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화. 전선을 가르고 (1)
쿵!
대전의 문이 열렸다.
저벅저벅.
밝은 대전 중앙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청년은 무척이나 잘생긴 용모를 뽐냈다. 다만 지나치게 무뚝뚝한 표정과 외팔이라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지이잉. 지이이잉.
청년의 몸 주변으로 무형의 술력이 꿈틀거렸다.
뿜어내는 외기(外氣)가 굉장했다. 기운 자체가 뇌전처럼 방전을 일으키는 듯하다. 전신을 갑옷처럼 감싸는 술력의 농도만큼은 능히 화경의 고수와 견줄 만했다.
그런 제자를 보며, 스승은 생각했다.
젊었을 적에는 믿지 않았던 인연이라는 단어를, 너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고.
거느린 제자 중 가장 먼저 손을 잡은 녀석이고, 나아가 천하 어떤 인재보다도 아득히 뛰어난 재능을 개화하여 스승을 기쁘게 한 녀석이었다.
대제자는 그런 녀석이었다. 이 녀석 이후로도 몇 명의 제자를 더 들였고, 그 많은 제자가 이제야 폐관에서 나왔지만 그중 누구도 녀석만큼의 놀라움을 안겨 주진 못했다.
‘그럴 만도 한가.’
단리후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천마신교 교주 서량은 이립이 안 되어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강자가 되었다?
아니다. 그의 신체 나이는 이립도 안 되었을지언정, 그 몸뚱이를 차지한 영혼은 육십여 년을 단련한 살수지왕이다. 그 역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인 것은 맞지만, 단리후와는 출발점부터가 다르다는 뜻이다.
즉, 단리후야말로 천하제일기재다. 능히 백년지재라 할 만한 녀석이었다.
‘네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무공을 가르친 지 오 년 만에 절정고수가 되었고, 그때부터 천룡술법을 연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십 년.
녀석은 무공과 술법 양면에서 구대문파 장문인조차도 넘어설 만큼의 성취를 이루었다.
앞으로 십 년이 더 지나면, 진정 자신이 서 있는 영역까지 올라올 만한 역량을 갖춘 놈이다. 심지어 단리후는 머리도 좋았다.
경험이 부족한 게 흠이었지만, 그거야 쌓으면 그만이다. 세상을 헤쳐 나가기 충분한, 아니 넘치는 수준의 힘을 쌓았으니 몇 번의 경험이면 진정한 강자로 거듭나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보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대제자는?
“이리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술잔을 비운 담사영의 얼굴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황군 오천과 교룡 오 조를 딸려 보냈다. 지금쯤 귀주에서 주둔해야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냐?”
이미 짐작하면서도 묻는다.
그것은 실로 담사영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무생물을 사람처럼 대하는 이가 아니었으니까.
지이잉. 지이이잉.
단리후는 말이 없었다. 그저 그 위험천만한 술력을 점점 더 불리고만 있을 뿐.
담사영의 눈이 깊어졌다.
그 눈에 서린 감정은, 놀랍게도 아쉬움과 후련함이었다.
“기억하느냐? 나와 네가 처음 만났던 날 말이다.”
우습군.
그 말을 뱉으면서, 담사영은 스스로 우수에 젖어 든 자신을 조소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넌 참으로 어른스러웠지.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이 되어 굶어 죽기 직전이었음에도, 결코 비굴함과 다급함 없이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단리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눈으로 담사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담사영이 빈 잔을 채웠다.
쪼르르 따라지는 맑은 액체에서 은은한 대나무 향이 풍겼다.
“그런 너를 보며 직감했다. 이놈은 난놈이라고. 재능? 그래, 네 골격은 무(武)를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재목이었다. 하지만 난 네 재능 이전에 독기를 보았다.”
담사영이 가득 찬 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과 함께 들이마신 숨에 추억이 깃들었고, 내쉬는 숨엔 미련이라는 향이 배어 나왔다.
“이놈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이놈을 제자로 삼는다면, 언젠가 내게 크나큰 힘이 되어 주리라.”
담사영은 더는 잔을 채우지 않았다.
