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화. 사마합일(邪魔合一) (4)
“총군사님, 빙궁주와 마왕령이 교주님과 만났다고 합니다.”
“좋아.”
호요성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그의 눈은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게 옳았어.’
교주님께서 철혈성의 소성주를 이용해 그쪽 판을 뒤집어 놓으면, 그 즉시 여극도와 마왕령을 운용해 철혈성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놀랍게도 서량은 철혈성주를 아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담사영이 써먹을까 두려워 박살 내려던 전력과 오히려 동맹을 맺어, 적을 향해 창을 겨누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호요성은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교주님을 전면에 내세운 전략을 짜야 하는 이유였다.’
서량은 돌발 행동을 많이 한다.
한 조직의 군사에게 있어, 그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결국 최종 명령권자는 교주이거늘, 선봉에 선 사람이 자꾸만 제멋대로 움직이면 군사로서는 향후 작전을 짜기가 지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요성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서량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과정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도 않았다.
호요성이 천재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로서의 고집과 자존심을 모두 접고, 이 판을 뒤흔드는 주인공을 철저하게 보조하는 형식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예전에도 이런 순간들은 많았다.’
그나마 이번에는 교주님의 돌발 행동이 아군에 좋은 쪽으로 작용해 다행이다. 예전에는 도대체 왜 저러시나 싶을 정도로 상황을 악화시킨 적도 있었다.
‘그래도 교주님께서는 언제나 답을 찾아내셨다. 그리고 나 역시도.’
비로소 호요성은 확신할 수 있었다.
‘더는 교주님의 지략을 논할 필요가 없어.’
교주님은, 십대천마는, 중원이 염라마제라 부르며 경외하는 십만마도의 대종주는.
‘교주님이 움직이시는 곳이 곧 천하가 된다.’
인간의 지략과 안목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거인의 발걸음.
그것은 어떤 의미로, 전대 교주인 이천상과 비슷했다. 다만 이천상의 행보는 천하를 홀로 상대할 만한 무력을 마음껏 휘둘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서량은?
‘아시는 거야.’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결정의 순간이 왔을 때, 무엇을 선택해야 편해질지 알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다.
생과 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어 본 사신의 본능이었고, 욕망과 허무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다가 마(魔)의 극치를 깨달은 마신의 감각이었다.
천하제일(天下第一).
마(魔)로서도, 무(武)로서도 명백한 천하제일이 된 교주님은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도약의 전기를 맞이하고 계셨다.
‘그렇다면 이 못난 총군사는 무엇을 준비하고, 또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 것일까?’
이천상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서량만이 아니었다.
호요성 역시 이천상에게 본능이라는 것을 배웠다. 세상을 이성과 논리로만 재고 있었던 그는, 덕분에 본능으로도 천하를 주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가 천하를 발밑에 둔 또 한 명의 거인을 따라 움직인다.
‘보인다.’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보여. 적의 움직임이.’
신통한 도술이나 극악한 사술을 익히지 않아도.
저 천룡궁처럼 신비로운 술법을 익히지 않아도 적의 움직임이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무도(武道)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도, 바로 군략지도(軍略至道)다.
“전선에 대기 중인 원로분들께 연락을 취해라.”
“예?”
호요성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수십 일 내로 적습이 예상된다고, 적이 공습을 가하면 그대로 후방으로 빠지시라고 전해.”
“후, 후방으로요?!”
“그렇다.”
마치 공기를 잡으려는 듯, 허공을 움켜쥔 호요성의 주먹에 강한 힘이 깃들었다.
“개전(開戰)의 칼부림은 교주님께서 시작하실 것이다.”
* * *
“배울 수 있을 정도라…….”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안하지만, 난 죽고 죽이는 싸움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그건 또 재미있는 거짓말이군.”
“거짓말이라니?”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 정도의 고수를 상대로 손속을 나눠 보는 수준의 무공을 구현하는 건 지극히 어려워.”
“그게 어렵다면, 어려운 대로 한번 해 보세나.”
묘한 분위기였다.
송금백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서량이 자신을 앞서 있다는 걸. 생사전을 벌인다면 십중팔구 서량이 승리하리라는 걸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송금백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다. 마치 강호의 후배에게 가르침을 안겨 주려는 선배와도 같았다.
