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534화 (533/774)

534화. 이빨 빠진 사자의 회한 (2)

“허어.”

“……죄송합니다.”

여강휘가 고개를 숙였다.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마왕령의 힘으로도 충분히 적들을 분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꾹꾹 참아 왔던 분노가 적의 피를 보는 순간 폭발해 버렸다. 그래서 싸움을 벌였고, 열두 명의 사상자가 나 버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랬구나.”

여극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에 이런 말이 있다더라.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면 된다. 네가 충분히 반성하고 있거늘, 내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괜찮다.”

“아버지.”

“기억하거라. 나는 네가 내 아들이라서 소궁주로 삼은 것이 아니다. 너의 재능과 성품이 빙궁의 주인으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것이야.”

“…….”

“아랫사람들과 더 친해지거라. 그들을 더 가까이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라. 하여 그들 하나하나를 너의 심장처럼 여겨야만 한다.”

여극도가 미소를 지었다.

“휘하 사람들을 진정 내 가족처럼 여길 수 있을 때, 수장으로서의 무모함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간의 여로에 고생이 많았다. 이만 들어가 쉬거라.”

“예.”

여강휘가 나가자 여극도는 눈을 감았다.

‘강휘의 가슴 속에는 누구 못지않은 혈기가 끓어오르고 있다. 그간 어떤 수련을 했는지 무공이 성장하고 특유의 오만함도 줄었지만, 아직 더 배울 게 많아.’

훗날 녀석의 마음이 안정되면, 따끔하게 혼낸 후 더 많은 가르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옆에서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털고 일어날 거예요.”

여극도가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있었다.

“오라버니의 최고 장점은 유연함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오라버니를 믿어요.”

“오냐. 나 역시 강휘를 믿는다.”

여상린이 싱긋 웃었다.

여극도의 눈이 반짝였다.

“그나저나, 그간 열심히 수련시켜 준 보람이 있구나. 지금 너만 한 경지라면 성장이 더뎌야 정상이거늘, 또 무언가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것이냐?”

“깨달음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공부죠, 공부.”

“허허허.”

여상린은 예전에도 아름다운 외모로 사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지금의 여상린은 더했다. 무공의 경지가 상승하여 백옥 같던 피부가 더더욱 고와졌고, 깊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수련 덕에 차분함까지 얻었다.

그야말로 지상에 현신한 북쪽 하늘의 선녀가 따로 없었다. 여극도는 자신이 자식 농사 하나는 제대로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머문 지가 꽤 오래되어서 그런지, 이제 산동의 바람도 제법 맡아 볼 만하구나.”

빙궁 병력이 감숙을 지나 사천으로 진입했을 무렵.

여극도는 극소수의 병력만을 데리고 철저하게 은신하여 산동으로 들어왔다.

담사영과 단리후는 생각했다. 한 단체의 수장이, 여극도씩이나 되는 사람이 설마 중원에 병력을 파견해 놓고 따로 움직였을 리가 없다고.

틀렸다.

여극도는 산동, 그것도 멸문한 황보세가 인근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상린을 가르치며 자신의 무공을 완벽하게 회복해 두었다.

이제야 진정 북해제(北海帝)라는 별호에 걸맞은 무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산동의 바람이 좋다지만, 고향의 공기만큼 좋진 않죠?”

“그거야 당연하지. 다만, 이런 생각도 든다.”

여극도가 짓궂게 웃었다.

“중원 공기가 나쁘지 않으니, 내 딸내미의 남편감은 중원인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

여상린이 툴툴거렸다.

“저 아직 혼인할 생각 없거든요?”

“네 나이를 생각하거라.”

“그런 식이면 오라버니 먼저 보내야죠.”

“강휘는 아직 배울 게 많지 않으냐? 물론 녀석이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데려온다면야 대환영이지만 말이다.”

“저도 배울 거 많아요.”

