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화. 난전(亂戰) (3)
후두둑.
피와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천마도의 도신(刀身)을 이루는 것은 하나같이 신병(神兵) 소리를 듣기에 모자람이 없는 보물들이었다. 게다가 그 위에 고금제일마의 선천마기까지 고정시켰으니, 선천마기가 완전히 고갈되지 않는 한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날이 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 칼날에 피가 흥건하고, 살점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었다.
가만히 천마도를 내려다보던 서량이 도신에 마기를 불어넣었다.
화르르륵!
한순간 타오른 적백의 화염이 도신을 뒤덮고 있던 죽음의 잔해물들을 소멸시켰다.
“커허어억!”
두 팔이 잘린 막번이 시커먼 피를 토하며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 극심한 두려움이 어렸다.
“괴, 괴물……!”
서량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괴물이라……. 그래, 맞는 말이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냈으니, 어찌 괴물이 아니겠느냐.”
서량이 흑백 또렷한 눈으로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협곡은 그야말로 죽음의 지대로 변해 있었다.
좌우 절벽을 후려쳐 일으킨 소규모 산사태에 삼천 병력이 깔려 죽었으며, 서량과 금호, 호왕의 파멸적인 공세로 남은 이천 이상의 병력이 죽었다.
이 정도면 역사에 길이 남을 마두(魔頭)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 끔찍한 것은, 이 전쟁이 끝나기까지 서량의 손에 더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거란 사실이다. 어쩌면 몇만이나 되는 적군이 서량의 칼날 아래 스러질지도 모른다.
‘아니지. 이미 전쟁을 벌인다고 마음먹은 시점에서 수만의 목숨을 앗아 간 것이나 다름없지.’
새삼 마도천하로 향하는 길이,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이 많은 적군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점 동요가 없는 스스로의 마음이 가장 섬뜩했다.
“그나저나.”
서량이 천마도를 쥐지 않은 다른 손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흥미가 일었다.
“신기한 물건이군. 마왕령의 극소포와 비슷한 크기인데, 이 안에 든 거미줄 같은 그물이 그 엄청난 범위를 아우를 정도로 압축되어 있다는 건가? 대단해.”
서량이 하늘을 향해 소포를 쏘았다.
퍼어어엉!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실몽당이 같은 것이, 일순 확 펼쳐지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을 형성했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굉장한 독이군. 극마지경이라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어. 당가 쪽 독은 아니고, 새로 개발했나?”
게다가 저 그물은 신병이기로도 쉽게 끊어지지 않으며, 설령 끊어 냈다 한들 실제 거미줄처럼 접착성이 강해 재차 얽혀 들었다.
“이렇게 또 시대가 바뀌는군.”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 개인의 힘은 점차 약해지고, 이러한 기물들이 발달하는 시대가 오는가.”
세상은 항상 발전과 쇠락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번의 발전은 반드시 편의성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 편의성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훗날 무공이라는 개념은 아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격발추를 누를 힘만 있으면 수십의 고수도 능히 죽이는 위험한 병기들이 속출하는 시대다. 더욱이 백 년, 이백 년이 지난 미래에는 이보다 더 편리하고 더 위력적인 병기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거늘 누가 무공을 익히려 하겠는가. 서량은 그 당연한 흐름이, 자연스러운 변화가 불러올 편의의 시대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라라라라락!
하늘 높이 날았던 투명한 사곽망이 서량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막번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은 가만히 사곽망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임에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저 무적의 마신이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때, 서량의 발밑에서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르르르륵!
어느새 여섯 줄기로 늘어난 불꽃이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 상반신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서량의 눈이 번쩍였다.
퍼어어어엉!
화염의 폭발이다.
적백의 화염이 불기둥처럼 솟구치며 사곽망을 완전히 불살라 버렸다.
막번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통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다.
사곽망은 십대고수의 일인, 명왕 능적반도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기물이었다. 실제로 천마신교의 대호법조차 베어 내긴 했어도 뚫고 나아가진 못하지 않았는가.
서량은 달랐다. 그는 마기를 발출,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 사곽망을 눈 깜짝할 새에 소멸시켰다.
‘막을 수 없다…….’
막번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누구도 저자를 막을 수 없…….’
그렇게 황군 오천 병력을 이끌던 교룡 오 조의 조장 막번이 죽었다.
크르릉.
호왕이 서량의 곁으로 다가왔다.
구유마공의 불꽃은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불태우고 녹여 버린다.
하지만 호왕은 달랐다. 오히려 그 불꽃에 안온함이라도 느끼는 듯, 서량의 몸에 연신 머리를 비볐다.
실제로 구유마공의 불꽃은 호왕을 태우지 않았다. 호왕의 몸에 깃든 강력한 구유마기와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왕의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어 준 서량이 들끓는 마기를 잠재우곤 금호의 등에 올라탔다.
“보고 있나, 담사영?”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난 이미 너의 턱 밑에 송곳니를 들이밀고 있다.”
서늘한 바람이 이 목소리를 담아 전달해 줄까.
들릴 리 없는 말이지만, 서량은 재차 입을 열었다.
“때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독기도 중요하다만, 포기해야 할 땐 깔끔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가끔 생각한다. 담사영 역시 스스로가 살아온 방식을 놓을 수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열심히만 하면 그에 마땅한 결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다르다. 어쩌면 담사영 역시 그걸 깨닫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담사영은, 본인의 방식을 바꾸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외의 길을 도모하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넌 결코 날 이길 수 없어. 그걸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너 역시 크게 될 놈은 아니야.”
서량이 피식 웃었다.
