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염라마신(閻羅魔神) (5)
“이제 시작이오?”
“그렇습니다.”
“후우.”
주천양이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이거 긴장되는군.”
천하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한판 승부.
몇 달 만에 끝날 수도, 몇 년이나 지속될 수도 있는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담사영이 고개를 조아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하하,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애써 호탕하게 웃고는 있지만 긴장이 사라지질 않는다.
주천양은 패륜을 저질렀다. 만일 이번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아버지의 손에 죽는 것은 물론이요, 역사에 그 악행이 새겨질 것이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패륜을 저지르든 어쩌든, 승자가 되면 반정(反正)으로 기록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역적으로 만세에 치욕을 당할 것이다.
주천양은 자신의 이름 석 자가 후인들의 머리에 황제(皇帝)로 남기를 원했지, 패륜을 저지른 역적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주천양이 눈을 빛냈다.
“옥새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오?”
옥새는 저쪽에 있을 겁니다.
담사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사실 그 역시 아직은 확신할 수 없기도 했다.
그러나 가능성을 논하자면, 이미 옥새는 놈들의 손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음지(陰地)의 수색꾼들이 백방으로 찾고 있으니, 너무 심려는 마시옵소서.”
“흐음. 그것참, 옥새 하나가 이렇게까지 골머리를 썩일 줄이야.”
담사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주천양의 목소리가 어딘지 이상했다.
담사영은 이제 주천양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알고 있었다. 목소리의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그의 심정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 담사영이 봤을 때, 주천양은 그리 조급해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주천양이 짧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었다.
“수색꾼들이 계속 옥새를 찾게 놔두는 건 괜찮소. 괜찮은데…….”
“예?”
주천양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지 않소?”
“무슨 말씀이신지…….”
“만에 하나라도 저들이 이기면, 놈들은 천하의 주도권을 손에 넣을 거요. 다만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서라도 황궁을, 아버지를 살려 둘 수밖에 없겠지.”
“물론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이긴다면, 당연히 황궁은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게 될 것이오. 이후 본 황제와 담씨 일가는 누천년 세월 동안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겠지.”
“…….”
“이상하지 않소?”
“어떤……?”
“황제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위치에 있소. 나라의 이름을 바꾸는 것도, 수도를 옮기는 것도 전적으로 황제 마음이라는 거요.”
주천양이 서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옥새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소?”
담사영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설마…… 옥새를 새로 만드실 생각이신지요?”
“하하, 나한테 무슨 재주가 있어 옥새를 만들겠소? 이름난 명공이 만들어야지.”
그 말이 결국 그 말이다.
담사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황태자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주천양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불가하다?”
하늘 같은 존재에게 불가하다니? 단어 선택이 참으로 불경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담사영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니, 물러서선 안 되었다.
“옥새는 황궁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절대적 권력의 상징입니다. 황궁의 성벽이 풍화에 쓰러져도 옥새만큼은 온전해야 합니다. 옥새란 단순한 상징을 넘어, 국가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 핵심 요소를 새로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소.”
“설령 새로이 만든다 한들, 그 역시 차후에 진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담사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천양 앞에서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표정이었다.
“새로 만들어도 무방할 물건이었다면, 저희 역시 진즉에 새로 만들자 건의했을 것입니다. 하나 그러지 않은 것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옥새라는 물건의 가치 때문이옵니다.”
“흠.”
“역사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닙니다. 하물며 황제의 상징이라는 옥새는 말할 것도 없지요.”
담사영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답답하시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소신이 기필코 옥새를 찾아 전하의 품에 안겨 드릴 것이옵니다.”
물끄러미 담사영을 내려다보던 주천양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오. 내 긴장하여 잠시 헛소리를 했소이다.”
“전하.”
“내가 그대의 충심을 어찌 모르겠소. 답답해서 한 소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구려.”
“소신의 충정을 이해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주천양은 이렇게 한 번씩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놀라움 대부분이 부정적인 쪽이었지만.
“그렇다면 말이오.”
“예?”
또 무슨 말을 할 생각이지?
담사영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또 한 번 헛소리를 지껄이면, 이번만큼은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담사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천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옥새가 없어져 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소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도, 저쪽도 옥새를 찾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옥새의 행방을 알아내 선제 탈취할 것이 아니라, 옥새 자체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은 어떻소?”
“……?!”
담사영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옥새를 없앤다?’
설령 그리 결심했다 해도, 어디에 있는 줄 알아야 없애든 말든 할 것 아닌가.
하지만 담사영은 주천양의 그 말에 묘한 끌림을 느꼈다.
‘옥새 자체를 없애 버린다……. 그게 가능할까?’
주천양은 마교 쪽에서 옥새를 찾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면, 담사영은 그곳의 위치를 선점하여 미리 빼앗는 데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담사영은 마교가 이미 옥새를 손에 넣었을 거라 생각했다.
‘불가능해. 차라리 옥새가 아직 중원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면 모를까. 아니, 그렇다면 굳이 없앨 필요도 없지. 먼저 가져오는 쪽이 명분을 안고 가는 거니까.’
하지만 마교가 옥새를 쥐고 있다면?
그리고 그 옥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수 있다면?
‘양쪽 모두에게 명분은 사라진다. 남은 것은 결국 누구의 힘이 더 강한가, 누가 승자가 되는가뿐이야.’
담사영이 고개를 숙였다.