단리후를 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서늘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너를 무기가 아닌 사람으로 보았다. 너는 언제나 나를 위했고, 나 역시 내 손에 쥔 권력을 몽땅 네게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
“그러니 다 네 탓이다.”
부르르르르.
탁자가 작게 흔들렸다.
담사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막강한 진기가 탁자를 시작으로 대전 전체를 울렸다.
“감히 그런 꼬락서니로 내게 찾아와? 우리의 관계를 네 손으로 산산조각 내 버렸구나.”
“…….”
“차라리 그놈 손에 영육이 스러졌다면, 내 너를 위해 울어 주었을 것이다. 차라리 욕심을 부려 내 자리를 위협했다면, 제자의 성장에 뿌듯해했을 것이다.”
담사영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래, 실제로 네게는 그런 욕망이 있었지?”
우웅. 우웅.
단리후의 몸 전체를 휘감은 술력이 꿈틀거렸다.
“모를 줄 알았더냐? 너와 천룡궁주의 관계를?”
“…….”
“모를 줄 알았더냐? 네가 천룡궁주와 거래를 했다는 것을?”
“…….”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네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감동했어. 이놈은 내 제자가 확실하다. 방식이 다를 뿐, 나와 똑같은 놈으로 성장한 진짜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번쩍!
담사영의 동공이 하늘색 광채로 물들었다.
“하지만 적의 꼭두각시가 되어 날 찾아온 너의 무능을, 난 참아 줄 수가 없구나.”
사실, 무능하다고 말할 건 아니었다.
단리후에게 서량은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다.
사람을 상대로는 싸울 수 있지만, 폭풍의 멱살을 잡을 순 없는 노릇이다. 불시에 나타난 서량이 단리후를 공략하려 들었다면, 단리후는 그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
그건 담사영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화를 낸 것은, 제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 비할 만한 욕망을 품었으되, 그 욕망의 절반만큼만 되는 자존심이 있었다면 절대 이런 꼴로 오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을 배신할 생각이 있었다 해도, 적에게 농락당할 바에야 깔끔하게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담사영은 그런 심정으로 살아왔다. 그 정도 결심도 없이 의천맹주가 될 순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놈은?
“내가 널 너무 높이 평가한 모양이구나.”
쿠구구궁!
천라무허신공이 개방되며 대전 안의 공기를 장악했다.
“네가 일주와 월주의 힘을 합쳤다는 걸 알고 있다. 그 힘이라면, 육신이 찢겨 날아가도 혼(魂)은 사십구 일(四十九日) 동안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지.”
탈백지생술(脫魄持生術).
천룡궁주의 용형괴뢰술에 필적할 정도로 연성키 어려운 천룡술법의 극치 중 하나다.
산 몸뚱이에서 자체적으로 혼을 빼내 공허의 세계로 빠트리는 비술 중의 비술이었다. 공허의 세계에 빠진 혼은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천룡술법을 익힌 자가 사십구일 안에 일혼전체술(一魂傳體術)을 펼치면 빠진 혼을 새로운 육신에 집어넣을 수 있다.
물론 부작용이 극심한 술법이었다. 성공 가능성도 미지수였고, 설령 이혼(移魂)이 성공한다 한들 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깎이며, 심지어 신체에 장애가 생길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당장은 살 수 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도, 수명이 깎이고 몸에 장애가 생겨도 당장 살 수 있다면 일단은 안심이다.
한데 단리후는, 그 비술을 알고 있음에도 쓰지 않았다.
“설마하니, 너의 실력과 세 치 혀로 놈을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이냐?”
콰지직! 콰지지지직!
담사영이 디딘 땅이 갈라지며 거미줄 같은 금을 만들었다.
“아니지. 너는 알고 있었다. 너의 힘으로는 놈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늑대가 제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범 앞에선 하룻강아지에 불과할 따름이지.”
“…….”
“결국 넌, 지나친 자만심과 흐려진 각오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후우우우웅!
담사영의 손에서 하늘빛 진기가 아른거렸다.
폭발적인 기운이 한 점으로 응축된다. 천라무허신공상의 수공(手功), 진산신수(鎭山神手)의 공부였다.