“강휘가 배워야 할 것은 궁주로서의 자세나 수장으로서 갖춰야 할 품격 같은 것들이다. 강휘나 너나, 내게 무공을 더 배울 필요는 없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통해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 됐다고요.”

“서 교주는 어떠하냐?”

여상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겹지도 않으세요? 오늘로 벌써 일흔두 번째예요.”

“그걸 일일이 세어 봤느냐?”

“일일이 세어 보게 만든 아버지의 집요함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흠.”

여극도가 턱을 쓰다듬었다.

“좋다, 지금껏 떠보기만 했으니 이제는 좀 진지하게 물어보마.”

“그냥 안 물어보셔도 되는데…….”

“서 교주가 싫으냐?”

여상린이 입맛을 다셨다.

“누가 싫대요?”

“하면? 사내로서 매력이 없는 것이냐?”

“뭐…… 그것도 아니지만요.”

오히려 사내로서의 매력은 철철 넘쳐흐른다. 키가 거의 칠 척에 달할 정도요, 언행에 거침이 없는 와중에도 생각이 깊다.

소위 세상이 말하는 남자다움이라는 측면에서 서량은 고득점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대놓고 물어보마. 이성으로서, 서 교주는 어떠하냐?”

“……매력적인 사람이죠.”

“됐네, 그럼.”

“안 됐어요!”

여상린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래요, 그 사람 인물도 훤하고 능력도 좋아요. 무공도 강하고 사내답죠. 생각도 깊고, 자기 사람은 끔찍이 위해요. 가끔 위험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오히려 순한 편이죠.”

“그런데?”

“잘난 사람이 있다고 꼭 그와 혼인을 하고 싶어지는 건 아니에요.”

여극도가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눠 보니, 확실히 여상린은 혼인에 뜻이 없는 것 같았다.

“커험, 아쉽구나.”

“전혀 아쉽지 않거든요? 저는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쩝, 이렇게 된 이상 강휘를 노려봐야 하나…….”

“그렇게 저희를 보내 버리고 싶으세요?”

“너도 자식 낳고 내 나이 되어 봐라. 이 애비도 영 예전 같지가 않아. 하루빨리 손주를 보고 싶단 말이다.”

“휴.”

“어쨌든 아직 혼인 생각이 없다는 말은, 언젠가는 하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네, 마음 맞는 사람이 나타난다면요.”

“그 사람이 바로 서 교주일 수 있잖아?”

“아, 모른다고요!”

여상린은 기어이 성을 냈다.

여극도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먼저 북극의 별로 올라간 아내를 봐서라도 이것들을 빨리 보내 버리고 싶은데, 어째 영 협조해 주질 않는다.

“남녀가 수개월 동안 함께 중원을 종횡했으면 애틋한 감정이 생길 만도 한데.”

여극도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다.”

“또 왜요.”

“둘만 남았을 때는 없었느냐? 서 교주가 이렇게 음…… 뭐랄까, 술을 많이 마셨다든가 해서 너에게 좀 그런 시선을…….”

우우우웅.

여상린의 손에서 백색의 진기가 치솟았다.

여극도는 움찔했다.

“농담이다. 아니, 농담이라기보다는 만일 서 교주가 그런 무도한 인물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연수를 끊고 신교를 박살 내려고…….”

“됐어요. 됐다고요.”

“……알았다.”

오늘부로 확실히 알았다.

딸내미도 나이 좀 먹더니 먼저 간 아내처럼 아주 매서워질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애비를 노려보는 저 눈깔이 아내와 판박이였다.

여극도는 주제를 바꾸었다.

“그럼 궁에는 언제 돌아갈 생각이냐?”

“네?”

“……?”

“……??”

“언제 북해로 갈 생각이냐고 물었다만.”

여상린이 눈을 끔뻑였다.

“북해로 돌아가야 하나요?”

“신랑감을 찾는 것도 아니요, 중원 전체에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거늘 굳이 여기에 더 머물 이유가 있느냐? 무공도 그 정도면 얼추 완성되었겠다,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어…….”

