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화. 이빨 빠진 사자의 회한 (4)
번석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환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냐니?”
“우리와 아무런 상의도 거치지 않고 성주 대리라는 명목으로 마교주를 만나러 가다니! 진정 미치기라도 한 것이오?!”
“뭐라?”
츠츠츠츠.
환야의 몸에서 무서운 살기가 일었다.
서량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좋구먼.’
시작부터 화끈하기 이를 데 없다. 서량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그 대치를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수석장로라지만 언사를 똑바로 하시오. 나는 철혈성주 송금백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이며, 차후 철혈성의 일인자가 되어 그대들의 위에 설 몸이오.”
번석의 노안에 섬뜩한 표정이 맺혔다.
“지금은 아니지.”
“호오?”
환야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지금은 아니니 성의 후계자에게 막말을 해도 된다? 장로들의 우두머리라는 분이 예의는 어디다 팔아 드셨소? 나이가 드니, 이제는 성의 예법도 잊은 것이오?”
장로들의 얼굴에 노기가 피어올랐다.
“소성주!”
“말씀이 심하시오!”
“당장 수석장로에게 사과하시오!”
환야가 버럭 외쳤다.
“닥치시오! 내 아무리 돌발 행동을 했다 한들, 나는 후계자이고 당신들은 장로요! 위계에 그리 신경을 쓰는 그대들이 정작 소성주인나를 업신여기고 있거늘, 그대들이 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장로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철혈성의 최고 수뇌부라 하더라도 성의 후계자에게 막말을 하는 건 용납기 어려운 일이다.
환야가 음침하게 말했다.
“이거 안 되겠군. 사정을 설명하기에 앞서 그대들을 형당(刑堂)에 넘겨야겠어. 장로라는 것들이 윗사람 알기를 개똥으로 아니 성의 기강이 이 모양이지.”
형당은 철혈성의 형법을 관장하는 곳으로, 한 번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어지간해선 다시 나올 수 없는 지독한 곳이었다.
물론 장로씩이나 되는 이들이 말실수 좀 했다고 형당으로 끌려가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환야의 기세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들의 행태에 분노했고, 무리를 해서라도 그들을 형당에 처넣을 생각인 듯했다.
‘오오!’
환야의 뒷모습을 보는 서량의 얼굴에 흥미진진한 표정이 떠올랐다.
‘좀 하는데?’
이거, 생각보다 더 재미있다. 철혈성 내성을 둘러보는 것보다 천배는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서량은 흥미 가득한 얼굴로 그들의 다툼을 지켜보았다. 근래 재미없는 일투성이였는데, 오랜만에 볼만한 광경이 아닌가.
“으음!”
“커허험!”
분노와 놀라움, 일말의 걱정으로 장로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할 때였다.
“좋소. 갑시다.”
“뭐라?”
번석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다만 소성주도 함께 가야 할 것이외다. 성의 군사인 황곤을 공격한 데다가, 성의 규율을 싹 무시한 채 제멋대로 나가 버린 자에게 과연 후계자의 자격이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오.”
환야가 버럭 소리쳤다.
“나는 성주 대리다! 성주 대리라는 것은 사부님의 부재 시 내가 성주라는 뜻이다! 성주는 규율에서 자유롭다!”
“헛소리! 성주라고 규율에서 자유롭다는 말을 누가 했소이까! 성주라도 지켜야 할 규율과 법도가 있는 것이오!”
“개소리 작작 해!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그간 쌓이고 쌓인 분노가 그 순간 모조리 폭발해 버린 것 같았다. 환야의 두 눈에 붉은 진기가 치솟았다.
묵혈괴룡공이 발현된 것이다.
“좋다. 이 자리에서 너희 모두를 죽이고 내 직접 사부님께 여쭤볼 것이다. 내가 잘못한 건지, 너희 밥만 축내는 늙은것들이 잘못한 것인지!”
