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화. 난전(亂戰) (5)
“빌어먹을.”
호요성의 입에서 실로 오랜만에 분노에 찬 욕설이 튀어나왔다.
“미리 대비를 해 놨어야 했는데.”
남궁은 큰 힘이다.
가는 길은 다르지만, 천마신교와 함께 공동의 적을 맞이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교주님과의 인연도 깊어서 의심할 이유가 없는 아군이라 봐도 좋았다.
담사영은 그 아군을 없애 버린 것이다.
‘남궁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었다. 담사영은 그 가능성을 사전에 앗아 가 버린 거야.’
물론 놈들이 남궁세가를 침공할 거란 예상은 했다. 하지만 별반 걱정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검왕 노선배.’
그곳에는 천하제일검이 있다.
교주님께서 말씀하시길, 검왕 남궁언은 현역 무림인 중 유일하게 심검을 깨달은 검의 구도자라 하였다. 무공으로는 앞설 수 있지만, 깨달음의 깊이에선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자라고 했다.
그 정도 강자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병력을 어느 정도 유지한 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게다가 그곳에는 남궁언만이 아니라 전대 노고수들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가주인 남궁단만 해도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그 정도면 굳이 이쪽에서 도움을 주지 않아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이었다.
‘심지어 안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본교의 마존과 천마군이 전선을 휘어잡고 있다.’
심리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담사영은 과감하게 남궁을 쳤다.
그것도 무려 십대고수 다섯과 천룡궁 소속 병력을 보내 말끔하게 날려 버렸다. 공습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거세게 밀어붙일 줄은 몰랐다.
“여기서 끝일 리가 없습니다.”
초해의 말에 호요성은 긍정했다.
“물론 그럴 것이오.”
“십대고수 중 다섯에 천룡의 부대라면, 그 자체로 움직이는 철옹성과도 같습니다. 비록 다섯 중 하나가 죽었다곤 하나 그들의 위험성은 여전합니다. 신교와 철혈성을 제외한 어떤 문파라도 감당할 수 없는 힘입니다.”
“그렇소. 즉, 남궁 하나 밀겠답시고 보낸 전력은 아닐 거요. 그들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위력적인 첨병이자 별동대인 셈이오.”
“그렇습니다.”
“지금껏 담사영이 낸 계책이 완벽하게 먹힌 적은 많지 않소.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지. 서로의 의도를 읽어 가며 절반의 성공조차도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적의 의도가 먹혀들어 갔군요.”
“그렇소. 만일 이번 남궁세가 섬멸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담사영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었을 것이오. 그러나 보란 듯이 성공해 버렸으니, 이제부터는…….”
“사대고수와 천룡 부대를 말머리로 삼아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할 겁니다.”
“정확하오.”
확실히 공야치가 아끼는 사람답다. 비록 호요성 자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군사로서 대화를 나누기에 기꺼운 사람이었다.
초해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어렸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다면…… 아무리 그래도 곧장 신교의 병력을 건드리려 하진 않을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오. 놈들이 신교 병력을 마음먹고 공략한다는 건, 어느 정도 승리에 자신이 있는 때일 테니까.”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소수 정예로 이뤄진 최강의 별동대. 즉, 그들은 안휘에서 가장 가까운 적을 공략하려 할 것이오.”
정확한 안목이었다.
초해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어디일까요? 설마 곧장 소림으로 치고 올라가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오. 하지만 소림은 아닐 확률이 높소.”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호요성이 지도를 가리켰다.
“적의 본진은 호북에 있소. 그리고 별동대의 전력 대부분은 호북에서 출발했소. 만약 소림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오히려 적송 노선배와 소림방장, 팔대호원의 최고수들이 없는 틈을 노려 곧장 치러 갔을 것이오. 굳이 대강을 지나 남궁 먼저 공략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오.”
“아!”
“게다가 원로원주는 고루마존과 천마군 일천 병력을 하남으로 보냈소. 하남은 호북과 지척인바, 그만한 병력이 움직였는데 담사영이 모를 리가 없겠지.”
