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난전(亂戰) (1)
“허허, 좋구나.”
달을 보는 남궁언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깃들었다.
“가주와 함께 이렇게 술잔을 기울여 본 것이 얼마 만이지?”
남궁단이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족히 몇 년은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 오래되었나?”
“저야 가문의 일을 처리하느라 경황이 없었고, 아버지께서는 검도(劍道)에 매진하느라 바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기야 했네만.”
남궁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막상 가주 말을 들어 보니, 내 참으로 못 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검도든 뭐든, 어차피 죽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후인이 있어 전수해 줄 수야 있다지만, 무공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을 안겨 줄 수도 있잖은가.”
“더 가치 있는 것이라니요?”
“가족과의 추억.”
남궁단의 얼굴에 옅은 놀라움이 어렸다. 설마하니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남궁언이 고개를 저었다.
“가주께서도 훗날 나와 같은 경지에 오르게 될 테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나는 가주를 믿네. 가주는 분명 나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경지도 넘볼 수 있을 게야.”
“하하,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남궁언이 남궁단의 잔을 채워 주었다.
“솔직히 말함세. 가주의 재능은 나보다 못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주는 나보다 강해질 수 있을 게야. 왜인 줄 아는가?”
“……?”
“가주가 나보다 선하고 부지런하기 때문일세.”
남궁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공이라는 것이 성격 좋다고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일세.”
남궁언이 잔을 기울였다.
독하지 않은 술, 향이 몹시 고왔다.
“재능은 분명 존재하며, 또한 중요하네. 밭을 갈던 사람이 수십 년간 검을 잡고 휘두른다 한들 검리(劍理)를 깨우치긴 힘들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재능보다도 중요한 것이 성품이요, 삶을 살아가는 자세라네.”
남궁단의 눈이 빛났다.
물론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 성품이나 진지한 자세가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는 그것이 재능보다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말이다. 그 반대되는 경우를 지나치게 많이 접했기 때문이리라.
“일례로, 저 서 교주를 보게나.”
남궁단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서량, 서 교주.
만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생생한 인상이 남은 사람이었다. 젊은 연배에도 이미 일대 종사의 품격을 보여 주던 희대의 천재였다.
“서 교주의 재능은 실로 대단하네. 재능 없이 그리 빨리 강해질 순 없었겠지. 하지만 난 서 교주와 대화하며 깨달았다네.”
남궁언이 탄식했다.
“그이는 참으로 고단하게 사는 사람이었어.”
“고단하게요?”
“치열하게 살아왔으며,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걸세. 아마 평생을 그렇게 살 게야. 하루하루를 목숨 걸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삶이라 할 수 있겠지.”
“하긴, 그도 그렇겠습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 즉, 사람은 다 죽어. 그렇다면 죽기 전까지 그 삶을 가치 있게 가꾸는 것이야말로 지상 과제라 할 수 있겠지.”
“옳은 말씀이십니다.”
“서 교주는, 그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의 격을 올리기 위해 사는 사람일세.”
남궁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듯하면서도 모르겠다.
남궁언이 껄껄껄 웃었다.
“어쩌면 그처럼,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지 않게 살아가고 있기에 강해졌는지도 모르겠네. 듣기로, 서 교주의 스승도 그리 살았다고 하네만.”
“사부라면 전대 천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남궁단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경이가 떠올랐다.
구대천마 이천상.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힘으로 의천맹을 와해시킨 절대무적자다. 그 강함을 형용할 길이 없어서 천마, 절대마신 등의 별호로만 불리는 고금제일의 무신(武神)이 그였다.
“서 교주가 말하더군. 그 양반도 고단하게 살았다고, 평생 본인만의 인생을 즐긴 적이 없다고 말이야.”
“결국, 규격 외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까?”
“반드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그 사제는 그렇게 강해졌던 모양일세. 평범한 사람은 단 하루도 품기 힘든 욕망을 평생 담아 둔 채로.”
남궁단이 고개를 저었다.
“남궁의 성을 갖고 태어나 천하제일이 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만, 사람다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허허, 나도 그렇다네. 그렇다면 나나 가주나 같은 선상에 있다는 말인데, 그때부터는 더 부지런한 사람이 한발 앞서기 마련 아니겠나.”
“아버지께서 저를 잘못 보셨습니다. 사실, 근래 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남궁언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이 이 지경이니 부지런한 사람도 심마에 들 수 있는 게지.”
“하하! 이게 심마였습니까?”
“자신답지 않은 길을 고민하고 있다는 건 분명 심마에 든 것이지. 물론 심마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니, 자신을 다잡는 계기로 생각하면 될 것이네.”
남궁단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용이가 잘 커서 다행입니다.”
남궁언이 미소를 지었다.
“어제 잠시 자세를 봐주었다네.”
“아, 그러셨습니까?”
“쑥쑥 성장하더구먼. 이제는 제법 검객다운 티가 나.”
남궁언의 입에서 검객티가 난다는 말이 나왔다. 극찬이라고 봐도 무방한 칭찬이었다.
“과거, 서 교주가 세가의 자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지간히 큰 자극을 준 모양이더구먼. 용이가 어제도 서 교주에 대해 물어봤더랬네.”
“하하, 그랬습니까?”
“사실, 더 놀라운 것은 화아였네.”
남궁단의 눈이 커졌다.
“화아요? 화아도 봐주셨습니까?”
“손자 무공을 봐주었는데, 손녀라고 안 봐줄까.”
