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이빨 빠진 사자의 회한 (5)
우우우우우웅.
‘크윽!’
눈을 뜨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번쩍!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동공에서 핏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 광채가 얼마나 진한지 어두운 폐관 수련방 전체를 밝힐 정도였다.
그리고 스스로 뿜은 광채를 본 순간, 송금백은 미칠 듯한 살심에 휩싸였다.
‘안 돼!’
그가 재차 눈을 감았다.
고작 눈을 감는 행위에도 굉장한 심력이 소모되었다. 그 빛을 본 순간부터 바깥으로 뛰쳐나가 모든 사람을 찢어 죽이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살심.
그리고 그 살심의 근간이 되는 것은 천룡기(天龍氣)였다.
‘이익!’
송금백은 다시 한번 천룡기를 뽑아내려 하였다.
놀랍게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천룡기를 뽑아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는 사파의 대종주이자 중원 천하에서 가장 강한 세 사람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인이었다. 무(武)의 이치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통달해 있으며, 당연히 체내에 자리 잡은 이형의 진기를 불살라 버리는 것은 식은 죽을 먹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부르르르르.
송금백의 손끝이 떨려 왔다.
‘지워 버리면 된다! 지워 버려!’
묵혈괴룡진기가 확 조여들며 천룡기 주변을 에워쌌다.
겁에 질린 천룡기가 움츠러들었다. 묵혈괴룡의 힘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태워 버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아아!’
송금백은 괴성을 질렀다. 영혼의 괴성이었다. 당장 천룡기를 분쇄해 버릴 각오로 묵혈괴룡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콰앙!
그의 두 주먹이 땅을 내리쳤다. 단단한 한철이 가미된 수련방 바닥에 금이 쩍쩍 갔다.
“으으으.”
송금백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왜…… 왜 안 되는 거야! 왜!”
그는 천룡기를 뽑아낼 수 없다.
능력은 되지만, 마음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룡기가 자아내는 것은 지고(至高)의 쾌락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었다. 마음이 초조할 땐 따스하게 돌아 기분을 풀어 주었고, 기분이 울적할 때는 생각만 해도 좋은 추억이나 상상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에는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어두운 감정과 대조되는, 밝은 생각과 감정을 통해 하루하루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
천룡기에 이런 효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송금백은 담사영과 함께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천룡기를 버릴 생각은 없었다. 안 그래도 피폐해진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이 되는 기운이었으니까.
상황은 사흘째 되는 날 변했다.
황곤에게 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를 듣던 와중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황곤의 목을 움켜쥔 채였다.
섬뜩한 순간이었다.
찰나만 늦었어도 황곤의 목을 부러트렸을 것이다. 그의 살점을 찢고 피를 마셨을 것이다.
바로 그때, 송금백은 잊어버렸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이 며칠 전에도 황곤을 죽일 뻔했다는 것을.
술에 한껏 취했기에 꾼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취해 쓰러져 버린 황곤의 목을 옥죄려 했던 손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살심!’
천룡기는 살심을 부채질한다.
놀랍게도, 평소에는 온갖 시름을 달래고 어루만진다. 누구도 선사하지 못할 극상의 안온함으로 심신을 포근히 감싼다.
그리고 그 좋은 기분이 최대치가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격렬한 살심이 들끓는다. 가장 높이 날아오른 그때, 강제로 지옥 밑바닥에 처박히는 셈이었다.
그 반전의 위력은 파멸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송금백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지금껏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강한 인내심의 소유자인 그조차 천룡기를 지울 수가 없었다. 끔찍하다는 말조차 부족할 정도로 악랄했다.
“다시…… 다시 해 보자.”
전신이 땀으로 젖은 송금백의 모습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참 많이도 야위어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 천룡기는 내 것이 아니다. 이따위 진기 나부랭이가 나를 제어할 수는……!”
콰아앙!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주먹으로 바닥을 때려 부쉈다.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살심이 솟구쳤다.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살심을 억누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을 편안케 해 주었다. 점점 그 편안한 쾌락의 노예가 되어 가는 자신이 느껴졌다.
마치 마약(痲藥)에 중독된 것처럼.
없애 버리면 그만이라고 수없이 되뇌면서도, 송금백은 천룡기가 주는 심신의 안정과 여유 가득한 쾌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어떤 미녀도, 그 어떤 미주가효(美酒佳肴)도 천룡기에 비할 수는 없었다.
‘이 또한 심마(心魔)란 말인가?’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우우웅.
부정적인 감정을 읽은 천룡기가 과거 하남제일미(河南第一美)와 만나 풍류를 즐겼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이내 송금백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참으로 좋았지.’
그녀의 미모도 좋았고 자신의 젊음도 좋았다.
아니, 그런 걸 떠나 그때의 설렘 자체가 너무나도 좋았다. 내가 먼저 손을 잡아도 될지, 술을 마시자고 하면 이상하게 볼지 등등……. 젊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혈기와 설렘, 기분 좋은 미래를 꿈꾸었던 당시의 감정이 송금백을 뒤흔들었다.
마치 그때 그곳에 있었던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도 몇 배는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하아…….”
생각만 해도 심장이 떨렸다. 다 잊고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때의 우리를 기억하느냐며, 참 좋지 않았냐며 소소한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살점을 찢어 피를 마시고 싶었다.
‘흡!’
극치에 이른 행복이 상상을 초월하는 살심을 불렀다. 송금백의 두 눈이 시뻘겋다 못해 검붉게 변했다.
“으아아아!”
콰아아앙!
아무렇게나 내지른 주먹에서 폭음이 울렸다.
“허억! 허억!”
숨이 찼다.
