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사마합일(邪魔合一) (6)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천하와 하나가 되다니요?”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하니, 그 늙은이가 신화경에 오르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담사영은 나나 너와는 다르다. 그 불같은 욕망은 실로 마(魔)에 어울리는 것이지만, 그는 이미 스스로를 한계 지었다.”
“어떤 한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호사가들이 말하는 경지, 바로 신화경에 이르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를 한계 지었단 말이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우우우우웅.
투명해졌던 이천상의 발끝이 다시 불투명하게 변했다. 마치 이천상 스스로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듯했다.
“한계 지었다고 말했지만, 애초에 담사영은 그 영역에 오를 자격이 없다. 운명이나 숙명에 관해 얘기하는 게 아니야. 그는 타오르는 욕망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지만, 그 이상을 넘보지는 못했다.”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본디 욕망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삶을 개척할 수 있지만, 동시에 욕망이 가득하기에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어.”
“하지만 사부님은 그러한 경지에 오르셨잖습니까.”
“그랬지.”
이천상이 진짜 대단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의 욕망은 지독할 정도로 순수했다. 그 순수한 욕망이 천하 최강자로서의 인생을 부여했고, 나아가 하늘마저도 겁박했다.
가히 전무후무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욕망이었다. 욕계의 제왕이라는 파순(波旬)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바로 이천상일는지도 모른다.
“내가 신화에 올랐던 것은, 나의 재능과 별개로 하늘이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화에 오르지 않고 끝없이 깊어졌다면 중원을, 나아가 지상의 모든 것을 불태웠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야.”
새삼 소름이 돋았다.
예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경지에 오르니 더더욱 이천상이 대단해 보였다.
한 인간의 욕망이, 의지가 얼마나 강하면 하늘마저도 겁박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지독한 욕망이라야 천도(天道)마저 거스를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세상을 불태운 직후라도 신화의 세계에 오를 수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예 다른 차원에서 사시는군요. 제 머리로는 그러한 삶을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
이천상이 고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사부님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약한 사람이 상처를 입으면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되지.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사부님이 약한 사람이었다고요?”
이천상은 그 부분에 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담사영은 약자가 아니었다.”
“…….”
“그는 언제나 강자였어. 상대적이긴 했지만.”
“그런 그가 천하와 합일이 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천룡기(天龍氣)다.”
“……!”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천룡기의 근간은 천축국(天竺國) 뇌음사(雷音寺)다. 시간이 흘러 뇌음사는 대뢰(大雷)와 소뢰(小雷)로 나뉘었으며, 종국에 천룡사(天龍寺)라는 집단으로 바뀌어 악불(惡佛)을 숭상하였지.”
“악불…….”
“석가(釋迦)는 사고(四苦)를 통한 지난한 수행을 겪은 후 부처가 되었다. 바로 그 석가가 태어난 곳이 천축이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천룡기를 근간으로 한 공부는 소림이나 본교보다도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천룡기가, 담사영이 천하와 합일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말씁이십니까? 아니, 신화경에 오르지도 못한 자가 어찌 천하와 합일될 수 있습니까?”
“너도 이미 보았을 것이다. 천룡기가 주인과 하나가 되어 성장, 이후 주인을 파멸로 몰아가는 광경을.”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송금백.”
“그렇다.”
이천상의 눈가에 시커먼 뇌전이 번뜩였다.
“천룡기의 무서움은 술력(術力)의 극대화가 아니다. 천룡기의 본질은 ‘잠식’과 ‘붕괴’다.”
잠식, 그리고 붕괴.
순간 서량이 떠올린 것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대호법 무담의 모습이었다.
극마지경에 오른 초고수 무담. 그러한 경지에 오른 자가, 제아무리 천룡궁주가 직접 나섰다 한들 그리 무기력하게 꼭두각시가 되어 버렸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송금백도.
‘수기(水氣)를 이용하든 어쩌든, 결국 천룡기 자체에 그러한 특성이 있었다는 것이군.’
판마정에서 읽은 천룡기를 통한 괴뢰화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소름이 돋을 만큼 대단한 일이다. 천하를 논할 만한 고수를 순식간에 괴뢰화(傀儡化)할 수 있다니, 세상 어떤 사술이 그처럼 놀라운 공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담사영은 옛날부터 천룡의 술법 모두를 깨우치고 있었다. 하나 딱 거기까지였어. 그는 천룡기의 본질을 몰랐고, 지금도 모르고 있다.”
“천룡궁주도요?”
“모른다. 본디 기(氣)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선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담사영이나 천룡궁주나,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진 못했지. 너와는 다르게.”
“…….”
“다만, 담사영이 품고 있는 세속의 욕망이 천룡기의 본질을 깨울 것이다.”
서량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욕망으로…….”
“천룡기를 분해한 기운이 천하 각지에 도사리고 있다. 지금의 나로선 담사영이 그것을 어찌 다룰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담사영은 필시 그 모든 힘을 손에 넣으려 할 것이다.”
천룡기를 분해한 기운이라면 필시 혈신기(血神氣)를 뜻하는 것이리라.
