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사마합일(邪魔合一) (1)
“오호?”
여극도의 얼굴에 진한 흥미가 일었다.
“참으로 웅장하구먼.”
철혈성은 천마신교 못지않게 거대했다. 하지만 천마신교와는 또 달랐다.
천마신교는 천혜의 험지인 십만대산의 무수히 많은 봉우리에 걸쳐져, 대자연과 인위의 합일로 철옹성이 되었다.
반면 철혈성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에 거대한 성벽을 세워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소국(小國)과도 같았다. 신교에 거하는 이들은 거의 대다수가 마인이지만, 철혈성의 외성에는 일반 양민도 많았다.
“철혈성주 수라제 송금백이라.”
여극도는 송금백을 기억했다.
서량과 치열한 공방을 펼쳤던, 살벌한 박투술과 파멸적인 검도(劍道)를 구사하면서도 기묘한 품격을 흩뿌리던 자.
중원 무맥(武脈)을 대표하는 자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위용이었다. 물론 서량이 살기를 끌어 올려 강제로 각성한 이후론 그대로 밀려 버렸지만.
‘언젠가 꼭 한번 손속을 나눠 보고 싶었건만.’
어쩌면 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여상린이 말했다.
“정력 좋은 아저씨는 아직도 멀쩡하려나.”
여극도가 떨떠름한 얼굴로 여상린을 보았다.
“정……력?”
“육순이 넘은 나이로 이십 대 꽃다운 여인을 첩으로 삼았으니까요. 정력 하나는 끝내주는 모양이에요.”
“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린 게냐?”
“저를 너무 어리게 보시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애비 앞에서 할 말은 아닌 듯싶다만.”
“킁.”
위홍련이 피식 웃었다.
“정력 좋다는 얘기가 뭐 어때서 그러십니까? 그 정도는 그냥 칭찬이잖아요.”
여극도가 헛기침을 했다.
“뭐, 됐네. 그래서 우리가 저 웅장하기 그지없는 성을 어떻게 공략하면 되겠는가?”
“머지않아 하오문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그때 북문을 때려 부수면 될 거예요.”
새외제일인 여극도와 천마신교 특작 부대 마왕령이라면 실로 대단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철혈성 전체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근래 들어 그 세(勢)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곤 하나, 강호삼세의 일익을 차지했던 그들의 전력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즉, 그들이 할 일은 철혈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철혈성을 뒤흔드는 것이다.
우웅.
여극도의 두 눈에 빙백의 신기(神氣)가 번뜩였다.
“서 교주를 아주 오랜만에 보겠어.”
위홍련이 조심스레 물었다.
“보이십니까?”
“마기도, 서 교주 특유의 전투적인 기파도 느껴지진 않지만…… 그렇다네. 분명 철혈성 안에 있군.”
위홍련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교주님.”
서량의 파격적인 전략 전술이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이젠 하다 하다 철혈성까지 들어갈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양반이다. 그런 분을 주인으로 모신 탓에 심심할 일은 없었지만, 이제 와서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서량의 무공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었다.
‘교주님은 천하제일이다.’
당대 무림의 천하제일인.
무담도, 마동필도 그렇게 평가했다.
그렇다면 분명 그런 것이다. 그 두 사람은 드높은 충성심만큼이나 빈말은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호천마황단도 함께하고 있겠지. 만일 교주님의 안전이 확실하지 않았다면 총군사님이 가만히 보고 있었을 리 없어.’
전투 부대의 수장으로서 크게 성장한 위홍련.
그런 그녀는 이제 사람을 읽고 대국의 흐름까지 볼 줄 아는 눈을 기르고 있었다. 전략실에서의 수많은 대화가, 상승한 무공이 천하를 바라보는 안목까지 키워 준 것이다.
이제 위홍련은 누구 못지않은 강자로 성장했다.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천하인(天下人)으로서 세상에 명성을 떨칠 만반의 준비가 된 것이다.
그때, 여상린이 입을 열었다.
“어땠어요?”
“음?”
