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화. 마신출도(魔神出道) (1)
극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르르륵!
숲이 불타고 있었다.
야수무학은 근본적으로 신체를 맹수처럼 만들고 피부와 골육을 강철처럼 만든다. 때문에 어떤 험지라도 손쉽게 주파할 수 있다.
그래서 야수궁의 전사들은 짐승들의 길을 선호했다. 추적자들이 흔적을 볼 수 없는 곳, 그러면서도 자연적으로 가장 빠른 길을 택하는 것이다.
어떠한 고수도, 설령 화경의 고수도 그 길은 모른다. 경지의 차이가 아니라 환경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한데 그 길이 중간부터 뚝 막혀 버렸다.
아니, 막힌 정도가 아니었다.
쿠구구구궁!
까맣게 탄 수십 그루의 나무가 강한 충격과 함께 땅 밑으로 꺼져 버렸다.
단단한 지반이 쪼개지며 중간부터 무너졌다. 화염과 재가 날리는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뭐야?!’
쿠르르릉.
몰려오는 먹구름 속에서 천둥 번개가 휘몰아쳤다.
크릉.
붉은 눈을 한 거대한 늑대가 극랑의 옆에 섰다. 그 덩치가 어지간한 호랑이보다도 컸다.
극랑의 눈이 깊어졌다.
“대랑(大狼). 너도 읽지 못한 거냐?”
대랑이라 불린 늑대가 이빨을 드러냈다.
대랑은 혈랑의 지파에서 키우는 가장 강력한 마수(魔獸)였다. 게다가 극랑이 궁주가 되면서 전대 궁주였던 천호의 호왕만큼 강해졌다.
힘만 강해진 게 아니라 감각 역시 짐승의 그것을 초월했다. 세상천지 대랑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술법인가? 아니면 천재지변……?’
천재지변이라도 대랑은 알아챈다. 호왕은 신체 능력을 극단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 살상력을 극대화한 마수였다면, 대랑은 초감각을 연성한 마수였다.
그런 대랑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콰아앙!
불타오르는 땅 너머로 거센 진동이 일었다.
극랑과 대랑, 그리고 이백의 야수궁 정예들이 굉음이 난 곳을 보았다.
“헉!”
“저, 저건?”
크르르르.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 한 마리 거대한 호랑이가 위풍당당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극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 호왕?!”
커어엉! 커엉!
이백 정예들 뒤에서 따라오던 거대한 늑대들이 호왕을 향해 마구 짖었다.
송아지만 한 늑대들 수십 마리가 우짖는 소리에 불길마저 주춤하는 듯했다. 실제로 새로이 만든 혈랑(血狼)들의 포효는 무림 고수의 음공(音功)에 필적할 정도였다.
하지만 혈랑들의 포효는 평소와 달랐다.
‘겁을 먹고 있다.’
극랑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혈랑들이 겁을 먹고 있어.’
짐승의 본능 중 전투에 필요한 부분만 극도로 발달시키고 불필요한 본능을 싹 죽인 혈랑들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짖어 대기만 한다.
생물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인 죽음 앞에서도 적을 물어뜯는 마수가 바로 혈랑이었다. 그런 혈랑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극랑은 믿을 수가 없었다.
혈랑들이 공포에 질린 것도, 그리고 저 불길 속에서 전대 궁주의 호왕이 나타난 것도.
“뭐 하는 것이냐!”
극랑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 더러운 배신자 놈! 마교주 밑으로 들어가 치졸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더니, 예가 어디라고 감히!”
주인이 죽으면, 주인과 수왕의 술법으로 연결된 짐승 역시 얼마 못 가 죽거나 약해진다.
전대 궁주 천호의 술법은 지독하리만치 깊고 악랄했다. 그 정도로 얽혔다면 호왕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야 정상이었다.
콰아앙!
호왕이 하늘을 날았다.
극랑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럴 수가!’
지반이 무너지며 거대한 절벽이 생겨난 뒤다.
절벽과 절벽 사이의 거리는 초절정고수인 극랑조차도 넘기 힘들 만큼 멀었다. 한데 그 엄청나게 먼 거리를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뛰어넘은 것이다.