호요성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요.”
“철혈성……!!”
초해는 침을 삼켰다.
“적측의 별동대는 분명 막강한 전력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 병력으로 철혈성을 어떻게 할 순 없습니다.”
“물론 그렇지.”
“하면……?”
“내 예상대로라면, 담사영은 분명 후속 부대를 보낼 거요.”
“후속 부대요?”
“그렇소.”
“철혈성을 무너트릴 만큼의 병력이라면…… 설마 황군?!”
호요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황군이라.’
물론 황군을 보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게다가 철혈성의 외성엔 무수히 많은 양민이 거주하고 있다. 황군 병력이 들이닥치면 그들은 알아서 길을 열어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황군을 부를까?’
황군의 숫자는 천마군의 열 배 이상이다.
쪼개고 또 쪼개어 운용한다 해도 분명히 눈에 띈다. 무수히 많은 고수가 중원 전역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판에, 전면전도 아닌 상황에서 황군을 파견할 리가 없다.
‘고수진은 완성되었다. 십대고수 중 넷이라면 송 성주라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 신창 언극이 힘을 보탠다 해도 박빙의 승부를 이룰 정도.’
즉, 화경의 고수를 더 투입하기보다는 그들의 뒤를 받쳐 줄 전력을 파견할 확률이 높다.
순간 호요성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밖에 누구 없는가!”
잠시 후, 비각의 부각주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총군사님.”
“지금 당장 적의 사천 병력에 관한 문서들을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부각주는 일각이 지나 수십 장의 문서들을 가져왔다.
호요성은 미친 듯이 문서들을 뒤적거렸다.
이 문서들엔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당가의 병력 이동에 관한 내용이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그들이 작정하고 움직인다면 정보원들의 눈을 철저히 피할 수 있겠지만, 산길로만 이동하지 않는 이상 언제고 눈에 띄기 마련이다.
‘없다.’
문제는, 사천삼문(四川三門) 측의 고수가 이동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하다. 그들 중 일부가 움직였다면 곧장 보고가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
지난 일 년간 사천 병력의 동태를 적어 둔 문서들을 샅샅이 살폈음에도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 담사영이 미치지 않은 이상 사천성을 버릴 리가 없지. 사천성의 양민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삼문(三門)의 통제를 받고 있다. 즉, 담사영은 삼문과의 연대를 철저하게 쌓았을 것이다.’
호요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섬서 병력의 문서들도 가져오게.”
마찬가지였다.
섬서성은 그 위치상 정보원의 숫자가 사천보다 훨씬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더욱 화산파와 종남파의 움직임에 집중시켰다.
‘여전히 없다.’
섬서성 역시 구대문파 중 두 곳이 터를 잡은 지역이다. 사천 다음으로 가장 큰 아군이 집결한 곳이기도 했다.
한데 그런 섬서에도 일 년 동안 병력이 움직인 보고가 없다.
‘……!!’
호요성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럴 수는 없어. 이건 너무 이상해.’
그동안 황군과 담사영 개인 휘하의 병력, 그리고 천룡궁의 전력과 싸워 왔다.
하지만 그와 손을 잡은 칠대문파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주시하고는 있었지만, 철저하게 파헤치진 않았다. 그들보다 담사영의 본군이 훨씬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눈을 돌렸다? 일부러 본군으로 시선을 잡아 둔 거라고? 아니지. 담사영에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어.’
그렇다면?
“담사영조차도 칠대문파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놈은 절대 칠대문파를 포기할 리 없어.”
마땅히 신경 써야 할 병력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일 년 동안 그들을 방치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초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총군사님? 칠대문파라니, 그게 무슨……?”
“초 단주께 묻겠소.”
“예?”
“현재 담사영 측 병력과 우리의 병력을 비교하면, 누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오?”
