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화. 마신출도(魔神出道) (5)
“오, 자네 왔나?”
“오랜만이외다.”
광마존은 놀란 눈으로 고루마존을 보았다.
우웅. 우웅.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마기가 그 격에 맞는 마기와 만나 가볍게 동조한다.
지금껏 신교 내에서 자신의 마기에 비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교주님께서 계셨지만, 그분의 마기는 천하 모든 마(魔)의 정점인지라 비교가 불가했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마침내 원로원 최강자인 자신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는 격을 지닌 자가 나타났다.
“얼마 전 교주님을 구하러 호북으로 향하다가 크게 당했다고 들었네. 한데 지금 그 모습을 보니, 자네가 당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구먼.”
고루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외양과는 달리 마존 중 가장 유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자가 그였다. 하지만 성품이 그렇다는 것이지, 고루마존은 남들 앞에서 쉬이 웃음을 보여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웃는다. 여유가 있다는 뜻이리라.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에 나름의 성취가 있었소.”
“교주님께서?”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다만 다 죽어 가는 이 몹쓸 늙은이를 살리는 과정에서, 우리가 상상도 못 할 방법을 쓰신 것이 분명하오.”
“허허허.”
“귀하게 얻은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오. 아직 원주에 비할 바는 아니외다.”
“자네도 아직 젊어. 그 연배에 이 나의 마기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성취를 이루었다면, 십 년 내외로 나를 넘어설 수 있을 걸세.”
광마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들어 봤겠지만, 호사가들이 종종 이런 얘기를 떠들곤 하네. 천마신교는 천마(天魔)만이 오롯하다고, 오직 천마만을 조심하면 된다고들 말하더군.”
“알고 있소.”
“그것은 저 무지한 놈들이 본교의 전력을 낮게 보는 것이 아닐세. 그만큼 천마라는 존재에 큰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네.”
광마존이 고루마존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나, 지금 자네를 보며 알았네. 그 말은 사실이야. 진정한 천마(天魔)는 마(魔)에 종속된 이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존재지. 진정 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야.”
“그렇소.”
“그리고 우리는, 전(前) 세대에 이어 다시 한번 하늘에 도전할 만한 역량이 되는 또 하나의 신이 통치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네.”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광마존은 크게 웃었다.
“참으로 좋네. 참으로 좋아. 설령 마도천하를 이루지 못할지라도, 나는 그분과 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네.”
“그러나 마도천하는 분명히 이뤄야 할 것이오.”
“물론 그래야지. 그걸 위해 이곳에서 수개월 간 찬바람을 맞고 있지 않았겠는가.”
신교에서 보내는 보급이 철저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고수들이라도 몇 달씩이나 버티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보급은 중요했고, 소연심은 전선을 향한 보급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해서, 자네가 다시 이곳으로 온 이유가 무엇인가? 호남 전선은 나와 천마군만으로도 충분할 터인데.”
“교주님께서 명을 내리셨소.”
“물론 그랬겠지.”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될 터이니, 한 전선에 수장이 둘은 있어야 기동성이 확보된다고 하시더이다.”
“흐음.”
광마존의 눈이 반짝였다.
“기동성이라…… 그렇다면 역시나 전면전보다는?”
“그렇소. 국소적인 전투로 세력전의 우위를 점하는 방식으로 싸울 확률이 높소. 그리고…….”
고루마존이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교주님께서 원주께 직접 보내신 서신이오.”
광마존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신(聖神)의 교지(敎旨)라면 예를 갖추고 받는 것이 마땅했다.
공손하게 서신을 받아 펼친 광마존의 눈이 반짝였다.
“허허, 교주님께서 이 늙은이에게 참으로 막중한 임무를 내려 주시는구먼.”
“무어라 적혀 있소?”
광마존이 고루마존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고루마존의 눈이 커졌다.
“날 호남, 강서, 절강 세 개 성을 아우르는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로 임명하셨네.”
“영광된 교지외다.”
“영광되지만, 그만큼 부담도 크네. 게다가…….”
서신의 마지막 줄을 읽은 고루마존의 얼굴에 은근한 흥분이 일었다.