쿠우웅!
천 근이 훌쩍 넘는 거체가 내려서자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
극랑의 눈이 커졌다.
‘크다!’
컸다.
과거 천호가 키웠을 때도 야수궁 내 어떤 마수보다도 거대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흑황(黑黃)의 줄무늬를 이루는 굵은 털이 화염처럼 넘실거렸다. 실제로도 커졌지만, 털도 조금 더 길어져서 그런지 더더욱 장대해 보였다.
게다가 저 눈.
번쩍!
천호 휘하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진하고 깊은 핏빛 안광에 밀도 높게 들어찬 것은 파괴 의지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눈빛에서는.
“마기(魔氣)?!”
극랑이 입을 쩍 벌렸다.
“네, 네놈 설마!!”
그때였다.
콰르르릉! 번쩍! 콰아앙!
호왕이 도약한 저 머나먼 절벽 쪽.
그곳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내리치는 시퍼런 번개가 땅을 연신 때렸다.
번쩍! 번쩍! 콰르르릉! 퍼억!
사람인가, 괴물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가까워질수록 쏟아지는 번개의 위치도 가까워졌다.
마치 벼락을 몰고 다니는 뇌신(雷神)과도 같았다. 사람이나 짐승의 인지 능력으로는 그 불가해한 존재의 진체(眞體)를 볼 수 없었다.
콰아앙!
떨어진 벼락 하나가 기어이 절벽 끝을 후려쳤다.
어찌나 강력한 위력이었는지 박살 난 돌무더기 수천 근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극랑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너무 놀라워서 입도 열리지 않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에 사고마저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뇌수(雷獸)?!’
뇌수. 벼락을 일으키는 짐승.
산해경(山海經)에도 뇌수라는 직관적인 이름으로 등장하는 요물이 있었다. 길고 거대한 꼬리와 굴강한 발톱, 네 개의 발에 개나 여우에 가까운 외양을 한 존재였다.
‘설마 진짜 뇌수가 세상에 있었단 말인가!’
그때였다.
번쩌억!
유달리 크고 강한 벼락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순간 극랑은 볼 수 있었다.
‘……!!’
뇌수가 맞다.
호왕의 털보다 훨씬 더 밝고 신비로운 장모를 휘날리는 괴수(怪獸).
황금빛 여우의 외양을 한 뇌수는 거의 호왕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했다.
분홍빛 영롱한 동공과 매끈한 선을 그리는 뾰족한 주둥이, 그리고 길고 곧게 뻗은 네 개의 다리와 우아하게 살랑거리는 몸통만 한 꼬리. 실로 하늘을 유영하다가 벼락이 쏟아질 때 함께 내려와 온갖 생물을 해한다는 전설 속 뇌수의 형상 그대로였다.
하지만 극랑은, 곧이어 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번쩍! 번쩍!!
쏟아지는 벼락이 더 진해졌다. 하지만 더는 땅에 꽂히지도, 나무를 쪼개지도 않았다. 그저 허공에 강렬한 잔영(殘影)을 일으키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잔영을 남긴 벼락의 형상은 시커멓기만 했다. 분명 내리치는 그 순간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환한 백광(白光)인 줄 알았는데 사라지고 나서는 한없이 시커메서, 사실은 처음부터 묵광(墨光)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벼락을 부르는 존재는, 거대한 여우 괴물이 아니었다.
번쩍! 쿠르르릉.
자흑색 거대한 칼날 위에서 방전하던 회흑색 뇌광(雷光)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와 하늘 높이 올라갔다.
그 응축된 뇌기(雷氣)가 먹구름 속으로 숨으면, 그 먹구름이 수십 개의 벼락을 뿌려 세상을 공포로 몰아간다.
사람의 지식과 상식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광경이었다. 대체 어떤 이치인지, 무슨 조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저 여우 괴물의 등에 탄 존재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으리란 것을.
화아아아악!
황금빛 여우 괴물이 절벽 끝에서 멈추자 뜨거운 바람이 밀려왔다.
