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사마합일(邪魔合一) (3)
“군림성교! 천마불사! 교주님을 뵙습니다!”
타지에서 신교의 신을 본 기분은 꽤 색다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일까? 마왕령의 외침은 유독 강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고생들이 많다.”
마왕수들은 하늘 같은 교주님의 말에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진심이 한껏 묻어나는 말이었다. 위험한 특작 부대지만, 교주님의 총애만 받을 수 있다면 죽음 따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위홍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난스러운 말로 대화의 포문을 열려던 위홍련은 순간 주춤했다.
‘…….’
다르다.
어깨에 금호를 올려놓은 채 뒷짐을 지고 선 교주님의 모습.
언제나 봐 왔던 그 모습인데, 이상하게 신교 안에서 뵈었을 때와는 뭔가가 달랐다.
우우웅.
서량의 숨결에 일대의 공기가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위엄이 가득했다. 맑고 깊은 눈빛 역시 예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기세가 위홍련을 긴장케 했다.
서량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예?”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답지 않게.”
“아!”
위홍련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지 엄청 반가워서요.”
“버릇없다.”
“헤헤, 새삼스럽게요.”
서량이 피식 웃었다.
“빙궁 추적하던 놈들 싹 묻어 버렸다며? 극소포를 제대로 사용했다던데.”
“예. 성능이 좋더라고요.”
“근데 어째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이네?”
“불만은 아니고요.”
위홍련이 입맛을 다셨다.
“그냥 제 천성이에요. 그런 속 편한 물건으로 적을 섬멸했다는 게 영 찝찝해서요.”
“그러냐?”
“딱히 쌈박질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뭐, 이왕 죽일 거면 무인다운 최후를 안겨 주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배부른 투정은 아니었다.
남들에겐 경박하다는 평을 받을지언정 위홍련은 언제나 싸움에 진지하게 임했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무인의 도(道)는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 마인이기 전에 무림인이기에, 화기(火器)까지 써서 적을 섬멸했다는 사실이 여태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마왕령은 특작 부대다. 특작 부대는 신교를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야. 신교가 나아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워 주는 조직이지.”
“예, 알고 있습니다.”
서량이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굳이 그런 물건을 쓰고 싶지 않다면, 마왕령의 역량을 지금보다 서너 배는 더 키울 수 있도록 해.”
“설령 그렇게 된다 한들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길 겁니다. 어떻게든 임무를 달성하는 게 저희의 존재의의니까요.”
“그래, 바로 그거다.”
확실히 위홍련도 많이 달라졌다.
철검마존에게 검도(劍道)를 배우고 스스로 무학의 바다에 몸을 던진 덕인지, 예전보다 훨씬 더 진중해진 것 같았다. 나아가 신교 최초의 특작 부대를 운영하며 수장으로서의 역량도 키웠다.
“일단 좀 쉬도록 해. 며칠 뒤에 떠날 테니까.”
위홍련이 은근슬쩍 물었다.
“근데 그거 진짭니까?”
“뭐가?”
“철혈성주랑 손잡으신 거요.”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송 성주와 동맹을 맺지도 않았는데 너희가 속 편히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을 줄 알았어?”
“교주님이시라면 바로 목을 따 버리실 줄 알았거든요.”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냐?”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긴, 그 말도 맞긴 해. 원래도 그러려고 했고.”
위홍련이 씁쓸하게 웃었다.
“참, 세력 간의 다툼이라는 게 재미있네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라니.”
“마왕령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지. 나도, 그리고 송 성주도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송금백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서량과 손을 잡은 것은 담사영에 대한 순백의 분노 때문이었다.
물론 서량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그나저나…….”
서량이 여극도에게 포권을 취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극도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와 얽히면 여러모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는구먼. 설마하니 철혈성의 정문으로 걸어 들어올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뭔가.”
“하하.”
서량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여극도의 눈이 반짝였다.
‘바뀌었군.’
위홍련이 알아챈 것처럼, 여극도 역시 서량의 변화를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장난스러웠던 분위기가 사라졌어.’
이제는 진정 천마신교의 주인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위엄을 자아낸다.
아니, 그만한 역량과 위엄은 이전에도 있었다.
서량의 변화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네 스승, 전대 교주 말일세.”
“예?”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그분 성격은 어떠셨나? 말수가 많은 분이셨나?”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일이 아니면 쉽게 입을 여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입이 엄청나게 무거운 분이셨지요.”
“허허, 그랬구만.”
“근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여극도는 솔직하게 말했다.
“자네가 예전과 달라진 것 같아서 말일세.”
“그렇습니까?”
“확연히 달라졌다네. 성품은 그대로인 것 같지만 전해지는 무게감이 달라. 인제 보니, 자네도 자네 스승이 걸었던 길을 가고 있는 모양일세.”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가신 길은 누구도 따라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가?”
“예. 그래서 그냥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 기분이 나쁘진 않군요.”
구대천마, 절대마신 이천상과 닮아 가고 있다고 한다.
여극도는 한 번도 이천상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여극도 역시 완성된 무인인바, 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이네요?”
서량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 대화에 참여할까 고민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여상린이 활짝 웃고 있었다.