놀랍게도 서량은, 그런 송금백을 보며 긴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천룡기를 불사르며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었나?’
그럴 수도 있다.
사파에선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지만, 정파 무공에선 비우면 새로운 것을 채운다는 말이 있다.
물론 모두가 그 무리(武理)를 체득하는 건 아니었다. 그것은 경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긴, 깨달음은 정사마를 나누지 않지.’
결국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쁘군.”
기쁘다? 이 또한 묘한 반응이다.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소가 좀 그렇지 않나? 생사전이 아니더라도 자칫 거처가 엉망이 될 수 있을 텐데.”
“괜찮네. 이곳이 박살 나는 일은 없을 거야.”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면 갈수록 모를 소리로군.”
“허허, 괜찮네. 그저 가볍게 겨뤄 보자는 거니까.”
“……좋아.”
츠츠츠.
서량의 몸에서 은은한 붉은 마기가 일었다. 군림마황기가 아닌 구유마공이었다.
“나중에 물어 달라고 헛소리하기만 해 봐.”
“걱정하지 말게. 나 돈 많네. 그나저나…….”
송금백의 눈이 반짝였다.
“군림마황기가 아니라 그 마공인가?”
“엉.”
“왜 그 마공을 택했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려던 서량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게? 내가 왜 굳이 구유마공을 선택했지? 어차피 가볍에 손속을 나눈다고 한다면, 군림마황기나 구유마공이나 별 상관이 없을 텐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송금백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내가 먼저 가 보겠네.”
“……그러셔.”
후욱.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금백의 손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량의 동공이 무섭게 확장되었다.
‘빠르다!’
기척도 없이 내지른 일수(一手), 자연스럽게 모인 손끝이 서량의 인중을 노렸다.
픽!
서량의 볼에 한 줄기 혈선(血線)이 그어졌다. 송금백의 날카로운 수도(手刀)에 베인 것이다.
그때였다.
어느새 고개를 젖힌 서량의 눈 앞에 송금백의 손이 재차 날아들었다.
마치 그곳으로 고개를 젖힐 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미리 공격선을 선점한 송금백의 손바닥 전체에 강력한 진기가 이글거렸다.
서량이 주먹을 짧게 올려 쳤다.
터엉!
놀랍다.
하박을 후려쳐 팔 전체를 튕겨 내려고 했는데 어느새 송금백의 손은 뒤로 빠져 있었다.
‘이것도 예상했다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만큼 신비로운 공격과 회피였다.
‘흐음.’
확실히 뭔가 다르긴 다르다.
서량의 위엄 가득한 얼굴에 한 줄기 흥미가 일었다.
‘이런 공격을 보여 주면 나도 못 참지.’
고작 세 합에 불과했지만 상대의 변화를 충분히 느꼈다.
송금백은 자신과 거의 차이가 없는 무공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의 변화라면, 자신도 꼭 봐 두고 싶었다.
‘좋아.’
쿵!
물 흐르듯 부드러운 공방 속에 강한 힘이 치솟았다.
서량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황군림보가 펼쳐진 것이다.
송금백의 눈이 빛났다.
파라라락!
서량은 깜짝 놀랐다.
후방의 사각으로 파고들어 주먹으로 요추를 노리는데, 어느새 송금백의 손등이 그의 어깨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빠르다. 공기의 저항으로 인해 소맷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스르륵.
서량의 몸이 유연하게 빠져나와 송금백의 좌측에 섰다.
타아아앙!
이번 각법은 실로 빨랐다.
살기는 없지만 위력만큼은 철문도 우그러트릴 만큼 강력했다. 막거나 피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송금백이라도 머리통이 날아갈 것이다.
그때였다.
‘……?!’
송금백이 등을 돌린 채 서량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각법의 타격 거리 안쪽이었다. 고관절의 움직임이 막히니 각법을 다 펼칠 수가 없다. 아니, 펼칠 수는 있지만 힘을 거두지 않았다가는 오금이 찢겨 날아갈 것이다.
‘이런!’
퍼어엉!
응변의 기지가 폭발한다.