여전히 의아했지만 초해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당연히 신교가 우위에 있습니다. 아닌 말로 전략 전술을 배제한 전면전을 벌인다면, 낮게 잡아도 육 할의 승률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리고 나나 음상단주가 아는 것을, 적이라고 모르진 않을 듯싶소.”
“……예?”
호요성의 볼이 살짝 떨렸다.
“그 부정할 수 없는 전력 차이를, 담사영이 가만히 두고만 봤을 리가 없다는 말이오.”
“……!”
“칠대문파, 그리고 멸문한 황보와 남궁을 제외한 삼대세가.”
초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호요성이 외쳤다.
“부각주! 지금 당장 절강 측 전선에 연락을 취하게! 철혈성에 힘을 실어 줘야 해! 원로원주에게는 따로 연락하여 병력 운용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하네!”
“명을 받듭니다!”
* * *
파아앙!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서량의 신법은 폭풍과도 같았다.
호천마황단과 금호, 호왕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서량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어지간해선 함께 움직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노선배.’
서량이 입술을 깨물었다.
귀주에서 적을 맞이하기 전, 갑자기 남궁언의 얼굴이 떠올랐더랬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담사영이라면 남궁을 공략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틀렸다.
이번만큼은 담사영의 수에 제대로 당했다. 설마하니 십대고수 절반을 한데 모아 보내 버리다니, 이런 기가 막힌 짓을 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미안하오. 제때 도와주지 못해서.’
과거, 강서상회를 잡아먹으러 갈 때 잠깐이지만 남궁언과 대립한 적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남궁언은 어떻게든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해 심검을 사용했다. 그 심검 한 번으로 탈진해 버렸을 만큼 무리했음에도, 남궁언은 끝까지 자신을 믿었다.
그와 남궁언은 그런 사이였다. 몇 번 만난 적은 없지만, 만남을 가질 때마다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리 허무하게 죽다니.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담사영!’
놈 때문에 많은 선배가 하나둘 이승을 떠났다.
놈이 보낸 병력 때문에 치명상을 입은 적송과 현천이 세상을 떴다.
다행히도 현천진인은 깨달음을 얻어 무당산과 하나가 되었지만, 기실 담사영이 아니었다면 여생 동안 세상을 위해 싸웠을 사람이었다.
한데 그 두 사람도 모자라, 이제는 남궁언까지 죽었다.
서량은 남궁언을 떠올렸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천마의 가슴에 심검을 스며들게 한, 뿌듯함과 걱정으로 가득했던 검왕의 얼굴을.
- 보게. 자네는 누구보다도 독해질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여린 사람이기도 하네.
- 힘 있는 권력자가 피 흘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세상은 지옥이 되는 게야. 자네도 알잖나?
서량의 두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휘이이이이이잉!
거센 바람에 그의 의복과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번쩍!
순간 그의 눈에 무시무시한 술력(術力)이 소용돌이치는 계곡이 보였다.
강소성, 철혈성으로 향하는 길.
그 길목을 차단한 무수히 많은 고수가 거대한 진형(陣形)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측했군.’
담사영은 알고 있었다. 서량이, 아니 천마신교가 알아챌 것임을.
남궁을 멸문한 별동대가 철혈성을 공략하리란 사실을 상대 역시 알아챌 거라 예상한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거대한 진법을 만들어 둔 것일 터였다. 수많은 고수가 철혈성 일대를 에워싼 채, 병력 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다만, 서량이라는 재앙이 이렇게까지 빨리 도달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화르르르륵!
서량의 몸에서 초고온의 불길이 치솟았다.
그런 그의 귓가에, 남궁언의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 부디 괴물이 되지 말게.
혈목신기(血木神氣)를 받아 증폭된 혈화신기(血火神氣)의 화염진이 무서운 기세로 불타올랐다.
쿠구구궁!
서량의 등 뒤로 반투명한 악귀흉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산처럼 거대한 칼날을 쥔, 천하에서 가장 끔찍하고 흉포한 마신의 대리자가.
커허허허헝!!
흉장이 거친 포효를 토해 내며 화염진을 향해 일도(一刀)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