천룡궁주 무명은 혈신기가 폭발하면 그 지역에 사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정도의 기운을 한둘도 아니고 무수히 많이 취할 수 있다면?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 되는 것이지.”
“…….”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길고 긴 얘기를 이어 가던 이천상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흔들리지 않는구나.”
“예.”
“두렵지 않느냐?”
“놈이 어떻게 변하든, 저는 놈을 죽일 겁니다. 그리고 지금껏 저는 죽이겠다 마음먹었던 적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
“담사영은 죽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손에.”
이천상의 미소가 짙어졌다.
“너다운 자신감이다.”
꽤 충격적인 얘기였지만 결국 변하는 건 없다.
‘보여.’
서량은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그것이 확정적인 미래인지, 단순한 목표인지는 모르겠다. 뭐가 됐든 서량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담사영이. 쓰러진 담사영 앞에 서서 운명의 숙적을 물리친 것을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이.
푸스스.
이천상의 발끝이 다시 투명해졌다.
이제는 굳이 막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발부터 정강이, 허벅지까지 서서히 투명해지는 일련의 과정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서량이 물었다.
“가십니까.”
“간다.”
“또 뵐 수 있는 겁니까?”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묻힌 곳에 이불을 깔아 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좋은 이불을 깔아 주면, 그때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답지 않은 농담이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자꾸 그러시면 거적때기를 깔아 드릴 겁니다.”
“사부를 공경하지 않는 못난 제자로 남고 싶다면 그리해라.”
“하하하!”
다시 이천상을 만났을 때, 서량은 반가움과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천상을 보낼 수 있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너도 몸 챙겨라.”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스스스스.
투명화가 이천상의 명치까지 진행되었다.
“천룡기가 그렇게 대단한데, 저의 마공으로 대적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순간 이천상의 표정이 과거 구대천마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군림마황기(君臨魔皇氣)가 파괴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천지에 존재하지 않으며, 네가 만든 구유마공이 집어삼키지 못할 의지는 어디에도 없다.”
“…….”
“너를, 그리고 본교의 역사를 믿어라.”
“알겠습니다.”
서량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얘기,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잊지 마라.”
이천상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남았다.
“너는 이 내가 유일하게 인정한 천마(天魔)다.”
“……은가?”
“…….”
“서 교주.”
“헉!”
서량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송금백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자네, 괜찮은가?”
서량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깨달음의 순간, 천문을 개방하고 천기의 부름을 거부했던 그때부터 스승 이천상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까지.
시간이 거의 지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괜찮은 것 같군.”
“그렇다면 다행일세.”
의아함으로 물들었던 송금백의 얼굴에 종전의 놀라움이 깃들었다.
“자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래.”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였어. 아주 잠깐이지만.”
송금백의 입이 충격으로 벌어졌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봤다니 알겠지만,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버티지 못해.”
“……그런 것 같더군.”
송금백은 혀를 내둘렀다.
“자네는 만날 때마다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는군. 설마하니, 그 잠깐의 대련으로 신화의 경지를 엿볼 줄 몰랐네.”
“오르지도 못할 나무, 들여다봐 봤자 의미도 없어.”
“한 번 보았던 경지라면 훗날 반드시 오를 수 있을 걸세.”
“그렇긴 할 테지만…… 기억이 안 나.”
“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수많은 단계를 건너뛰고 그 경지를 엿볼 수 있었는지. 다시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한 번 놓친 깨달음은 예전보다 더 멀어져 버린다. 마치 꿈의 기억을 좇으면 좇을수록 점점 더 희미해지는 것처럼.
“그건…… 좀 아쉽군.”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지금의 내가 버틸 수 있는 경지도 아니고, 신화경에 오른다고 무공이 성장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고자 한다면 어떤 조화라도 일으킬 수 있는 경지가 신화경이다.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으니, 이천상처럼 자연재해에 가까운 힘을 구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무공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신(神)의 힘이다.
말하자면, 극치에 이른 무공이란 지금의 서량이 손에 넣은 힘과 같은 것이다.
화르르르륵.
송금백의 눈이 흔들렸다.
‘백열(白熱)…….’
서량의 손에서 뿜어지는 핏빛 화염.
그 화염의 중심부에 하얀 광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적백(赤白)의 화염, 군림마황기의 소천겁화(燒天劫火)에 필적하는 마화(魔火)였다.
“언제쯤 오를까 궁금했는데, 세계의 이면을 엿본 대가로 더 높은 곳에 발을 디디다니.”
구유마공의 지옥문은 총 다섯 개가 존재한다.
그중 첫째가 지저옥관귀문식(地底獄官鬼門式)이요, 둘째가 마관상천지문식(魔觀上天知門式)이며, 셋째가 열세마왕공포식(裂世魔王恐咆式)이다.
그리고 지금, 네 번째 지옥문이 열렸다.
“……신마종도식(神魔終道式).”
지금의 군림마황기로는 온전히 버틸 수 없는 천기(天氣)를 나눠 받아들인 구유마공의 폭발적인 성장.
서량이 주먹을 쥐었다.
화라락!
적백의 화염이 사그라들었다.
“전쟁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