“하긴, 중간에 포기할 거였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을 놈이지. 너의 그런 맹목적인 독기와 집착은, 어떤 의미론 참으로 존경스러운 것이었다만.”
미소 짓던 서량의 두 눈에 서리가 내렸다.
“천하와 하나가 된다라…….”
구유마공이 신마종도식에 오르고 지닌바 무공이 크게 발전하면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나아가 예전보다 감정의 동요가 적어졌다. 스스로도 왜 놀라지 않는지 의아할 만큼 마음이 고요했다.
그런 눈으로도, 그런 마음으로도 쉬이 상상하기가 힘들다. 천하와 하나가 되는 담사영의 모습을.
‘뭐가 되었든, 골치는 아프겠지.’
오죽하면 스승님이 직접 찾아와 놈이 천하와 하나가 되기 전에 막으라 하셨겠는가.
서량은 자신의 무공이 급성장했다고 하여 이천상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가 이룬 위업 이전에, 섭리를 꿰뚫어 보고 미래를 뒤흔들었던 지혜만으로도 충분히 경계할 만했다.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던 서량이 이내 고개를 내렸다.
“슬슬 출발해야겠군.”
금호와 호왕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여유로운 얼굴로 세상을 내려다보던 서량은, 문득 드는 생각에 동쪽을 바라보았다.
‘뭐였을까.’
협곡에서의 싸움이 시작되기 전, 일순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장면은 주름 가득한 얼굴 위에 드리워진 협객의 그림자였다.
‘남궁 노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순한 우연인가?’
직감이라고 해야 할지, 그저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남궁언의 푸근한 표정이, 칼날과도 같은 눈매가, 정의롭기 그지없는 무공이 떠오른 것은 어인 이유 때문일까.
‘설마…… 아니겠지.’
가능성은 충분하다. 담사영도 이제 실질적인 싸움 외에 남은 게 없다고 판단했을 테니, 이쪽의 전력을 차근차근 줄이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전력부터 하나씩 쳐 내는 것이 옳다. 적아가 명확한 전쟁에서, 확실하지 않은 적은 그저 방해만 될 뿐이다.
물론, 황제 납치 계획에 동참한 사람이니만큼 불확실한 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괜찮을 거다. 남궁 노선배는 강해. 십대고수급 강자가 셋 이상 참전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활로를 개척해 낼 분이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기랄, 이게 쓸모가 있는 능력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담사영의 살의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 살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놈이 자신을 노릴 때뿐이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확실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놈이 진정 남궁을 노린다 해도 지금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이미 늦었어.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할 뿐이다. 남궁까지 품고 가기에는 대국이 너무 혼잡스러워.’
서량이 눈을 감았다.
“부디 무사하기를.”
* * *
퍼어어어억!
“컥!”
피를 한 움큼 토한 남궁언이 비틀거리며 벽에 기댔다.
그때, 분명 하얬을 수염이 붉게 물든 노인 하나가 맥없이 쓰러졌다.
노인의 눈과 남궁언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머, 먼저 가오.”
남궁언이 미소를 지었다. 노인답지 않게 가지런한 이빨이 피에 잔뜩 젖어 있었다.
“걱정 말고 먼저 가시게. 곧 따라감세.”
서걱!
노인의 목이 잘려 나갔다.
남궁언의 눈이 재차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빌어먹을 늙은이들 같으니!”
마극이 이를 갈며 남궁언을 노려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려 십대고수 네 명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남은 하나, 무석은 꿈틀거리며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남궁언의 제왕검형에 직격당한 무석은 심맥이 파열되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능적반이 충혈된 눈으로 남궁언을 노려보았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설마 오왕 전부가 달려들었는데도 그중 한 명이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치가 떨리는 무공이었다. 상식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검도였다.
혼(魂)을 불사른 노장의 힘은 그렇게나 대단했다. 단순한 실력 이전에, 싸움에 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다 끝났다, 늙은이.”
“그런 것 같구먼.”
“얌전히 목을 내밀어라. 쓸데없이 힘 빼게 하지 마.”
“그럴 거였으면 진즉 항복했지.”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허허, 자네도 나중에 늙어 보게. 나이 먹으면 느는 게 고집밖에 없어.”
남궁언이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자네 관상을 보니 내 나이까지 살기는 글러 먹은 듯하네. 곧 자네를 위시한 모두가 목숨을 잃을 것이야.”
능적반이 코웃음을 쳤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런가? 헛소리가 늘었구나.”
“허허허허!”
헛소리라.
탐욕에 젖은 저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욕망으로 물든 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싸움을, 이 전쟁을 일으킨 두 괴물의 실력과 독심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가.
‘서 교주.’
남궁언이 미소를 지었다.
‘먼저 가네. 내 나름대로 노력했으니, 우리 애들 좀 부탁하이.’
진심을 담아 외치는 마음의 소리다.
‘단아, 용아, 화아야.’
자랑스러운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와 손녀의 얼굴도 떠올랐다.
‘앞으로 반백 년을 저승의 수문장으로 살 것이다. 그 전에 찾아오면 내쫓아 버릴 테니, 오래오래 행복하게들 살아야 한다.’
일순 남궁언의 두 눈에 시퍼런 광채가 떠올랐다.
콰앙!
강인한 진각으로 건재함을 알린 남궁언.
“너희 중 둘 이상을 잡고 가겠다 하였다.”
콰르르르릉!
무명검에 제왕의 힘과 창궁의 의지가 깃들었다.
“내, 그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갈 것이다!”
“죽여!”
다섯 고수가 얽히고설키며 화려한 충돌을 일으켰다.
번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