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마(魔)의 미학 (5)
번석(樊席)은 화들짝 놀랐다.
“뭐, 뭐라고? 소성주가!”
“그렇습니다.”
“아니, 장로회는 어찌하고 소성주를 보냈단 말이냐!”
상효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것이, 소성주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성주님께서 대리직을 맡기셨다고…….”
“뭣이?!”
“워낙 강하게 주장하시니 저희로서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번석은 황당함에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말의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소성주를 철혈성을 대표해 마교주와 독대하는 자리로 보내다니? 이게 제정신이란 말인가?
“이런 미친……! 그런 일이 있으면 곧장 수석장로인 내게 올 것이지 어찌하여 소성주에게 먼저 알렸단 말이냐!”
“정보단원이 성주전에 들어 보고를 드리려 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계시던 소성주께서 성주 대리 자격을 내세우셨는지라…….”
번석은 기가 막혔다.
물론 소성주가 간덩이 크게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제아무리 소성주라도 성주님께 직접 대리직을 수여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 즉참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절차라는 것이 있다. 마교의 교주를 만나러 가는 자리라면, 일단 회의부터 열어서 상대가 무엇 때문에 연락을 취했는지, 만나서 어떤 식으로 대응할 것인지 등 최소한의 계획을 세웠어야만 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축하연을 한다고 장로들이 전부 빠진 시기에……!”
어제 그의 팔순 잔치를 했었다. 장로회의 모든 장로와 원로들이 자리에 참석했다. 성주님께선 원체 그런 일에 무덤덤한 분이신지라, 닷새 전 선물과 함께 알아서 자리를 마련하라는 언질 한 번 주신 게 전부였다.
우연과 우연의 연속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축하연이고 뭐고 곧장 회의를 소집했을 것이다.
“황 군사는? 황 군사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왜? 설마 따로 바쁜 일이라도 있다고 하던가?”
“현재 정신을 잃은 상황입니다.”
“……뭐?”
상효가 입술을 깨물었다.
“심각한 내상에 오른팔이 부러졌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대체 어떤 놈이 군사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더냐?!”
“…….”
“왜 대답을 못 해!”
“흉수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그런데?”
“……황 군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인물이 소성주님이라고 합니다.”
끝내주는군.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는 팔순 선물이다. 번석은 이런 무시무시한 생일 선물을 받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 *
드넓은 포양호가 보이는 화려한 주루 꼭대기.
일 층에서부터 꼭대기 바로 밑 사 층까지, 총 백여 명의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기세가 어찌나 살벌한지 주루 주인은 물론 숙수와 점소이들까지 오들오들 떨기 바빴다.
당연히 손님은 그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오늘 이곳에서 강호의 거인들이 만나니, 자리를 비워 달라는 하오문의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무시무시한 검귀들이 찾아올 줄이야.
“루, 루주님.”
“왜?”
“철혈성의 무사들은 원래 이렇게 살벌한가요?”
“쉿! 이놈아! 그 입 다물어! 듣겠다! 무림인들 귀가 얼마나 밝은지도 모른단 말이냐!”
“헉! 옙!”
루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오늘 별일이 터지진 않겠지?’
그는 이런 일에 몹시 능했다.
마교주와 철혈성주 정도의 거물은 처음이었지만, 강호에서 나름대로 난다긴다하는 이들의 모임 장소로 주루를 내어 준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가슴이 두근거린 적은 없었다.
강호 최고 거물들이라서가 아니었다. 각층 별로 자리한 검귀들의 예기와 살기가 너무도 지독해서 그렇다.
‘엄청나구나!’
지금껏 이렇게 살벌한 검귀들은 본 적이 없었다.
괜히 철혈성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헉!”
“이 새끼야! 또 왜 그래?!”
“저, 저기!”
“커헉!”
크르릉.
열린 문 너머에 거대한 호랑이와 그 위에 탄 거구의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 좌측 앞, 강단 넘치는 외모를 한 삼십 대 검사 한 명도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 온다.