“근래 들어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괜스레 건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부르지 않았습니다만.”
“허허, 그럴 만도 하지. 나름대로 벽을 뚫기 위해 고생이었을 테니까.”
“벽이라 하심은……?”
“화아가 이번 고비만 넘긴다면, 능히 후기지수 중 제일을 논해도 될 것 같네.”
남궁단의 눈이 흔들렸다.
“그 정도였습니까?”
남궁언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달빛 아래, 해사하게 웃는 손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준만 보자면, 당장 제왕검(帝王劍)을 전수해도 모자람이 없을 듯했네.”
남궁단은 깜짝 놀랐다.
제왕검은 남궁세가 최고의 검법이었다. 검법의 위력에 있어서는 능히 정파제일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연성이 어렵다. 해석 이전에 검의 위력을 버틸 만한 육신을 갖추어야 하고, 육신이 완성되어도 고등한 깨달음이 없으면 입문조차 힘들 정도였다.
제왕검을 전수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 말인즉, 남궁화의 육신과 깨달음이 어떠한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는 뜻이다.
“녀석이 벌써 그렇게……!”
남궁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내가 세가를 운영할 때도 가주와 비슷했네. 아니, 오히려 더 심했지. 가문을 부흥시키는 건 물론, 나만의 검도(劍道)를 완성해 내겠다는 욕심으로 꽉 차 있었으니까.”
“…….”
“하지만 그로 인해 신경 쓰지 못하는 것도 많아졌네. 나는 가주가, 나처럼 과한 욕심에 사로잡혀 주변도 둘러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주변을 둘러봐라.
그 말인즉,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남궁단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겠습니다.”
남궁단을 보는 남궁언의 눈빛이 따뜻해졌다.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녀석이다. 젊은 적에는 세가를 위해, 중년이 넘어선 검도를 위해 생을 불사른 자신 밑에서 이토록 선한 아들이 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젊을 적,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선조의 무공을 전수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거늘.’
하지만 무가(武家)인 이상, 더 고급의 무공을 전수하는 것도 어른으로서의 사명일 것이다.
남궁언이 품에서 얇은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받게나.”
“이게 무엇입니까?”
“쉬면서 심심파적 삼아 적은 구결일세.”
남궁단이 서책의 제목을 읽었다.
제왕무(帝王舞).
“창궁의 검으로 법(法)을 깨닫고, 제왕의 검으로 도(道)를 이루었다네. 하지만 막상 무공을 완성하고 나니, 고급의 무공이라고 꼭 어려울 필요는 없겠다 싶었지.”
“……!”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구결을 풀었다네. 나아가 신체의 부담을 최소로 했고, 두어 가지 초식을 덧붙인 검결이라네.”
남궁언이 맑게 웃었다.
“가주께서 먼저 연성한 후, 용아와 화아에게 전수하면 될 것 같네.”
“……아버지.”
남궁단이 떨리는 눈으로 남궁언을 보았다.
왜일까? 기분이 이상했다.
당신께서 평생을 익히고 다듬어 온 공부를 집대성한 무공이다. 그런 무공을 아들인 자신에게 전수하니, 참으로 뜻깊은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했다.
벅차오르는 감격에 가슴이 두근거려도 무방할 상황인데도 괜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마치 아버지께서 당장 어딘가로 사라지실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남궁단의 기색을 읽었는지, 남궁언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아. 내 나이가 고희(古稀)를 넘은 지 오래거늘, 이 정도면 충분히 살지 않았는가. 백수(白壽)를 누리진 못할지언정 천수(天壽)는 이루었다고 보네.”
“아버지.”
“그러나, 아직 갈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네. 가주도 부족하고 손주들도 부족한데, 내 어딜 가겠는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남궁언이 눈을 감았다.
불어오는 서늘한 밤바람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하늘의 검을 얻지 못했으되, 늦게나마 자손들을 둘러볼 수 있었으니 이 또한 크나큰 홍복이 아닌가.”
이틀 뒤.
능적반을 위시한 오왕(五王)과 황군의 병사들이 남궁세가를 쳤다.
* * *
“헉!”
막번의 눈이 흔들렸다.
크르르릉.
이 협곡만 빠져나가면 집성촌이 하나 나온다. 그곳에서 물자를 약탈하고, 양민의 목숨을 담보로 마인들을 물리려 하였다.
한데 그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두 마리의 거대한 영수(靈獸)가 길목을 막고 있었다.
황금빛 털이 불꽃처럼 휘날리는 분홍빛 눈동자의 여우.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소름 끼치는 살기를 불사르는 호랑이.
그리고 그 사이, 평평한 바위에 앉아 대도(大刀)를 손질하고 있는 거한.
“이제 왔나?”
수십 장 밖에서 울리는 목소리임에도 선명하게 들린다.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여기로 올 것 같더라고. 귀주 밀림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 이곳이거든.”
“……!”
“혹시 몰라서 사람들은 이미 대피시켰다. 양민들을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아쉽게 됐군.”
스르륵.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아아아악!
앉아 있을 땐 아무런 기세도 풍기지 않던 그가,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악몽 같은 마기를 드리웠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리도록 해라.”
파지지지지직!
협곡 전체에 회흑색 위협적인 전광이 번뜩였다.
곧바로 일도(一刀)를 휘두르려던 서량은, 순간 머리를 관통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퍼뜩 놀란 그가 동쪽을 바라보았다.
“……노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