“전에 아버지께서 그러셨잖아요. 서 교주님의 무공이 아버지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그랬었지.”
“지금은 다를까요?”
여극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애비나 서 교주 정도의 경지에 올라서면, 그때부터는 실전의 변수보다도 중요해지는 것이 무공을 구현하는 독창성과 정신력이지. 다만…….”
“다만요?”
“과거, 철혈성주와 부딪쳤을 때의 서 교주는 분명 그보다 한 수, 혹은 반 수 아래였어. 그런 그가 담사영과의 만남에서는 당당히 천하제일을 선포했다 하지 않았더냐.”
“그랬죠.”
“어지간한 자신감 없이는 그런 말을 뱉을 사람이 아니야. 즉, 그사이 무공이 더 발전했다는 뜻이겠지.”
여극도가 피식 웃었다.
“참으로 괴물 같은 재능이로다. 이제는 만반의 태세를 갖춘 나라도 서 교주를 상대로 절반의 승률이라도 가져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
“……그렇군요.”
여상린이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아련함이 느껴지는 그 미소에 여극도가 히죽 웃었다.
“왜? 이제 좀 관심이 가느냐?”
“아버지보다 강한 사람이라는데 관심이 안 갈 리가 있나요.”
“어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얘기하는구나.”
여상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의 서 교주님과 지금의 서 교주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요?”
“허허허.”
여극도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위홍련이 말했다.
“연락이 오기 전까지 좀 쉬시지요.”
“그러세나. 나름대로 강행군이었는데.”
그렇게 빙궁의 부녀와 마왕령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제각기 휴식을 취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쿠구궁!
대지에 전달되는 땅울림이 무척이나 거셌다.
치리리리링!
휴식을 취하던 마왕령 모두가 제각기 병장기를 뽑아 들고 진형을 형성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위홍련의 눈이 번뜩였다.
“궁주님. 이건…….”
“그렇다네.”
여극도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철혈성이야. 그것도 저 깊숙한 곳, 내성일세.”
그야말로 심상치 않은 진동이었다.
위홍련은 느낌으로, 여극도는 실력으로 알아챘다.
“이 정도 진동이 전해질 정도의 충격이라면 엄청난 힘이 대지에 내리꽂혀야 하네.”
“그 말씀은?”
“그래.”
후우우웅.
여극도의 몸에서 은은한 백기(白氣)가 어른거렸다.
“천위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이 정도 힘을 발산하긴 힘들지.”
위홍련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설마 교주님께서……?”
“그건 아닐 걸세.”
“예?”
여극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천위의 고수다. 진동으로 전달되는 지극히 미세한 기운은 거의 선천의 영역에 달해 있어. 거의 나에 필적할 만한 순도의 기운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서량이었다. 하지만 그 기는 분명 마기가 아니었다.
‘설마 철혈성주?’
그때였다.
“누군가가 온다.”
위홍련의 눈이 번뜩였다.
“하오문입니다.”
잠시 후, 복면인 하나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오문의 양의단주(陽意團主) 초극입니다. 북해의 주인과 마왕령주를 뵙습니다.”
위홍련이 서둘러 말했다.
“언제 타격하면 되지? 아니, 그 전에 이 심상치 않은 진동은…….”
“북문 타격의 양동 작전은 중단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초극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건넸다.
서신을 본 위홍련의 눈이 커졌다.
“교주님께서 철혈성주와 손을 잡아? 이게 무슨 말이야?”
초극이 눈을 빛냈다.
“반나절 뒤 북문을 개방한다고 합니다. 그때 저와 함께 내성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 * *
“허억! 허억!”
한 움큼 피를 토한 환야가 연신 숨을 헐떡였다.
송금백의 눈에 스산한 빛이 어렸다.
“일어나거라.”
“쿨럭! 사, 사부님.”
“당장 일어나라 하지 않느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괴룡의 힘이 한껏 담겼다.
무시무시한 존재감이었다. 철혈성을 휘어잡은 후, 제자는 물론 수하들 앞에서도 화난 기색을 보여 준 적 없던 송금백이 극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환야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송금백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콰앙!