서량 역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냐?”
“그럼요. 이렇게 보니 교주님도 잘 지내신 것 같네요.”
“힘들긴 했지만, 나쁘지 않게 지냈지.”
“……흐음.”
“왜?”
“아, 아니에요.”
“뭐야, 싱겁게. 그나저나 너, 무공이 엄청 성장했네? 조만간 위 령주도 따라잡는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니에요.”
“빙백무를 온전하게 전수한 것 같은데 뭘. 빙백무는 새외 제일의 무공이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너도 천위에 오를 수 있을 거야.”
여상린은 말없이 미소로 답했다.
서량이 여극도에게 말했다.
“저는 철혈성주와 얘기할 게 남아서 말입니다. 내일 다시 찾아뵐 테니 오늘은 푹 쉬십시오.”
“그러세나.”
“그럼.”
서량이 자리를 벗어났다.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보던 여극도가 옆을 힐끔 쳐다보았다. 여상린이 알 듯 모를 듯 묘한 눈으로 서량을 보고 있었다.
지금껏 딸내미에게서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여극도가 짓궂게 물었다.
“어때? 지금도 별 마음 없느냐?”
“…….”
“딸?”
“헉! 네? 왜요?”
“완전히 넋을 놨구만. 서 교주가 그렇게 좋으냐?”
여상린이 헛기침을 했다.
“아니거든요? 그냥 예전하고는 너무 많이 달라져서요.”
여극도가 빙긋 웃었다.
“빙소면 먹고 싶다.”
“아버지!”
한편 송금백의 거처 후원에 다다른 서량은 일순 고농도로 압축된 기가 범람하는 것을 느꼈다.
독특한 기였다. 공기 중으로 퍼진 기는 시전자의 의지를 벗어나기에 사방으로 흩어져야 정상인데, 일정 영역 안에서만 맴돌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확실히.’
후원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송금백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게 부족한 것들이 상대에게 존재한다.’
충분히 높게 올라왔는데도 이렇다.
이보다 약했을 때는 경지의 격차가 워낙에 명확했다. 일 층(一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일(一)이라면, 이 층(二層)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이(二)였다. 그래서 자신과 상대의 경지를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서량, 담사영 그리고 송금백 정도의 깊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삼 층(三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사(四)가 되고, 사 층(四層)에서 얻을 수 있는 건 팔(八)이 된다. 그렇게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아진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뒤에야 다음 관문으로 넘어갈 필요는 없다. 그중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한 후, 그 이상을 넘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바로 넘어가는 것이 더 빨리 성장하는 길이다.
그래서 서량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송금백보다 아주 약간 더 깊어졌다는 것을. 하지만 자신에게 없는 무도(武道)가 상대에게는 존재한다는 것을.
반대로 송금백에게 없는 무도를 서량이 갖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지였다.
‘하지만 그 이상을 넘볼 수 있다면?’
우우우웅.
서량의 두 눈에 청홍의 마기가 스쳤다.
‘나는 아직도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아니한가.’
지금의 경지는 고인(故人)이 된 정무쌍신의 마지막 경지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근시일 내에.
그렇게 깊어지고 또 깊어지다 보면.
어느새 신화(神化)의 문 앞에 선 스스로를 볼 수 있을는지.
“왔나.”
스르르르.
송금백이 눈을 떴다.
동시에 그의 주변을 맴돌던 기운이 일시에 흩어져 버렸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기분은 좀 어때?”
송금백이 고소를 지었다.
“묵은 때를 모조리 벗겨 낸 기분이네. 이렇게 상쾌한 기분일 줄은 몰랐어.”
“댁이 키운 천룡기가 단번에 사라진 만큼, 묵혈괴룡진기의 일부도 잃었을 거야.”
“그대로 놔두었다면 그간 연마했던 진기가 몽땅 천룡기로 변했겠지.”
“그랬겠지.”
“내 지난 오만과 실수를 약간의 진기 소실로 끝낼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 아니겠나.”
맞는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이 양보다는 질이 핵심이라지만, 무공에 막 입문한 자들에게는 내공의 질적 향상만큼이나 양적 향상도 중요하다.
그러나 극마에 오른 고수들에게는 내공량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진기의 질을 더 깊게, 더 단단하게, 더 무겁게 연마하는 것이 주요 과제이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당신도 보통이 아니군. 천룡기를 뽑아내면서 본신의 진기 회복을 도모하다니. 완전히 부활했군.”
“그렇다네.”
스르륵.
송금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완전히 씻어 낸 송금백의 얼굴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 같았다. 선도(仙道)를 배운 도사의 평온함마저 엿보일 정도였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달라졌군.’
심마를 뽑아내고 천룡기를 지워 내서?
그런 수준의 변화가 아니었다. 송금백이라는 사람 자체가 이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
송금백이 입을 열었다.
“친구들과는 잘 만났는가.”
“며칠 푹 쉬라고 했지.”
“며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이라…… 그거 좋지.”
송금백이 눈을 빛냈다.
“내, 자네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는가?”
“말해 봐.”
“싸워 주게.”
“……지금?”
“그래, 지금.”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목숨을 노리는 생사결 말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을 정도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