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마(魔)의 미학 (7)
[교주님.]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마왕령이 빙궁 병력과 함께 산동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적들은 전부 섬멸하였다는 보고입니다. 추가로, 마왕령의 피해는 전무(全無)하며 빙궁 측에서 열두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합니다.]
빙궁 쪽 사상자라?
‘같이 싸웠나 보군.’
겉으로는 틱틱 쏘아붙이곤 했지만, 위홍련을 향한 서량의 신뢰는 호요성 못지않았다.
위홍련은 쓸데없는 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만큼 휘하 병력을 아끼기에, 어지간해선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싸움은 벌이지 않는다.
아마 빙궁 측에서 추가적으로 공세를 가한 모양이었다.
‘참기 어려웠겠지.’
북해빙궁은 새외 무림에서도 제일가는 세력이었다.
말하자면 그 나름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천마신교와 연수하며 지금껏 그 강한 자존심을 접고 있었지만, 적들의 추적에 열이 받을 대로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열둘이면 나쁘지 않아.’
사천에서부터 섬서, 하남에 이르기까지 치솟는 울분을 얼마나 오랫동안 꾹꾹 누르고만 있었겠는가. 이번 싸움에서, 쌓이고 쌓인 울화를 작정하고 풀었을 것이다.
‘이번 일로 더 성장하길 바란다.’
여강휘는 천재다. 무공만이 아니라 한 단체의 수장으로서 충분한 역량을 가진 사내였다.
다만, 이처럼 누군가에게 쫓겨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평상시처럼 냉정하게 대응하긴 어려웠을 터.
사람은, 특히 누군가를 부리는 자는 경험이 많아야 한다. 서량은 이번 사태로 인해 여강휘가 한층 더 성장하기를 바랐다.
“왜 그러시오?”
“음?”
서량이 환야를 보았다.
환야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엿보였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상대에게 화가 난 것이다.
‘재미있군.’
이건 어려도 너무 어리다.
환야에게 있어 서량은 무공으로도, 위치로도 비빌 만한 상대가 아니다. 소성주라는 직책은 천마신교 교주 앞에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을 정도, 딱 그 정도의 격을 갖춘 자리인 것이다.
한데 어려워하진 못할망정 대놓고 불쾌감을 표출하다니?
‘완전히 망가져 버렸단 말이지?’
서량의 미소가 진해졌다.
‘생각보다 더 유쾌한 전개가 되겠는데.’
처음에는 이놈에게 사령수를 시전하려 했다. 완전히 꼭두각시를 만들어 철혈성 내에 분란을 조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몇 마디 대화 후, 그 생각을 접었다.
‘어쩌면 이미 철혈성에 난리가 났을 수도 있겠어.’
서량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나 정도 위치가 되면 온갖 사소한 정보들이 들어오기 마련이거든.”
“아니오.”
아니라고 말하지만 누가 봐도 빈말임을 알 수 있었다. 상대가 미안하다고 하니, 환야의 얼굴에 드리워진 불쾌감이 더더욱 커졌다.
서량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 정도도 이해를 못 해 주어서야 어찌 한 단체의 수장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자네의 이해심이 누구 못지않음을 믿는다네.”
환야가 멈칫했다.
제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서량의 마안 속에 드리워진 파멸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환야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상대는 사부님과 함께 천하제일을 논하는 무적의 고수였다. 그런 사람 앞에서 표정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했다니,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일이란 말인가.
환야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근래 심기가 뒤틀리는 일이 많아 못난 모습을 보였소. 용서해 주시오.”
서량이 활짝 웃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순순히 사과할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송 성주가 사람 보는 눈은 있군.”
엄한 질책 이후, 살살 달래는 칭찬이다.
환야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빛이 어렸다.
‘확실해.’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이놈, 성주를 대리할 만한 자격이 없어. 아무리 철혈성이 썩었다 한들, 신교의 교주가 보자고 한 자리에 이런 어설픈 놈을 내보낼 정도로 썩지는 않았겠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독단적인 행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최소한 호위라도 데리고 와야 했다. 하지만 데리고 온 병력이라곤 어설픈 검수들뿐이니.’