그 똑똑한 여상린도 지금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아버지 말씀이 맞기는 맞다. 그녀가 중원에 남아서 할 일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을 거듭하던 여상린이 웃으며 말했다.

“뭐, 아버지께서 가실 때 같이 돌아가면 되죠.”

“뭐 하러?”

“저도 나름 한몫을 해낼 만한 고수가 되었는데, 서 교주가 아버지께 뭔가를 부탁하면 저도 한 손 거들어야죠.”

“서 교주가 내게 뭔가를 부탁한다는 건 거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위협이 있다는 거다. 네가 아무리 강해졌다 한들 천위(天位)에 이르지 못한 무공으로는 안심이 안 된다.”

“무공이 아니면 머리로라도 힘을 보태 드릴게요. 진짜로요. 저 그 정도 능력은 있다니까요?”

“흐음.”

여극도는 괜스레 껄끄러웠다.

생각해 보면 산동에서 딸내미를 가르친 것 역시 전적으로 딸의 의지였다. 덕분에 크게 성장하긴 했지만, 굳이 이곳에서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녀석, 중원이 그렇게 마음에 드나?’

하긴, 옛날에도 그렇게 여행 다니길 좋아했던 아이였다. 중원 나들이랍시고 나왔다가 무도하기 짝이 없는 야수궁 놈들에게 인질로 잡힌 적도 있지 않았던가.

“좋다. 그럼 이번 중원행을 끝으로 북해로 돌아가도록 하자.”

“네.”

아쉬움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점점 딸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생각에 어지럼증마저 느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버지!”

저 멀리서 여강휘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마왕령주가 돌아왔습니다!”

여극도의 눈이 번뜩였다.

여강휘와 함께 산동으로 진입했던 마왕령은, 뭐 그리 급한 일이 있는지 곧장 사천으로 향했었다. 여강휘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을 생각하면 그사이에 적어도 하남 중부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그 먼 거리를 갔던 자들이 다시 돌아왔다고? 왜?

‘심상치 않군.’

잠시 후, 위홍련이 나타났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음, 반갑네. 일전에 한 번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습니다.”

“그래, 어인 일로 돌아오셨는가?”

“본교에서 지급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위홍련이 여극도에게 서신을 건넸다.

딸을 아끼는 푼수 아버지에서, 위엄 넘치는 북해의 제왕으로 변모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머리를 쳐라…….”

위홍련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다니?”

“궁주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저희야 삼생의 영광입니다만, 그러고 싶지 않으시다면 이곳에 계셔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여극도가 피식 웃었다.

“이보게, 위 령주. 본궁과 신교는 연합 관계일세.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주어야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야 쓰겠는가?”

지금껏 천마신교가 빙궁을 좌우한 것 같지만, 기실 여극도 입장에서는 오히려 빙궁이 큰 은혜를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량 덕분에 궁주인 자신이 살았고, 무도한 야수궁 놈들에게서 딸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아들이 크게 성장했다.

말하자면 서량 덕분에 가족이 살았고, 나아가 빙궁이 혼란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야 백 번, 천 번도 더 도와줄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출발토록 하세나.”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리고…….”

여극도가 여상린을 보았다.

여상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하겠단 뜻이었다.

“오라버니와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오라버니는 이미 스스로의 싸움을 완수한 후 이곳에 왔어요. 이제는 아버지가 싸우셔야 할 때죠.”

“그렇지.”

“부모가 위험한 길을 가는데, 자식이라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여극도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 같아선 여상린을 놓고 가고 싶었지만, 반대로 딸내미의 이 당찬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것은 여극도가 천하에 다시없을 강자이기에 품을 수 있는 감정이기도 했다.

“좋다, 함께 가자.”

여상린의 얼굴이 더없이 밝아졌다.

“네!”

닷새 후.

북해의 제왕과 마왕령이 철혈성의 영역, 강서성으로 진입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