“전쟁의 자유를 준다…….”
전쟁의 자유.
그 말인즉, 광마존을 수장으로 둔 원로원과 천마군에게 마음대로 싸워 보라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야말로 파격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엄청난 권한이었다. 수하의 능력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으면 언감생심 떠올리기조차 힘든 생각이다.
광마존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노신이 말년에 이토록 큰 영광을 안아도 되는 것입니까.’
수하의 능력과 실력을 믿는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능력에 앞서, 사람 자체를 신뢰하지 않으면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없다.
구대마존과 천마군의 힘이라면 천하에서 감당할 만한 조직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처럼 거대한 힘을 마음껏 휘둘러 보라는 것은, 그 수장인 광마존이 반역을 일으킬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뢰라는 것은 때때로 애매하다. 진정 사람을 신뢰한다 한들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다 보면 큰 힘을 안겨 주기 꺼려지게 마련이다.
서량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밀어 줄 땐 확실하게 밀어 준다. 이 정도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 주었으니, 그만한 보답을 해 보라는 뜻이었다.
고루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교주님께서는, 그 무공처럼 배포도 천하제일이 아니오?”
“허허허!”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웃음을 터트리던 광마존이 이내 눈을 빛냈다.
“이 소식, 다른 마존에게도 전달되었는가?”
“물론이오. 총군사 휘하 비각에서 각 마존에게 연락을 전했을 것이오. 아마 이쪽보다도 더 빨리 연락이 닿았을지도 모르겠소.”
“그렇다면 좋네.”
푸스스스스.
소리 없이 흘러나와 어느새 주변 잡초를 시들게 하는 광마존의 마기는 무시무시하게 섬뜩했다.
“명을 내리셨는데 주변 눈치나 보며 때를 기다리는 것도 못 할 짓이지. 아니 그런가?”
“물론이오. 설마하니 교주님께서 우리 늙은이들의 급한 성정도 모르고 이런 명을 내리셨겠소이까?”
“자네 말이 옳네. 해서, 슬슬 움직여 볼 생각이라네.”
광마존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호남의 북쪽은 호북성이다. 그리고 호북성 무당산에는 적의 수괴인 담사영이 있다.
마음 같아서는 부릴 수 있는 전력을 모조리 투입해 본진부터 쓸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담사영은 뱀과 같은 자라 그곳에 어떤 함정을 숨겨 두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 많은 전력이 총공격에 가담하면 전선에 공백이 생긴다.
담사영은 그 공백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사천에는 마왕령이 향했다고?”
“그렇소.”
“당가로군. 당가를 막아서 사천 병력 운용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겠다는 뜻이야.”
확실히 광마존의 안목은 뛰어났다. 호요성처럼 전략 전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수십 년 정쟁을 겪어 온 그의 눈은 대국 전체를 읽어 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좋아.”
광마존의 눈이 반짝였다.
“명을 내리겠네.”
고루마존이 고개를 숙였다.
“삼군도통사의 명을 받겠소.”
“자네는 천마군 일천 병력을 대동하고 하남으로 가게.”
고루마존의 눈이 빛났다.
광마존이 얼굴에 스산한 귀기가 어렸다.
“판을 흔들어 보자고.”
* * *
막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황군 수십이 피를 뿌리며 산화했다.
파아악!
재빨리 거리를 좁힌 교룡조원들이 쏟아지는 공격을 막았지만, 그것은 장포 자락으로 홍수를 막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서걱!
섬뜩한 절단음과 함께 또다시 피 보라가 일었다.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화려함보다는 단순함에, 속도보다는 강함에 집중한 검력(劍力) 앞에서, 집단전 한정 최강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황군의 정예병들이 맥없이 휩쓸려 나가고 있었다.
‘극마!’
무서운 속도로 후미에 따라붙어 평범한 철검을 휘두르는 자.
강단 있는 눈매에,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엄청난 무용을 선보이는 사내는 극마에 이른 고수였다. 언뜻 보기에 초로를 훌쩍 넘긴 듯했지만, 어떠한 젊은이 못지않은 패력강공의 무공을 구사했다.
쩌어어어엉!