거구의 사내나 삼십 대 검사나, 이곳에 자리 잡은 검귀들처럼 살벌한 기세를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호랑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일대의 공기가 퍽퍽해지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세상에 호환이 마마만큼이나 무섭다고들 하지만, 저런 규격 외의 범이라면 마마도 놀라 달아날 것 같았다.
루주가 침을 삼켰다.
“문 더 활짝 열어라.”
“…….”
“이 자식아! 내 말 안 들려?!”
“헉! 예, 예?”
“문 활짝 열라고!”
“서, 설마 저 사람들이?”
“그래, 천마신교에서 오시는 분들이다.”
염왕이수에 대한 소문은 귀가 닳도록 들어 본 루주였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루주가 재차 침을 꼴깍 삼켰다.
‘저 호랑이 위에 탄 사람이?!’
그때였다.
크허헝!
호왕의 우렁찬 포효에 루주는 그대로 졸도해 버렸다.
“헉! 루, 루주님! 루주님!”
주르륵.
순간 당황하여 루주를 흔들고 있지만 점소이의 하의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호왕 딴에는 가벼운 포효였지만, 그 포효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氣)가 깃들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만한 기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천연의 기운이었다.
“이놈아, 진정해라.”
크르릉.
호수에 이는 바람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걸까? 호왕은 연신 목을 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호왕의 등에서 내린 서량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뭐야, 이 잡스러운 기운은?”
주루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검객의 예기와 살기가 범벅이 된 기묘한 기운.
범부의 눈에는 오줌을 지릴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겠지만, 오히려 고수에게는 조금 어설프게 느껴지는 기였다.
본디 기(氣)라는 것은 일정 이상의 농도로 쌓이면 스스로 갈무리되어 한 차례 변화를 꾀하게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농도를 불려 질적 향상을 이루는 것을 내가고수(內家高手)로서의 경지가 올라간다고 표현한다.
즉, 주루에서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저곳에 거하는 검객들의 수준은 절대 높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하나같이 절정고수라 불릴 만은 하나, 강호 최고의 거물 중 하나가 데리고 다닐 만한 수준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주는 아직 안 온 건가?”
이미 주루에 몇 명이 있는지, 그들의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인지를 한눈에 꿰뚫어 본 그였다.
그것은 마동필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올라가시지요.”
“그럴까.”
저 안에 천마군 정도의 병력이 숨어 있다면 모를까, 저 정도 고수들로는 서량의 옷깃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설령 싸움이 벌어져도 마동필의 검 아래 모조리 고혼(孤魂)이 될 것이다.
“넌 여기에서 콧바람이나 쐬고 있어라.”
크르릉.
호숫가를 스치고 불어오는 바람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호왕은 눈을 감고 연신 바람을 음미했다.
피식 웃던 서량이 이내 주루로 들어섰다. 그의 어깨에는 솜털 가득한 금호가 앉아 있었다.
훅.
주루 일 층으로 들어서자마자 검객들의 시선이 몽땅 서량에게로 향했다.
척.
책임자로 보이는 검객이 일어나 다가왔다.
“천마신교의 교주님이시오?”
마동필의 눈이 깊어졌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교주님이시다. 한데 너희 성주는 어디에 있냐? 아직 안 온 거냐?”
“최상층에 계시오.”
“뭐?”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걸리는 기감이 없는데? 송 성주의 기파는 내 분명 기억하고 있거늘.”
“올라가시면 되오.”
“그래?”
서량이 고개를 연신 갸웃거렷다.
“거 신기하네. 약해져 보이는 새로운 무공이라도 익힌 거야, 뭐야?”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애초에 존재감이나 생기(生氣)부터가 송금백과는 달랐다.
서량이 계단으로 올라섰다.
그때, 책임자가 마동필을 잡았다.
“당신은 우리와…….”
터억!
“컥!”
마동필의 손이 책임자의 목을 잡아 올렸다.