확실히 서량도 보통은 아니었다.
서량은 한 단체의 수장으로서 충분히 불쾌감을 표할 수 있었다. 자신과 격이 맞지 않은 자를 보냈으니, 철혈성을 상대로 유감을 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존심보다 우선하는 것. 그것은 최종적인 승리다. 고작 이런 일에 일일이 화를 내며 자리를 엎어 버리기에는, 지금껏 그가 걸어왔던 가시밭길이 지나치게 험했다.
“그나저나, 교주께서 하실 말씀이 무엇이기에 본성에 연락을 취한 것이오?”
그냥 송금백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고 했지.
서량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송 성주와는 나름의 친분이 있지. 해서 그와 손을 잡고 강호의 미래를 바꿔 볼 생각이었다네. 한데 그가 나오지 않았으니, 오늘은 그저 술이나 한잔하고 자리를 파하는 것이 좋겠어.”
환야의 눈이 깊어졌다.
“괜찮소. 하고자 했던 말씀을 하셔도 좋소. 나는 성주 대리니까.”
“나는 송 성주를 만날 거라 생각했지, 자네가 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제아무리 자네에게 자격이 있다 한들, 이런 얘기는 성주에게 직접 하는 게 옳지.”
“그렇지 않소.”
환야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성주 대리라는 것은, 잠시나마 내가 철혈성을 다스린다는 뜻과 같소. 만일 사부님께서 이대로 은퇴를 생각하신다면, 지금부터 평생 내가 철혈성을 통치하게 된다는 말이오.”
“오호?”
“그러니 나를 성주로 대해 주시오.”
몸이 달았군.
서량의 웃음이 묘해졌다.
‘이놈,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군.’
중단전이 황폐해지고 상단전까지 뒤집혔다.
결코 정상이 아니지만, 천재적인 재능과 고차원적인 무공을 익히며 단련된 정신력으로 심신이 무너지는 걸 버티고 있다.
성품은 무너졌지만 최소한의 상식은 남아 있다. 언뜻 막 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훗날을 걱정하는 것 같다. 서량은 환야의 반응에서 그의 현재와 과거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시오.”
“자네, 철혈성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나?”
환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오?”
“이유 따위는 궁금해하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하게. 자네, 철혈성의 고수들에게서 충성을 받고 있나? 자네의 위치를 노리는 사람도 없고, 자네의 명령이라면 장로들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움직일 거냔 말일세.”
“……그렇소.”
“다시 말하네. 솔직하게 대답하게.”
환야의 얼굴에 옅은 혼란이 일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오.”
서량이 씨익 웃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네. 아, 그렇다고 자네가 못났다는 뜻은 아니야. 보통 세대가 교체되면 권력을 쥐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놈들이 많아지는 법이지.”
“그건 그렇소.”
환야는 황곤을 떠올렸다.
황곤은 지나치게 욕심이 많은 자였다. 적어도 환야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사부님 옆에 앉아서 그분의 눈을 흐리게 하고, 약해 빠진 주제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휘둘렀다. 환야는 그런 황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실히 그렇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하지 않소? 능력도 없는 주제에 돈과 권력에 맛을 들인 놈들은 모조리 정리해 버려야 옳소이다.”
“맞는 말일세. 실로 맞는 말이야.”
쿵.
서량이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기실, 나 역시 송 성주와 대화하며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네. 그는 강하고 뛰어난 인물이지만, 욕심이 너무 없고 생각 자체가 편협한 감이 있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말일세.”
“으음.”
적대 세력의 수장이 사부를 두고 악담을 늘어놓고 있다.
제자라면 마땅히 화를 내야 정상이었다. 한데도 환야는 침음할 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서량은 확신했다.
제정신이 맞고 아니고를 떠나, 이놈은 권력을 위해선 제 부모 형제도 죽일 수 있는 놈이다. 애초에 천성이 그러했을 것이다.