“으아아악!”
“버, 버텨!”
무서운 힘이었다.
막강한 일검을 막기 위해 교룡조와 황군이 힘을 합쳐 방진을 짰지만, 천마신교 대호법이 발하는 힘은 능히 태산이라도 쪼갤 듯 엄청났다.
일격에 십여 명이 죽어 나가고 이십여 명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단 한 명이,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삼십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다.
무시무시한 무공. 이것이야말로 마도 총본산 최강의 방패라 불리는 무담의 힘이다.
‘강하지만 오래 지속되진 못해!’
신들린 무공을 구사하지만, 아무리 극마의 고수라도 저 정도 힘을 무한정 휘두를 수 없다. 그것은 천하의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이쪽 병력을 공략하는 자가 무담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콰아아앙!
절도 있는 무담의 공격과는 달리 우악스러울 정도로 거친 무공을 선보이는 자는 철무정이었다.
신장부주, 차기 원로원주로 내정된 극마경의 신진(新進)이다.
신교의 모든 권법과 각법을 섭렵하여 자신만의 무도(武道)를 이룬 희대의 권법가가 구사하는 파괴력 넘치는 공격이 무담의 뒤를 받친다. 왕성하게 꿈틀거리는 마기를 두 주먹 가득 담아 내치니, 어떠한 변식도 없는 깔끔한 공격선을 만들어 낸다.
백팔뇌운포(百八雷雲砲)라는 철무정만의 절기였다. 화포의 포격처럼 날아드는 권경(拳勁)과 권풍(拳風)에 후미의 고수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아가 환희원주 소연심, 그 외에 각 조직에서 신교 운용의 중추를 맡았던 수장들의 미칠 듯한 지원이 더해졌다.
만일 무담이나 철무정 중 한 사람만 있었다면 즉각 전면전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 정도 전력이면 최소한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일장 혈투를 벌일 만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 진영에는 극마의 고수가 둘이나 있었다.
극마, 화경.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진 진짜 괴수들의 전력은 일인 군단이라 칭해진다. 홀로 문파 하나를 감당할 만큼의 전력을 낸다는 뜻이다.
‘제기랄!’
설령 상대를 물리쳐도 이쪽 역시 피해가 극심해진다. 어쩌면 동패구사할지도 모른다.
‘저들 모두를 죽일 확신이 있다면 동패구사라도 상관은 없다만.’
그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위험하다 싶으면 철저하게 뒤로 빠져 힘을 불리고는 다시 공격해 온다. 추격, 공격력, 개인 전술 등 모든 방면이 놀랍도록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이제 슬슬 보일 때가 되었는데.’
초조함으로 가득했던 막번의 눈에 순간 숲 너머의 개활지가 보였다.
막번의 얼굴에 화색이 어렸다.
“전 조원에게 명한다! 이 시간 이후로 사곽망(死槨網) 외, 모든 화기와 암기의 사용을 허한다! 저들의 발을 철저하게 묶도록 해!”
교룡조원들의 눈이 번뜩였다.
퍼퍼퍼퍼펑!
막번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려한 폭음이 울렸다.
무담의 눈이 번쩍였다.
“물러나라.”
파아아아악!
하늘을 뒤덮는 미세한 그물들.
육안으로 쉬이 보이지 않는 그물이었다. 거미줄처럼 얇고 투명한 그물에 지독한 살의가 가득했다.
화르르륵!
무담의 철검에 마기가 불타올랐다.
번쩍! 키이이잉!
사곽망 하나가 반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붙었다.
무담이 외쳤다.
“전원 공격 중지!”
파바바박!
마인들의 추격이 멈추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달라붙은 저 그물들의 너비가 너무 넓고 높아서, 더 이상 진격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철무정이 말했다.
“대호법님. 우회하시지요.”
“아니, 그러지 않을 걸세.”
무담의 서늘한 눈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적측의 군대를 좇았다.
“우리는 이대로 사천으로 빠질 걸세.”
“하면 저들은…….”
“어차피 죽을 놈들일세. 놔둬도 되네.”
무담이 하늘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교주님께서 저들을 맞이할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