품으로 파고든 송금백의 등을 밀어 내는 그였다. 고관절을 접어 각법을 끝까지 펼칠 수 있도록, 그 공격에 송금백이 맞을 수 있도록 회피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후욱!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밀려 나가기도 전에 상체를 만 송금백이 기가 막힌 몸놀림으로 각법을 피해 내며 맞은편에 섰다.
서량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건……?!’
그때, 송금백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
“그리 빠르지도, 공격적이지도 않은 내 무공에 당황했나?”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 서량은 당황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공격적이지도, 그렇다고 방어적이지도 않은 기묘한 무공 앞에 그의 실전적인 박투술이 무용지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송금백이 미소를 지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과연 자네다운 응수일세. 각법을 접고 등판을 후려칠 줄 알았거늘, 오히려 밀쳐 내서 끝까지 각법을 유지하다니.”
“…….”
“신체 활용 능력만으로 따지자면, 자네는 감히 고금제일을 논해도 손색이 없을 걸세. 그 상황에서 그런 식의 대응을 하는 자는 수천 년 무림사를 뒤져도 찾기 어려울 거야.”
파앙!
서서히 자세를 낮추다가 폭발적인 손놀림으로 좌수를 뻗은 송금백의 눈이 번뜩였다.
“자, 다시 한번 가네.”
훅!
더 빨라졌다.
더 빨라지고, 더 예리해졌다. 방금까지의 부드러운 몸놀림에 칼날 같은 예기를 덧씌운 것 같았다.
서량의 쌍권이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퍼퍼퍼펑!
두 사람의 권박이 공기를 터트렸다.
이제야 제대로 된 충돌이 나온다. 하지만 정작 송금백과 권박을 나누는 서량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도대체가……?’
힘이 넘치는 권법을 쏟아 내는데도 순간순간 공간을 선점하여 이쪽의 의도를 무(無)로 비틀어 버린다.
이런 식의 기묘한 공방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상대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서 싸우는 것 같았다.
‘무당태극권(武當太極拳)처럼 자연스럽다가도 소림금강권(少林金剛拳)처럼 힘이 넘친다. 하지만 도도한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공간을 선점하는 이 무리(武理)는 대체……?’
그때였다.
“대단하네.”
기가 막힌 권법을 펼쳐 내면서도 송금백은 육성으로 감탄했다.
“기실, 오십 합 내외로 자네를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어. 한데 벌써 팔십 합이 다 되어 가는군.”
말 시키지 마라, 이 인간아.
서량은 입을 열 정신이 없었다. 송금백의 권법 흐름에 신경을 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자네의 실전 능력이나 기지가 뛰어나서만은 아닌 것 같군.”
파파파팡.
더 빨라진 권속에 서량의 손속도 한결 거칠어졌다.
송금백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경험이 있구만, 자네?”
퍼억!
“큭.”
서량이 비틀거렸다. 송금백의 주먹이 어깨에 작렬한 것이다.
어깨에 맞았음에도 충격은 크지 않았다. 생사결이 아닌 손속을 나누는 비무이기 때문이었다.
후우욱!
송금백의 두 주먹이 재차 날아왔다.
“분명해. 자네는 내가 구사하는 이 깨달음을 경험해 본 적이 있어.”
파아악!
서량의 소매가 길게 찢어졌다.
“정확히는, 나처럼 형(形)으로 공간을 점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기(氣)로써 공간을 점하는, 더 고차원적인 무리를 접한 적이 있는 것 같군.”
“……?!”
“며칠 동안 차근차근 알려 주려 했는데, 경험이 있다면 훨씬 더 빠르겠지.”
파파팡! 터어엉!
“떠올려 보게. 그때의 경험과 무력함을.”
퍼어어엉!
“자네는 기로써 공간을 점하는 이 깨달음에 어떤 식으로 대응했었지?”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공간?!’
그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고금제일마 이천상의 묵직한 가르침이었다.
- 칼을 이해할 수 있다면, 지금 나의 무공을 어찌 막아야 할지도 알 수 있겠지.
- 기의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천지자연의 기운과 공명하여 공간을 점했던 구대천마 이천상의 능천마라수(凌天魔羅手).
순간 서량의 안광이 시뻘건 핏빛으로 돌변했다.
콰앙!
두 발이 땅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아악!
구유마공 열세마왕공포식.
세상을 찢고 나온 마왕이, 이제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