다만 그 천성을 올바르게 키우면 야심 많은 효웅이 되었을 것이요, 지금처럼 엇나가면 권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폭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량은, 폭군의 자질을 갖추게 된 환야가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본교는 철혈성을 없앨 수 없어. 철혈성 역시 본교를 없앨 수 없고. 그렇다며 차라리, 마음 맞는 군주들끼리 손을 모아 천하를 갈라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서량이 싱긋 웃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위험천만한 얘기다.
환야 앞에서 할 얘기가 아니었다. 자칫 상대에게 경각심을 심어 줄 수도 있으니까.
“그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 하나 자네의 무공이 한층 더 성장하고, 철혈성을 완전히 휘어잡을 수 있게 되면 그것도 꿈은 아니야.”
서량이 서늘하게 웃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알 거 아닌가? 본교는 이미 중원 남부를 통째로 먹었어.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천하의 칠 할을 먹는 것도 어렵지 않아.”
환야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귀교에 그만한 힘이 있다면, 왜 굳이 본성과 천하를 나누려 하시오?”
제법 합리적인 질문이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본교의 근본은 종교일세. 설령 천하를 일통한다 한들, 천하 만민에게 본교의 교리를 품에 안으라 강제할 수 없는 노릇이지.”
“음.”
“즉, 자네들이 실질적으로 천하를 통치하고 우리가 교권(敎權)을 가져가면 되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적어도 이번 세대에 한해서만큼은 배신도 할 수 없는 예쁜 그림이 나올 수 있지.”
“……!!”
“어떤가? 이제 좀 흥미가 가나?”
흥미가 가는 정도가 아니다.
지금의 환야에게 서량의 제안은 극도로 매혹적이었다. 성내에선 아무에게도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그에게, 무려 천마신교의 교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천하를 나눠 가지자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짜릿했다.
미래를 상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부조차도 이루지 못했던 대업을 자신의 대에서 이룰 생각을 하니 벌써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자네가 철혈성을 완전히 좌우한 이후의 얘기가 될 걸세. 해서 묻겠네. 자네, 성내의 지지 기반이 얼마나 되나?”
환야가 헛기침을 했다.
“삼 할……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거요.”
“호오, 삼 할이라?”
삼 할은커녕 삼 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곳 주루에 데리고 온 병력, 그것이 그가 가진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량이 은근슬쩍 말했다.
“삼 할이면 많지도, 적지도 않구만. 하면 지금 자네에게 가장 큰 적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장로회.”
환야는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회요. 사부님이 안 계신다면, 그들이 본성의 권력을 쥐고 흔들 테니까.”
“장로회라…… 그렇구먼.”
서량이 씨익 웃었다.
“하면 내가 자네에게 장로회를 와해시킬 힘을 쥐여 주면, 언제쯤 철혈성을 자네 휘하에 둘 수 있겠는가?”
환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와해시킬 힘이라니?”
“뭘 그리 놀라나? 함께 손잡고 천하를 도모해야 할 인재인데, 지지 기반 확실한 내가 먼저 도움을 줘야지. 그래야 자네도 훗날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아닌가?”
환야의 얼굴에 흥분이 어렸다.
“그, 그렇군. 교주의 말씀이 맞소.”
“그래, 그렇지.”
서량의 안광 깊숙한 곳에서 사이한 흉성이 번들거렸다.
“어떻게 할 텐가? 병력을 붙여 줄꼬? 아니면 나를 성으로 인도할 텐가? 입맛대로 골라 보시게.”
마(魔)는 곧 욕망이다.
마를 등에 지고 사는 사람은 본인의 욕망에 충실하며, 마의 극치를 이룬 자는 타인의 욕망조차도 좌우할 수 있다.
천마신교 특작 부대 마왕령의 수장 위홍련, 임무를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자.
천마신교 최고 권력자인 교주 서량, 대국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고 타인의 욕망을 휘둘러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는 자.
두 남녀가 품에 안은 마(魔)가, 마도(魔道) 본연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마가 집어삼킨 존재들로 인해, 천하의 판도가 다시 뒤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