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화. 마(魔)의 미학 (3)
“허억!”
담사영이 거친 숨을 삼키며 눈을 떴다.
단리후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순식간에 호흡을 다잡는 그였다.
하지만 단리후는 보았다. 담사영의 눈빛이 무척이나 살벌해졌음을.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
“사부님.”
“그래서 나서지 말라고 했건만.”
“예?”
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천룡궁주가 천하진과 만났다.”
“예,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용형괴뢰술로 분명…….”
“놈은 알고 있었어. 마교의 대호법 몸에 천룡궁주가 들어갔음을.”
“……!!”
그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천룡궁주의 성격, 서량의 통찰력을 떠올린 단리후는 마음이 다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들켰습니까?”
“혈신기의 이력을 다시 준비해야겠다.”
“예?!”
“하북, 산동, 산서의 칠요집전술이 집행된 곳이 발각되었다.”
단리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북과 산동, 산서는 중원 북부에 퍼진 혈신기의 호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질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하필이면 들켜도 그 세 곳을……!”
“그 세 곳이 천룡궁주의 무의식에 가장 선명하게 자리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들킨 겁니까?”
이런 걸 물을 때가 아니었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서량이라도 어떻게 천룡궁주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천룡궁주가 속세의 다툼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바보는 아니었다. 상대의 유도 질문에 걸려들 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기괴한 진법에 당했다. 천룡궁주조차도 처음 보는 진법이었어.”
단리후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당장 그쪽으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래.”
“이렇게 되면 저쪽에서 먼저 치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에 따른 대비도 해 둬야 할 텐데…….”
“그걸 모르겠다.”
담사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 모르겠어. 놈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세 개 성의 혈신기를 이력해야 함이 옳기는 하다만…… 어쩌면 놈이 그걸 놔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힘을 쏟을 일은 하나입니다.”
담사영이 단리후를 보았다.
단리후가 눈을 빛냈다.
“옥새는 잠시 내려 두고, 빙궁을 날려 버리는 겁니다. 어차피 놈들로선 전쟁이 장기화되는 걸 감수하더라도 무조건 옥새를 가져오려 할 테니, 또 다른 병력을 파견할 겁니다.”
“……그렇군.”
담사영의 눈에 흉악한 살기가 이글거렸다.
“그래, 수십 일을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느라 고생이 많았지. 이 김에 놈들을 싹 묻어 버리자꾸나.”
* * *
“어떻다던가?”
“일단 몸에 큰 이상은 없지만, 상단전에 지대한 충격을 받아 당분간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거라고 합니다.”
“역시 그런가.”
“예. 천만다행히도 대호법의 의지가 워낙에 강하고, 술사의 기(氣)가 동조되는 순간 본능적으로 마기를 이용, 영력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대호법이라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서량의 눈이 차가워졌다.
“재미있는 짓거리들을 하는군.”
호요성이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저들의 이번 한 수로 인해, 적군의 범위를 넓혀야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음.”
“만에 하나라도 철혈성주조차 괴뢰가 되었다면…… 지금까지 철혈성주를 통했던 공략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복안이라도 있으신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서량이 입을 열었다.
“일단 철혈성주에게 서신을 보내게. 되도록 빨리 만나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철혈성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시행하도록.”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판마정에서 보기에, 그 술법은 누구에게나 걸 수 있을 만큼의 범용성을 자랑하진 못했어. 많아야 서넛이다. 게다가 한계도 명확했지. 술사의 역량을 뛰어넘는 자에게는 쉬이 걸기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철혈성주는……?”
“그게 좀 애매해. 분명 철혈성주에게도 장난질을 쳐 놓은 것 같기는 한데, 어째 느낌이 묘하단 말이지.”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마도?”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철혈성주 역시 괴뢰가 되었다는 판단하에 움직여야 할 거야. 일단 철혈성 내의 사정을 철저하게 알아본 후, 놈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인다 싶으면 최대한 빨리…….”
“교주님.”
“엉?”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천룡궁주에게서 그 이상을 보지는 못하신 겁니까?”
“천룡궁주의 정신력은 그 누구보다도 탄탄한 방벽을 자랑하고 있었다. 판마정에서, 그것도 철저하게 상대를 도발했기에 부분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거지.”
호요성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교주님께서 천룡궁주의 모든 것을 알아내셨다면 모를까, 한정된 정보밖에 얻지 못한 이상 우리 쪽에서도 먼저 움직이기가 더 힘들어져 버렸다.’
차라리 몰랐다면 병력과 병력 간의 충돌 속에서 적이 쓰는 수법을 하나하나 파악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희생은 크지만, 오히려 적의 수법을 역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한정적인 정보에, 이쪽에서 그 적은 정보나마 알아냈다는 걸 당사자인 천룡궁주와 담사영 역시 깨달았을 수 있다.
‘싸움이 멈춘 거다. 적어도 당분간은 서로의 본진을 향해 어떠한 술수도 펼칠 수 없어. 상대를 건드려 반응을 살펴보기에는 상황이 지나치게 위험해.’
말하자면 본진이 아닌 쪽을 건드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본진과 본진의 싸움이 멈추었으니, 우선 상대의 팔다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렇다면…….’