“상황 보고는 반나절에 한 번씩, 특기할 만한 상황이 나오면 즉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괜한 불안에 성심(聖心)이 흔들릴까 저어되오니, 이만 편히 쉬시지요.”
주천양은 괜스레 머쓱했다.
“알겠소이다. 허! 확실히 나도 긴장하긴 한 모양이오. 오늘따라 되지도 않는 소리만 잔뜩 늘어놨군.”
담사영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헛소리만 지껄인 건 아니지. 다행히도.
* * *
“후우.”
단리후가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긴 왔군.”
저 멀리 빽빽한 산악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날씨도 어딘지 모르게 습했고, 대낮인데도 하늘이 어두침침했다. 당장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하늘은 어둡고 공기는 습하며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숲과 산뿐이니, 진군하는 게 힘겨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리후는 이 지형이, 날씨가 마음에 들었다.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밀림을 파헤치고 진군하는 격이다.
몸은 힘들지라도 적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 하나만으로도 험지를 돌파할 가치가 충분했다.
오천의 황군 역시 하나하나가 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정도 험지를 돌파하는 데에는 그리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단리후가 이끄는 병력이 귀주성(貴州省)에 진입했다.
귀주성은 중원 본토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북으로는 사천성이, 서쪽으로는 운남성이, 남쪽으로는 광서성이, 동쪽으로는 호남성이 인접해 있다.
내륙임에도 고도가 높고 환경이 거칠었다. 마치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원시시대의 밀림 그대로의 외양과 같았다.
단리후가 외쳤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남하할 것이다! 속도는 올리되, 무리는 하지 마라!”
단련된 고수라도 오랫동안 밀림을 돌아다니다 보면 체력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힘이 다 빠진 채로 싸울 수는 없었다. 좀 더뎌지는 한이 있더라도 교전 시 충분한 힘을 낼 수 있도록 적절한 휴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단리후가 이끄는 병력은 닷새에 걸쳐 천천히 남하했다.
워낙 습하다 보니 식량 관리도 어렵다. 하지만 단리후를 위시한 몇몇 고수들은 천룡술법에 능했다.
번쩍!
습기를 몰아내고 맹수와 독충의 접근까지도 막아 내는 신묘한 술법.
이것이 바로 술법의 무서움이다. 엇비슷한 경지라고 보았을 때, 무공을 익힌 자에게는 불가능한 수법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오천이 넘는 병력은 생각보다 훨씬 쾌적한 상태로 귀주성 중앙을 가르며 내려올 수 있었다.
“정지!”
단리후가 외쳤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룻밤 동안 휴식을 취할 것이다! 푹 쉬도록!”
하룻밤을 통째로 쉬겠단다.
기뻐할 만도 하건만 오천 황군은 무덤덤한 기색으로 제각기 흩어져 휴식을 취했다. 그들끼리 알아서 보초까지 세웠다.
그야말로 정예병이었다.
따로 명령하지 않아도 지극히 전투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훈련받은 것 같았다.
일희일비하지 않도록 잘 연마된 투쟁심.
그 고요한 투쟁심은, 어떤 의미로는 천하 일절의 무공과도 같았다.
‘저런 건 무림인들이 배워도 괜찮겠어.’
무림에선 개개인의 힘이 워낙 강하니 뭉치기가 쉽지 않다.
만약 무림인들이 저 황군처럼 똘똘 뭉쳐 싸운다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전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불가능했다. 무림인들이란 족속은 결코 한데 뭉치려 들지 않으니까.
‘한 군데를 제외하면.’
단리후의 눈이 남동쪽을 향했다.
‘무림 단체 중 마교가 가장 똘똘 뭉쳐 있다.’
신(神)을 모시는 종교 단체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도불(道佛)의 가르침을 따르는 소림이나 무당과는 또 달랐다. 저들에게는 마신(魔神)이야말로 유일신이자 억겁의 순환을 주관하는 창조신이다. 그들은 신을 지키기 위해서 영혼까지도 기꺼이 바칠 것이다.
‘부럽군.’
만일 천룡궁도 궁주를 향한 신심(信心)이 각별했다면, 지금 이런 꼴이 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아.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천하는 우리 손에 들어온다. 그리만 된다면…….’
천룡궁 역시 저 마교처럼 궁인(宮人)들의 숭배를 받게 될 것이다. 기어이 그렇게 만들고야 말리라.
“신장(神將)님, 어디 가십니까?”
단리후가 담담히 말했다.
“아군의 수장을 만나러.”
“예?”
“우리와 함께 마교를 급습할 존재들이 있네. 그렇게만 알아 두게.”
팍!
혼자가 된 단리후는 순식간에 밀림을 주파했다.
그렇게 이백 리를 넘게 남하한 그의 눈에, 마침내 저 멀리 절벽 위 공터에 서 있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단리후의 안광이 번뜩였다.
사삭!
움직인다 싶더니 어느새 절벽 위다.
실로 무시무시한 신법이었다. 그동안 각고의 노력이 있었는지, 과거 서량에게 쫓겼을 때보다 훨씬 더 발전한 신법을 보여 주었다.
상대 역시 단리후의 신법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뵙소. 내 이름은 단리후, 황군의 제이신장(第二神將)이오.”
“반갑다.”
중년 사내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혈랑의 주인이자 야수궁의 주인 극랑(克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