순간 번석은 주춤했다.
형당이니, 뭐니 할 때도 냉소적이었던 그였다. 상대는 소성주지만, 수석장로인 자신의 인망은 그를 한참이나 넘어서 있었다. 작정하고 정쟁을 벌이면 환야 따위는 상대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성주가 개입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멍청한 놈이!’
번석은 환야의 두 눈을 보았다.
무시무시한 살기와 묵혈괴룡의 기로 범벅이 된 그의 두 눈엔 실로 지독한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폐관에 들어간 송금백을 진심으로 불러들일 작정인 듯했다.
번석의 볼이 살짝 떨려 왔다.
‘그리되면 네놈도 무사치 못할 텐데?’
당연하다. 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가 절차를 무시하고 마교주를 만나러 갔다? 소성주가 아니라 누구라도 무사할 수 없다. 잘해야 무공 전폐에 뇌옥행일 것이다.
그러나.
‘……음.’
불쾌했지만, 지금은 일단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겠다.
팔순 잔치를 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팔순에 오른 달에 제사까지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좋소. 내 거친 언사에 대해선 사과하겠소.”
“흥! 꼴에 사부님은 무서운 모양이지? 당신들이 그리 간사하니 지금까지도 사부님께 인정을 못 받은 것이다.”
번석은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철혈성에는 성주 외에도 무상(武相)이 있고, 성주가 몰래 숨겨 둔 비밀스러운 전력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철혈성의 실질적인 이인자는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그릇도 작은 소성주 놈에게 모욕을 받고 있었다. 정말이지 보는 눈만 없었다면 당장 검을 뽑았을 것이다.
“일단은…….”
“시끄럽다.”
환야가 몸을 돌렸다.
“긴 여로에 피로가 쌓였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겠다. 각자 거처로 돌아가도록.”
성의 장로들을 싹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없었다. 그러나 환야의 광기 어린 눈빛과 기도가, 장로들의 두 발을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꽉 묶어 두었다.
환야의 뒤를 따르며 서량은 생각했다.
‘득의양양이 따로 없군.’
뒷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다. 환야는 난생처음으로 성의 장로들을 휘어잡은 것에 스스로 놀랐으며, 동시에 기뻐하고 있었다.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 나쁘지 않지.’
환야가 저런 식으로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서량 덕분이었다. 조만간 서량이 정적(政敵)들을 해치워 줄 테니, 무슨 건방을 떨어도 문제 될 게 없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들 앞에서 딱히 분노를 삭일 이유는 없으니까.
츠츠츠.
서량의 두 눈에 청홍의 마기가 스쳤다 사라졌다.
‘그래그래, 걱정 말고 나아가라. 네 정적은 내가 싹 잡아 죽여 줄 테니까.’
잠시 후.
“어땠소?”
방을 둘러보던 서량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뭐가?”
환야가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 노인네들 얼굴 봤소? 완전히 썩은 시궁창 같은 표정이었소. 하하! 병신 같은 놈들, 감히 철혈성의 차기 주인에게 그따위 막말이라니. 당장 죽여 달라 하고 싶은 걸 참았소이다.”
서량이 쓰게 웃었다.
“잘 참았다.”
이 말 외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반쯤 미쳐 버린 성정에 잘 참기도 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언제 그들을 부르면 되겠소이까?”
“천천히 하는 게 좋겠지.”
환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천천히라니? 당장 결딴을 내 버려야 하지 않겠소?”
“저 늙은이들은 지금쯤 한데 모여서 작당질을 하고 있을 거야. 아마 철혈성의 규율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널 축출할 방법을 논의하고 있겠지.”
“뭐, 뭐라고!”
쾅!
환야가 후려친 벽이 움푹 꺼졌다.
“놈들이 감히 날 축출한단 말이오?”
“귀 열고 똑바로 들어. 축출하는 게 아니라, 축출할 방법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그게 그거 아니오!”