카가가가각!
극랑은 본능적으로 등 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뽑혀 나온 대검(大劍)은 늑대의 이빨처럼 날이 삐죽삐죽했다. 극랑의 애병인 아랑신검(餓狼神劍)이었다.
“……!!”
정작 검을 뽑긴 했지만, 그걸 휘두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휘두를 생각을 하고 뽑은 게 아니었다. 위기를 느낀 본능이 알아서 검을 뽑게 만든 것이다.
극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뭐지?’
훅 끼쳐 드는 열풍(熱風)은 용암과도 같았다.
실제로 그 정도로 뜨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다.
감각의 교란이다. 바람에 실린 폭발적인 기운이 생물체의 감각과 기(氣)에 엄청난 혼란을 주고 있었다.
비로소 극랑은 깨달았다.
그 바람에 실린 기운은 인간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절대마기였다는 것을.
“뿌리를 뽑진 않았지만, 다시 고개를 쳐들려면 십 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거늘.”
오싹!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숨 막히는 저음이 극랑의 전신에 소름을 돋게 했다.
“역시 야생이군. 한 차례 굴복시켰다 한들 틈만 보이면 물어뜯는다, 이건가?”
거대한 칼날을 든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들려오는 웃음이 악당의 그것과 상동(相同)했다.
“천하를 손에 넣은 후, 너희의 처우를 어떻게 결정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번쩍!
호왕의 혈광 가득한 동공이 적백의 광채를 뿜었다.
“고맙다, 고민을 덜어 줘서. 역시 잔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뽑아 버리는 게 좋겠지?”
순간 극랑은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지극한 살기(殺氣)였다.
“피해라!!”
번쩍!
자흑색 거대한 칼날을 단 욕계신(欲界神)의 대도(大刀)가 허공을 갈랐다.
퍼어어억! 파지지직!
빛살처럼 나아간 칼이 극랑의 뒤에 도열하고 있던 야수궁의 전사들과 혈랑들을 인정사정없이 유린했다.
퍼억! 퍼어억! 파지지지직! 콰앙!
섬뜩한 굉음이었다. 사람과 짐승의 육신이 북 터지듯 터져 나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피와 살점은 적백의 화염이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다.
뇌공의 칼, 겁화의 심판이다.
깊은 연관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성질인 뇌화(雷火)를 동시에 다루는 파괴신의 강림이었다.
딱딱딱.
극랑의 이빨이 위아래로 마구 부딪쳤다.
이기어도술(以氣馭刀術).
도검(刀劍)을 휘두르는 무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다. 심검(心劍)이라는 지고한 경지를 제외하면, 무공이 자아내는 물리력으로는 어검술만 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 마신(魔神)의 어검술은 또 달랐다.
거대한 칼날을 이루고 있는 회흑색의 뇌광은 그 자체로 파괴의 끝이며, 칼날이 지나가고 남는 자리를 불태우는 적백의 화염은 소멸의 극점이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무공 앞에 절대(絶代)라는 말을 붙여도 아무런 위화감을 주지 않는 무적의 신위가 여기에 있었다.
부르르르.
극랑의 사지가 덜덜 떨려 왔다.
조금만 더, 한 걸음도 아니고 반걸음만 더 내디디면 전대 궁주처럼 화경에 오를 수 있다. 그의 무공은 그렇게나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무적의 마신 앞에서는 초절정고수니, 화경의 고수니 하는 등급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것을 파괴한다.
마(魔)의 황제(皇帝) 위에서 군림하니(君臨魔皇氣) 신(神)이요, 저승 깊은 곳 지옥을 다스리니(九幽魔功) 죽음의 왕(閻羅)이다.
죽음의 왕 염라, 마도의 신 마신.
마침내 세상에 나와, 지닌바 무적의 마력을 뽐내는 염라마신(閻羅魔神)의 절대무공은 야수궁주 정도의 무공으론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죽여라.”
묵직하게 들려오는 마신의 목소리에 호왕이 포효했다.
콰직!
극랑의 상반신이 통째로 호왕의 거대한 아가리 속에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