번쩍!
담사영의 두 눈에서 파멸적인 살기가 이글거렸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네놈을 죽이고 싶다만, 놈이 너를 내게 보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전언(傳言)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없다면, 곧장 네놈의 존재를 지워 주마.”
그때였다.
단리후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사부님.”
담사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부님이라니?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린 놈이 날 사부라고 불러?
“무슨 수작이냐, 천하진.”
“그의 무공은…… 사, 사령수(死靈手)라는 수법…… 다행히 혈신기의 소재는 알아채지 못…… 모, 못했습니다.”
“……?!”
“부디 대업을 이루소서.”
부르르르르.
단리후의 몸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창백한 얼굴 위, 검붉은 혈관이 툭툭 불거졌다. 서량의 사령수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물끄러미 단리후를 보던 담사영이 탄식했다.
“이놈아. 이 모자란 놈아! 차라리 놈의 손에 죽어 안식이라도 손에 넣었어야지, 어찌하여 그 고통을 참고 예까지 왔느냐!”
그렇다.
서량의 사령수는 대상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조종한다. 하지만 그것은 천룡궁의 용형괴뢰술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령수는 대상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한다. 죽인다는 뜻이다.
자아를 무너트리고 영혼을 파괴해 죽인 후, 육신만 의지대로 조종한다. 영혼이 파괴되었기에 행동이 어색하고 딱딱할 수밖에 없다.
또한, 사령수의 경지가 높으면 생전의 무공까지 어느 정도 구현해 낼 수 있다. 이렇듯 사령수는 나름의 제약이 많은 수법이었다.
그래서 서량도 어지간하면 사령수를 쓰지 않았다. 죽인다고 마음먹은 상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비술이기 때문이다. 이천상이라도 사령수의 한계는 넓힐 수 없을 것이다.
그 절대적인 한계 덕에, 단리후는 완전히 죽지 않은 채 여기까지 왔다.
번쩍!
응축된 진기가 점차 그 크기를 불리며, 담사영의 양손을 완전한 빛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간 고생했다. 먼 훗날 저승에서 다시 보도록 하자.”
그때였다.
위이이이이이잉!
기묘한 소리와 함께 단리후의 술력이 점차 대전을 장악했다.
“담사영.”
단리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놀랍게도 서량의 그것이었다.
“너는 절대 무당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주르르륵.
단리후의 칠공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서글픔으로 가득했던 담사영의 얼굴이 극도로 싸늘해졌다.
‘무당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 왜 저따위 전언을 보낸 것이지?
‘……감히.’
놀라움 다음은 분노다. 아끼던 대제자를 이용, 자신에게 전언을 보낸 천하진에게 담사영은 지독한 분노를 느꼈다.
“천하디천한 놈! 네놈에게 지옥을 보여 줄 것이다!”
담사영이 벼락처럼 손을 내쳤다.
번쩍!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장력에 대전의 철문이 날아가고 그 뒤에 서 있던 호위무사와 복도까지 뭉개지며, 일대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파지지지직!
극도로 응축된 진기가 뇌전처럼 방전 현상을 일으켰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내뱉는 담사영.
일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푸스스스.
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에, 단리후가 서 있었다.
무려 진산신수에 직격을 당했는데도 단리후는 죽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도 멀쩡했다.
“이게 무슨……?!”
순간 단리후의 두 눈이 칠채색으로 물들었다.
담사영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크윽!”
우우우우웅.
그의 백회혈에서 희뿌연 연기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단리후의 백회혈로 빨려 들어갔다.
“흐읍!”
단리후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담사영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
“역시, 나랑 잘 맞는 몸이라니까.”
단리후, 아니 무명이 씁쓸하게 말했다.
“이런 결과를 생각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담사영이 호랑이처럼 외쳤다.
“무슨 짓거리냐!”
“무슨 짓이긴. 당신을 도우려는 거지.”
“뭣이?!”
“천하제일의 기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당신만은 못한가 봐.”
후욱.
무명이 담사영의 손을 잡았다.
담사영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당신을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로 만들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