묵혈괴룡공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고 죽이기를 수천 번이나 반복했다. 천하의 고수라도 탈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땀과 침, 내상으로 인한 핏물이 섞인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던 송금백은 문득, 자신의 주먹이 땅이 아닌 허공 어딘가에 붙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
송금백의 눈이 번뜩였다.
파아악!
올가미처럼 단단한 무언가에서 주먹을 뺀 송금백이 서너 걸음 물러나 전방을 주시했다.
이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흐음.”
“너, 너……?!”
“이건 뭐, 완전히 폐인이 다 되었구만.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야.”
놀랍게도 그곳에는 서량이 있었다.
자신보다 한참 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가 잘 어울리는 젊은 마도대종사가 거기에 있었다.
송금백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환영? 환상?’
그렇다. 그럴 것이다.
이곳은 철혈성이며, 철혈성에서도 가장 깊숙한 비처 중 하나였다. 황곤도 밖에서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 강제로 들어올 수는 없는 곳이었다.
하물며 천마신교의 교주인 서량은 오죽하겠는가. 애초에 그는 철혈성 자체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이제는…… 네놈까지 나타나다니.”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까지? 나 말고 또 누가 여기에 왔나?”
“이놈…… 이놈!”
송금백이 이를 갈았다.
“또다시 날 흔들 생각이냐!!”
파아악!
단숨에 거리를 좁힌 송금백이 일장을 쳐 냈다.
강력한 힘이 실린 장력이었다. 오랫동안 진기를 소모하고 내상도 깊었지만, 내력 발출의 능력만큼은 여전히 수라제의 그것이었다.
물론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인 고수에게 있어서 이번 송금백의 공격은 우습다 못해 허탈한 것이었지만.
“참 나.”
콰앙!
“컥!”
송금백의 몸이 휘청였다. 그의 손목을 쥔 서량이 얼굴에다 일장을 내친 것이다.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코뼈나 이빨이 나가진 않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기에 충분한 타격이었다. 송금백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서량을 보았다.
“이노옴……!”
지이이이이잉.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두 눈이 불에 달궈진 쇳덩이처럼 검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실로 대단했다. 비요왕을 앞두었을 때의 자신도 이 정도로 짙은 살기를 뽑아내지는 못했다.
“그만 사라지라 하지 않느냐! 나는 네놈 따위 보고 싶지 않아!”
퍼억!
“컥!”
송금백이 비틀거렸다.
철판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는 각법에 복부를 맞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쓰러질 수 없었다. 서량이 끝까지 그의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송금백의 턱을 움켜쥐고 쳐든 서량의 두 눈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정신도 차릴 겸, 일단 맞자.”
그가 송금백을 그대로 벽에 밀쳤다.
콰아앙!
송금백의 코와 입에서 피가 터졌다.
곧이어 서량의 두 주먹이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퍼버버버버벅!
“커허억!”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연환의 권타(拳打)가 송금백의 상체 전체에 작렬했다.
살을 찢고 뼈를 부술 위력은 없었지만, 고통만큼은 확실한 타격이었다. 신기(神技)에 이른 그의 마기가 송금백의 통각을 거칠게 자극했다.
퍼억! 퍼어억!
“자아.”
빠각! 퍼버벅!
“이 정도면 슬슬 된 것 같은데.”
타타타탕!
“아직도 정신이 안 나면 잠깐만 쉬고 다시 들어가도록 하지.”
파지지직! 퍼어어억!
곧고 깊게 들어간 장타(掌打)가 송금백의 가슴에 닿았다. 만압금마장에 맞은 송금백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흐음.”
가만히 송금백을 노려보던 서량이 팔을 회수했다.
쿠웅!
송금백이 땅에 떨어졌다.
“커헉! 허억! 허억!”
벽이 부서질 정도로 강한 충격을 입었음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제자와 비슷하게 반병신이 다 되었지만, 그래도 그놈보다 천배는 더 낫군. 그간 익히고 단련한 몸뚱이 하나만큼은 예전 못지않아.”
“쿨럭!”
몇 번이나 밭은기침을 내뱉던 송금백이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너, 너……!”
“뭐 인마.”
“네놈…… 설마 진짜 서량이란 말이냐?”
“몇 대 더 패 줘? 뼈마디 몇 개 박살을 내야 정신 차릴래?”
송금백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재빨리 천룡기를 돌아보았다. 천룡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기(魔氣) 때문이다. 서량의 주먹을 통해 침투한 절대마기가 천룡기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천룡기 자체가 구유마기의 서슬 퍼런 힘에 극도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송금백의 두 눈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네, 네놈이 어떻게 여길 왔느냐?”
“글쎄다. 어떻게 기어들어 왔을까?”
“……설마?!”
송금백의 두 눈에 두려움과 분노가 치솟았다.
“네놈들! 본성을 친 것이냐?!”
서량은 저도 모르게 큭 하고 웃었다.
“확실히 사람 망가지는 것도 시간문제야. 다른 건 몰라도 상상력 하나는 제법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간 거 아닌가?”
“무슨 말이냐!”
“너희 본성을 친 게 아니란 말이지. ……아직은.”
“……?!”
“이봐, 송 성주.”
서량은 곤란하다는 듯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왜 자꾸 만날 때마다 그리 못난 모습만 보여 주는 거야? 사람 마음 약해지게.”
“…….”
“네놈이 자꾸 이런 모습을 보여 주면, 너희들 작살내려고 밤잠을 설친 우리 총군사의 노력이 뭐가 되냔 말이다.”
송금백의 두 눈이 더 짙게 충혈되었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서량이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퍼억!
“컥!”
송금백의 목을 잡고 끌어 올린 서량이 차갑게 말했다.
“본래는 널 반병신으로 만들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커허어억!”
“그 머저리 같은 천룡기 당장 뽑아내. 반 각 내로 뽑아내지 못하면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