“그래서, 축출당할 거냐?”
“절대로! 당신이 날 도와주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기다려. 놈들은 필시 많은 준비를 하고 널 찾아올 것이다. 진짜로 널 몰아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때 움직이겠지.”
“그러니 그 전에……!”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분명 널 찾아오겠지. 한데 그때 그놈들이 몽땅 죽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나?”
환야가 주춤했다.
“그, 글쎄? 아마 그간 세운 계획이 다 망가질 테니…….”
“성이 난장판이 되겠지. 아마 장로 외에 다른 수뇌부들도 당황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렇겠지.”
“바로 그때, 네가 적법한 후계자임을 밝혀야 한다. 그럼 네 정적이 제거됨은 물론, 장로들이 모은 무기도 전부 네 것이 되는 것이야.”
환야가 탄성을 질렀다.
“여론?”
“여론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지만, 어쨌든.”
“대단하오. 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소.”
어련하겠어?
“경험자로서 조언하지. 이거 하나는 꼭 기억해 두고 있어.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놈들은 자연스레 권력이 향하는 방향으로 의탁하게 되어 있어. 당연하지,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으니까.”
“맞는 말씀이오.”
“중요한 것은, 권력을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인지를 선별하는 거다.”
“선별이라…….”
서량이 씨익 웃었다.
“내 기준은 하나였다. 먹을 것만 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일 개들만 살려 두었지. 날 물려고 들거나, 내 성질을 건드리는 놈들은 단 하나도 살려 두지 않았어.”
환야의 눈이 반짝였다.
“호쾌하시군.”
“한번 고기 맛을 본 개는 주인을 물지 않아. 물론 고기를 던져 주지 않는 주인을 무는 놈들도 있지만, 제때 배를 불려 주기만 하면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내 보기에 장로 놈들이 그렇다. 네 사부는 장로들을 개로 만들었어. 다만 주인이 사라지니 각축을 벌이고 있는 거지.”
“쓸모없는 놈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이제 주인이 바뀌었으니, 탐욕스러운 개들은 쫓아 버리고 힘이 될 만한 들개들을 길들여야 하지 않겠나?”
“맞는 말이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소.”
환야는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서량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대충 둘러대도 알아서 감탄해 주는군.’
뭐, 이 정도면 충분하다. 환야는 장로들이 자신을 치러 올 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자, 그럼.’
서량이 진지한 얼굴로 환야를 보았다.
환야가 움찔했다.
“왜 그러시오?”
“지필묵을 내와 봐.”
“지필묵은 왜……?”
서량은 말없이 환야를 노려보았다.
환야가 헛기침을 하며 지필묵을 가져왔다.
“여기 있소.”
“좋아. 이제 나를 네 사부에게 안내해라.”
“뭐, 뭐라고?!”
환야의 얼굴에 불안감이 드리워졌다.
“사, 사부님께 말이오?”
“그래.”
“사부님을 왜 만나려 하시오?”
“말했잖아. 네가 적법한 후계자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그것은…….”
“말 몇 마디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지?”
“……!”
“네가 못하는 걸 내가 해 주겠다, 이거다. 송 성주를 만나 그를 제압하고, 그의 지장이 찍힌 서신을 가져오마. 너는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돼.”
환야의 얼굴에 떠오른 불안감이 한층 짙어졌다.
놀랍게도, 그 불안감에 송금백의 안위에 대한 감정은 없었다. 제자라면 마교주가 스승을 죽일까 걱정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그는 그저 자신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부님을 제압할 수 있소?”
“물론이다.”
“확실해야 하오. 당신도 괴물이지만, 사부님도 괴물이오. 그분의 무공은 능히 천하제일이라 불릴 만하오.”
“글쎄? 천하제이(天下第二)나 천하제삼(天下第三)은 몰라도 천하제일은 아니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로 천하제일인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고 스승한테 안내나 해, 이 소심한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