차차차차창!
일 층 검객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마동필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감히 교주님께 건방진 말을 뱉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죽을죄였다. 교주님께서 그냥 넘어가시니 애써 분을 삭였거늘, 이따위로 나온다면 마동필로서도 참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버러지들이.”
화아아악!
자신만만하던 검객들의 얼굴이 모조리 창백해졌다.
화르르르륵!
마동필의 발밑에서 무시무시한 불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유마화였다. 이제 마동필의 구유마화는 드러내 퍼트리는 기파만으로도 공격이라 불릴 만큼 지독해서, 검객들은 검을 휘두를 생각은커녕 맞서 싸울 의지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이 층으로 올라선 서량이 말했다.
“동필아. 화 죽여라.”
“……예, 교주님.”
후욱.
파멸적인 살기로 꽉 찼던 주루 일 층이 다시 예전과 같은 평화를 되찾았다.
서량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제도 모르는 얼치기들한테 일일이 화내려 들지 마. 괜히 너만 피곤해진다.”
“알겠습니다.”
“어여 올라와.”
“예.”
두 사람이 최상층으로 오르기까지, 누구도 둘을 쳐다보지 못했다.
조금 전 마동필이 보여 준 기파는 그 자체로 무적의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그들의 숫자가 두 배, 세 배가 더 있다 해도 이긴다고 장담키 힘든 엄청난 고수인 것이다.
이윽고, 두 사람이 최상층에 올랐다.
“어허?”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로군.”
“오셨소?”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던 삼십 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이름이……?”
“환야.”
환야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환야라고 하오. 철혈성의 소성주요.”
“아,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얼굴은 본 적이 있지만 직접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살왕 시절에도 환야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송금백이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다.
교주위에 오르고 나서야 그 이름을 알게 된 철혈성주의 후계자, 환야.
소위 직함, 위치에 따른 격이라고 한다면야 천마신교의 교주와 대면하기에 부족함은 없지만, 이 자리는 송금백과 만나는 자리였다. 환야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 성주는?”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환야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곧 환야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부님께서는 오지 않으셨소.”
“음?”
“사부님 대리로 내가 왔소. 내가 성주 대리요.”
서량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성주 대리로 오셨다?”
“그렇소.”
환야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나는 대(大) 철혈성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이자 조만간 성주의 위에 오를 사람이오. 천마신교의 교주와 마주함에 있어 한 점 부족함이 없음을 자신하오.”
대단한 기세였다.
적어도 이 순간, 환야의 몸에서 흐르는 장중한 기도는 능히 일대종사의 그것과 같았다. 오죽하면 서량의 뒤에 선 마동필의 얼굴에도 뜻밖이라는 기색이 어릴 정도였다.
서량의 눈에 흥미가 일었다.
“그때와는 많이 다르군. 많이 노력했나 보이. 성취가 꽤 늘었어.”
환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비록 자신에게 심마를 안겨 준 사람이었지만, 그는 서량이라는 마인의 위대함 자체는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칭찬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서량이 싱긋 웃었다.
“그래, 아직 그 무공이 송 성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름의 준비는 된 것 같구만.”
“그리 봐 주어 고맙소이다.”
“고맙기는? 그저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마동필은 내심 의아하여 서량을 보았다.
그가 보기에, 환야가 이룬 무공은 진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환야의 중단전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의 무(武)를 이룬 것 자체가 기적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래성과 같은 무공이기도 했다.
자신이 꿰뚫어 보는 것을 교주님께서 보지 못하셨을 리가 없다. 한데 어찌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성주를 대리한다……. 그래, 그거 좋지. 시대는 항상 새로운 바람을 원하기 마련이야. 자, 그럼 나와 함께 새 시대를 위한 얘기를 나눠 볼까?”
환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바라던 바요.”
“허허, 아주 호탕하군.”
서량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어렸다.
“오늘 이 자리, 아주 유쾌한 자리가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