호요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교주님.”
“응?”
“일단 빙궁과 마왕령에게 따로 서신을 보내야겠습니다.”
“빙궁? 마왕령은 또 왜?”
“만일 그들 역시 교주님께서 천룡궁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절대 우리를 도발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잠시간 싸움이 멈춘 셈입니다.”
순간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가지치기에 들어갈 것이다?”
역시나 교주님과는 대화할 맛이 난다.
“그렇습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상대 쪽에서 무엇을 획책하는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싸움의 흐름이 분산되었습니다. 지금 가장 위험한 것은 빙궁입니다.”
“옥새를 포기하고 불안한 병력부터 날려 버리겠다……. 그래, 그럴듯해. 아니, 가장 가능성이 크겠어.”
“조심하라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
“안 됩니다. 이번 소강상태는 자연스럽게 풀리거나 제삼자로 인해 무너져야 합니다. 누구 하나 먼저 나서서 싸움을 재개하는 순간 무조건 전면전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상황이구만.”
“어떻게든 숨으라고 하면 됩니다. 싸움이 재개되는 순간, 다시 움직이면 그뿐이지요.”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좋은데.”
문제는 빙궁의 자존심이다.
그들은 천마신교와 손을 잡으며 많은 부분을 참고 있었다. 물론 두 집단 간의 화친은 수장들 간의 진심 어린 호의에서 비롯되었지만, 빙궁에는 빙궁 나름의 자존심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내 직인을 찍어서 보내. 절대로 마주하지 말라고. 만약 놈들이 빙궁을 공격할 생각이라면, 그때는 정말로 끝장을 보려고 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더 있나?”
“잠시,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호요성의 눈이 한없이 깊어졌다.
‘본교와 담사영 측의 싸움이 멈추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싸움이 다시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집단, 자연스레 힘의 공백을 노려 판을 뒤엎을 수 있는 집단은 오직 하나뿐이다.’
철혈성.
비록 신교나 담사영이 쥐고 있는 병력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하나, 철혈성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국(大局)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담사영이라면 알 것이다. 교주님께서 철혈성주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그가 취할 선택은 무엇인가?’
철혈성주를 작정하고 괴뢰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를 협박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철혈성주를 이용해서 철혈성 자체를 날려 버릴 생각을 할 것인가?
‘날려 버리진 못해. 담사영은 욕심이 많은 자다. 쓸 만한 병력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아. 나아가, 담사영은 당한 건 반드시 갚는 성격이다. 철혈성주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어떻게든 그를 쥐고 흔들 생각을 할 거다.’
호요성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담사영보다 먼저 철혈성주를 잡고 흔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때, 서량이 입을 열었다.
“이것 하나는 확실하군.”
“예?”
“우리가 제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담사영 측보다 빨리 철혈성주를 만날 순 없어.”
호요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기랄, 그럼 차라리 철혈성주를 죽여 버리는 게 나을까? 내가 직접 가?”
과격한 말이지만, 그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의 수장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적이 쓸 만한 패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위험이 큽니다. 교주님의 안위도 안위지만, 만일 담사영 측에서 이쪽이 철혈성주를 죽인 걸 알고 철혈성을 움직인다면, 송금백이라는 희대의 고수는 없어도 사파 연맹이라는 막강한 병력이 본교를 향해 칼을 겨누게 될 겁니다.”
“그렇겠군.”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천룡궁주 대가리 한번 훑었다고 일이 너무 커져 버렸구만.”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교주님께서는 하실 일을 하신 겁니다.”
“젠장.”
“다만…….”
호요성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다만 말입니다.”
그의 머릿속엔 아까부터 떠올린 계획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너무 희박했다.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게 되면 신교가 제대로 독박을 쓰게 될 것이다.
‘철혈성의 개입을 막거나 해체시킬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철혈성을 이용해 상대를 밀어붙일 방도를 궁리해야 해.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여야만 해.’
그때였다.
“총군사.”
“예?”
“차라리 이건 어때?”
서량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꺼내 들었다.
“철혈성에 분란을 조장해 버리는 거다.”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저도 방금까지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실패하면 여러모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커질 테지.”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서량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일, 뭐 하나 승률이 높았던 게 있었던가?”
“예.”
“…….”
“있었어요, 제법 여럿…….”
“시끄러워!”
“커험!”
“어쨌든,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야지. 실패했을 때 불어닥칠 후폭풍을 걱정할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이는 게 낫다고 본다.”
호요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진짜 위험합니다. 이유인즉, 우리 쪽 인물을 단 하나도 투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아가는 정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철혈성을 조종하려면…….”
“무슨 소리야?”
“……예?”
“우리 쪽 인물은 아니어도, 나랑 연이 닿은 사람이 있잖아? 작정하면 철혈성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정을 누구보다 빨리 우리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순간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지요. 그런 사람이 있었지요. 제가 왜 잊고 있었을까요?”
“클클.”
“아예 그 사람을 전령으로 삼아도 되겠는데요?”
“그건 무리야. 그 녀석, 나와 인연이 있을 뿐 내 수하는 아니니까. 게다가 한 문파를 다스리는 처지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빛이 보이는군요.”
“그렇지.”
서량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오문에 연락해. 지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