠?”
“진담입니다.”
“임무 달성하고 죽으세요.”
“할 말입니까, 그게!”
호요성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어쨌든, 이번 임무의 중요성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마왕령의 임무 성공 여부에 따라 전쟁의 판도가 바뀔 수 있어요.”
위홍련이 피식 웃었다.
“세상에, 고작 마왕령 이백 인원에 신교의 운을 걸다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뭐 이래요?”
“그래서 당신을 마왕령주에 앉힌 겁니다. 당신은 할 수 있으니까.”
“…….”
“작은 바람이 모이고 모여 어느새 폭풍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마왕령은 물론 본교의 수많은 부대는 작은 바람에 불과할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들이 제각기 적재적소에 불어닥쳐 폭풍을 일으키는 순간, 우리는 그 폭풍을 쥐고 흔들어 적들을 쓸어 버릴 것입니다.”
“말 한번 멋있게 하네요.”
“총군사니까요.”
위홍련의 얼굴에도 어느새 진지함이 깃들었다.
“제대로 날뛰고 오겠습니다.”
“부디 무운을 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그리고.”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면 술 한잔합시다. 내가 사지요.”
위홍련이 씨익 웃었다.
“자미루 간 지도 오래됐는데, 거기서 사세요.”
“좋습니다.”
그렇게 위홍련은 마왕령과 함께 신교를 나섰다.
그답지 않게 외성까지 나가 그들을 배웅한 호요성의 얼굴에 작은 긴장이 떠올랐다.
“제대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 * *
‘이럴 수가!’
쿠구구궁!
십오 장? 십팔 장?
아니, 이마 좌우에서 뻗어 올라간 저 뿔까지 치자면 정말 그 크기만 이십여 장에 이를지 모르겠다.
서량의 등 뒤, 정자 바깥에서 모습을 드러낸 악귀흉장(惡鬼凶將)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시커먼 몸체에 지독히 어두운 갑주를 차고 있는데, 천하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독특함과 기괴함으로 가득했다. 회색빛 뼈대로 만들어진 해골 갑주였다.
악귀의 목에는 인간의 두개골을 엮어 만든 목걸이가 치렁치렁 흔들리고 있었으며, 굵고 긴 네 개의 손가락에 잡힌 칼날은 산봉우리도 쪼갤 만큼 치명적인 뇌화(雷火)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군의 수장이라면 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마기가……!’
진짜 놀라운 것은 저 존재가 자아내는 폭발적인 마기였다.
그저 진법의 환상으로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니었다. 저 악귀흉장이 내뿜는 절대마기는 기화요초 만발한 선경을 단숨에 지옥으로 만들 듯 강렬한 생기(生氣)를 발하고 있었다.
존재해선 안 될 지옥의 흉장을 현실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 흉장 아래, 서량이 있었다.
푸스스스스.
어느새 정자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서량은 널찍한 바위에 앉아 있었고, 무명 자신은 잡초 가득한 땅 위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조금 전에 뭐라고 했었지?”
무명이 떨리는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서량은 권태로운 표정으로 그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충신을 죽이겠다고 했나?”
“……!!”
“이 내가, 네년이 대호법을 죽이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으냐?”
서량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미소 같지 않은 미소가 권태로운 표정과 어우러지자 치명적인 자태를 완성시켰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내가 괜히 이곳에 널 데려온 게 아니지. 혹여 네년이 극단적인 수를 쓰면 애먼 대호법만 죽어 나갈 것이 뻔하지 않겠나.”
“…….”
“만에 하나, 천만 분에 하나라도 대호법이 죽었다면, 너는 이곳에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섬뜩함에 등허리가 축축해진다.
하지만 무명은 자신이 있었다. 이곳에서 저 괴물을 이길 자신은 없지만, 제 한 몸 빠져나갈 자신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의문은 풀어야만 했다.
“대체 이곳은 뭐죠?”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글쎄? 뭘까?”
“…….”
“중요한 건, 지금 네년이 내 손에 잡혔다는 것이지.”
무명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날 잡을 수 없어요.”
“그런가?”
“당연하죠.”
“자신감이 좀 과한 거 아닌가?”
“절대요. 나는 물론 담사영 그 사람도 당신을 쉽게 보진 않아요. 오히려 천하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보죠.”
무명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만약 당신이 쓸데없는 희생을 치르는 데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담사영을 설득했을 거예요. 포기하라고.”
“쓸데없는 희생이라?”
“내가 다스리고 있는 혈신기(血神氣)는 중원 전역에 퍼져 있죠. 그리고 혈신기가 머무는 인근에는 무수히 많은 양민이 살고 있어요.”
“흐음.”
“애초에 날 잡을 수도 없겠지만, 혹여 날 죽이더라도 혈신기의 역류는 막지 못해요.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무명이 오른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활짝 펼쳤다.