재차 피를 토한 환야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송금백이 손을 뻗었다.
후우우우웅.
그의 손끝에서 올올이 피어오르는 붉은 진기가 환야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치이이이익!
환야의 몸에서 희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송금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안개와도 같은 김은 뱀도, 이무기도 아닌 기괴한 형상을 한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환야가 안고 있던 심마의 형태다. 보기만 해도 혼이 달아날 것 같은 송금백의 심마와는 다른,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승천하는 용이 되고 싶었던 환야의 야망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송금백의 주먹을 쥐었다.
파삭!
심마가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같은 내공, 같은 신공을 익혔기에 가능한 술수였다. 상단전과 중단전을 단번에 바로잡고 심마를 뽑아내 소멸시켜 버린 신기(神技)의 무공이었다.
“이놈을 꽁꽁 묶어 의방으로 보내라.”
“존명!”
수문위장들이 환야를 들고 대전 밖으로 나갔다.
이제 대전에는 송금백과 장로회의 장로들밖에 남지 않았다.
후욱.
불편한 심기가 신공을 자극하니, 가히 공포스러운 기파가 넘실대며 흐른다.
엎드려 있던 번석은 침을 삼켰다. 그 뒤에 도열해 있던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가운 눈으로 번석을 내려다보던 송금백이 입을 열었다.
“수석장로.”
“예, 예!”
송금백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대전 내의 공기가 한층 무겁게 변했다.
“자네의 팔순 잔치를 저승에서 치르게 할 것을 그랬던가?”
“죄, 죄송합니다!”
오금이 저리는 발언이었다.
송금백은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수하들을 존중할 줄 아는 군주였고, 공석이든 사석이든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발언만으로도 송금백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듣자 하니, 소성주와 신경전까지 벌였다고 하던데.”
번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서, 성주님! 그것은 성주님을 향한 노신의 충정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소성주라도 독단으로 성의 중대사를 처리하는 것은 성주님의 위엄에 크나큰 해를…….”
“네놈이 팔순에 이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소성주의 돌발 행동 하나 막지 못했지?”
“……!”
결국 그것이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일어난 일이라지만, 결국 성주 부재 시에 이 일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수석장로를 위시한 성의 수뇌부들이었다. 변명 따위는 필요치 않다. 소성주는 물론, 그들의 죄 역시 컸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하나 자네는 소성주를 몰아내기 위해 여론을 조성하고 세력을 규합했어.”
송금백이 차갑게 웃었다.
“이 기회에 본성의 권력을 장로회로 끌고 가고 싶었더냐?”
번석이 눈을 질끈 감았다.
거기까지 보고가 된 이상,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치 않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장로들이 따라 외쳤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송금백의 볼이 씰룩거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행태 덕에 서량이 철혈성으로 들어왔고, 그 덕분에 심마를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나이 먹고 권력을 탐하는 것뿐인 놈들 따위 송금백의 세상에는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장 이놈들을 박살 내 버릴 수도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이놈들 덕분에 철혈성이 돌아가고 있으니까.
새 인력을 뽑기 전까지는 놔두는 게 좋을 것이다.
“돌아가서 자숙들 하게. 다시 부르기 전까지 대내외 활동을 일절 금할 것이야.”
“송구하옵니다!”
대전을 떠나는 장로들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다. 한 번의 실수가 그들의 자유를 박탈했다. 그간 잊고 있던 철혈의 율법이 그들의 다리에 족쇄를 채워 버린 것이다.
그렇게 대전에는 송금백 홀로 남았다.
“후우.”
내쉬는 숨에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스륵.
성주 최측근 호위, 혈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주님. 이만 쉬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쉬기 전에, 내 몸에 도사리고 있는 몹쓸 기운부터 뽑아내야겠지.”
“예?”
송금백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마교의 주인이 내 거처에 있네.”
“……!!”
“귀빈 자격으로 왔네. 저 머저리들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자네가 신경 좀 쓰게.”
혈위가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송금백이 눈을 감았다.
“……그간의 실수를 이제부터라도 만회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