“퍼엉.”
“신선한 표현력이군.”
“혈신기의 농도는 한낱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어요. 더하여, 외기(外氣)와 닿으면 끊임없이 힘을 불리는 성질을 갖고 있죠.”
“그리되면 세상은 지옥이 된다, 이건가?”
“적어도 마교주를 만나러 오는 길인데, 그 정도 안전 장치는 해 놔야죠. 설마 이 말을 진짜로 꺼낼 줄은 몰랐지만 말이에요.”
서량의 미소가 짙어졌다.
“머리는 잘 안 돌아가지만, 최소한 제 목숨 챙길 역량은 있다는 뜻이로군.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지.”
“믿는군요?”
“진실을 말하는데 믿지 않을 이유가 있나.”
“내가 말하는 게 거짓일 수도 있잖아요?”
“너같이 어중간한 헛똑똑이들은 말꼬리 잡아 가며 상대를 뒤흔들려 하지. 미리 말해 두겠는데, 그런 멍청한 짓은 여기까지 하도록 해. 수준 떨어져 보인다고.”
무명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서량의 눈에 흥미가 일었다.
“혈신기라…… 생각해 보니, 그 혈신기라는 놈을 흡수해 본 적이 한 번 있지. 당시 그 망할 년이 다스리고 있던 기운이 혈목신기(血木神氣)라 했던가?”
“목정의 대사제.”
“그래, 그년이었지.”
우우우웅.
어느새 서량의 옆에 천마도가 둥둥 떠 있었다.
서량이 손가락으로 천마도의 도신을 훑었다. 그러자 천마도가 우웅, 하고 도명을 터트렸다.
“천하제일의 마병이라면 네년이 깔아 둔 그 혈신기인지 뭔지 하는 걸 죄다 흡수할 수 있을까, 싶구먼.”
“절대 불가능할걸요.”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시험해 보도록 하지.”
무명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서량이 손을 들었다.
“이제 그만하지.”
“…….”
“천하의 마교주 얼굴도 봤고 자격 있는 사람이 아니면 들여보내 주지 않는 교주의 거처에도 와 봤으니, 그런대로 성공한 인생 아닌가? 이만 대호법을 내놓지, 그래.”
무명은 차가운 눈으로 서량을 노려보았다.
서량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네년의 꼭두각시가 된 것만으로도 대호법은 자괴감에 죽으려고 할 거다. 네년의 장난질은 그렇게 심했어.”
“…….”
“이만 내놓고 꺼져. 오늘은 곱게 보내 주지.”
무명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자기 사람을 아주 살뜰히 챙기는군요?”
“당연히 그래야지.”
“악명 자자한 마교주답지 않아요. 오히려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이제부터라도 반성해라. 천하에서 가장 악랄하다는 마교주도 제 사람은 챙길 줄 아는데, 너희는 그것도 못 하고 있으니 얼마나 병신 같은 놈들이냐?”
“그게 오히려 본인의 약점이라고는 생각지 않…….”
그때였다.
서량이 입을 열었다.
“잡아.”
지이이이이이잉!
“헉!”
무명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느새 그녀의 몸 전체가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여 버렸다.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주박(呪縛)의 일종으로, 무인의 진기(眞氣)가 아닌 술사(術士)의 정기(精氣)를 이용한 술법이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웅.
무명은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한옆에 앉아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새끼 여우의 눈을.
그 여우의 푸른 눈동자가 어느새 진한 분홍빛을 띠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지?’
이상하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 건 당연했고, 시간이 지나자 눈알조차 의지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량이 왼손을 뻗었다.
쿠구구궁.
거대한 악귀흉장이 꿈틀대는 천룡의 목을 틀어잡았다.
천룡이라고는 하지만 그 크기는 흉장의 십 분의 일이나 될까. 게다가 무명이 금호의 주박술에 걸리니, 천룡 역시 옴짝달싹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서량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악귀흉장의 입도 따라 열리며 도검처럼 예리한 이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렵사리 예까지 왔는데, 그냥 보내 주기는 좀 그렇고.”
서량이 음험하게 웃었다.
“중원 각지에 퍼져 있다고? 그래, 그 혈신기가 고여 있는 곳이 어디인지만 알려 주고 꺼졌으면 하는데.”
“……!!”
“어디 한번 볼까?”
악귀흉장이 손아귀에 쥔 천룡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번쩍!
동시에 무명의 두 눈이 칠채색을 발했다.
풀썩!
무명, 아니 무담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어느새 천룡궁주가 무담의 육체와 연결된 괴뢰화를 풀어 버린 것이다.
푸스스스.
악귀흉장의 손에 잡힌 천룡 역시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하북, 산동, 산서…… 뭐, 세 개 정도 봤으면 나름 괜찮은 수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