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화. 전선을 가르고 (2)
“뭘 보고 계시는 거요?”
“…….”
“이보시오.”
“조용.”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린 채, 상대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한다.
그야말로 열불이 날 만한 작태였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상대의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고, 사실상 이 부대의 수장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수장이라.’
정풍진인(停風眞人)은 내심 입맛을 다셨다.
‘뭐, 나와는 상관없지만.’
비록 이립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녀는 저 담사영의 둘째 제자였다. 대제자 단리후만큼은 아니더라도, 술법의 실력만으로 구파 장문인을 넘볼 만한 자가 그녀였다.
술법이라는 게 참 묘하다. 동일 노력 대비, 발전의 방향이 무공보다도 훨씬 다양했다.
아니, 오히려 감각만 좋다면 오랜 수련으로 술력을 쌓은 노고수보다 젊은 고수가 더 위협적일 때도 많았다. 술법이란 그처럼 쉬이 종잡을 수 없는 세계였다.
정풍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혈화신기를 받아 크나큰 성취를 이루었지만, 시작부터 술법을 익힌 사람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그는 담사영의 둘째 제자인 매방(梅芳)보다 아래였다.
‘상관없어.’
정풍진인은 공동파의 대장로였다.
말이 대장로지, 그의 연배는 오십도 채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젊은 나이로 대장로라는 직위에 오른 것 역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즉, 충분히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매방의 말에 설설 기는 것은, 단순히 그녀의 위치나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풍진인이 매방을 힐끔거렸다.
성숙함이 물씬 느껴지는 굴곡진 몸매에 정풍진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참으로 반반하지 않은가.’
매방은 정풍진인의 시선을 귀신처럼 알아차렸다.
“눈알 뽑히고 싶나?”
“허허허.”
“더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
“내가 뭘 했다고 그러시나.”
매방은 답하지 않았다.
정풍진인은 야릇한 눈으로 매방을 흘끗거렸다. 매방은 매번 이랬다. 거친 욕설로 경고를 날리곤 했지만, 단 한 번도 실력 행사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런 매방의 대응이 정풍진인을 홀렸다. 정풍진인은 자신보다 어린 매방의 말을 무엇이라도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십시다.”
매방은 대꾸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무시를 당했음에도 정풍진인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달아오른 눈으로 매방을 보았다.
‘참으로 도도하구나.’
정풍진인은 도인의 몸으로 색(色)에 미쳐 버린 사람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그는 의천맹이 건재하던 시절, 달에 한 번씩 감숙 일대를 뒤져 여인을 납치하고 간살했다.
그렇게 수년 동안 간살한 여인의 수가 무려 백에 이를 정도였다.
그야말로 인면수심이라는 표현조차 아까울 정도였지만, 그의 수법이 워낙 은밀해서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그의 끔찍한 범죄 행위는 공동파 당대 장문인이자 정풍진인의 사형, 정산진인(停山眞人)에게 걸리고 말았다.
놀랍게도 정산진인은 정풍진인을 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이해해 주었고, 나아가 자신의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 결과 정풍진인은 공동파 최고 권력자의 비호 아래 마음껏 색욕을 채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산진인은 정풍진인에게 대장로 직위를 안겨 준 것도 모자라 천룡궁의 혈화신기까지 선물해 주었다.
그렇게 정산진인의 개가 되어 버린 그는 정산진인의 명령이라면 철저하게 따랐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었고, 죽이라면 죽였다.
그리고 지금.
철혈성이라는 희대의 난적을 공략하는 데 한 손 거들라는 명령에 정풍진인은 여기까지 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칠대문파의 실력자들 상당수가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오랜 시간 천룡술법을 연성하고, 일 년 반 전에 혈신기에 몸을 담근 그들은 술법의 합공(合攻)이라는 것을 배웠다.
왕(王)의 칭호를 받아 홀로 날뛰던 이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그들은 그렇게 훈련받은 이들이었다. 영광스러운 정파 최고 문파 출신임에도.
“준비해.”
“음? 뭐라 했소?”
매방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화극대진(火極大陣)을 개방할 준비를 해.”
정풍진인이 능글맞게 물었다.
“왜? 춥소? 내가 안 춥게 해 드릴까?”
“정풍.”
도호가 직접 불린 적은 처음이다. 정풍진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매방이 정풍진인을 보았다.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정풍진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자신을 보는 매방의 두 눈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가득했던 것이다.
“내가 너의 방만함을 그냥 두고 본 것은, 네놈이 땔감으로서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야.”
“……!”
“하지만 명령에 즉시 따르지 않는 머저리라면, 더는 살려 둘 이유가 없겠지?”
화르르르륵!
매방의 양손에서 새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일대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혈화신기를 품고 있는 정풍진인조차도 그 열기를 버티지 못해 삼 장 밖으로 물러나야 했을 정도였다.
“정풍.”
“……말씀하시오.”
우우우우웅.
매방의 두 눈에 서린 화기가 용처럼 꿈틀거렸다.
순간 정풍진인은 등줄기를 훑고 올라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독사 수백 마리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듯했다.
“화극대진을 준비해.”
“아, 알겠소.”
정풍진인은 서둘러 화극대진의 중추 자리로 향했다. 이곳에 준비된 화극대진의 핵(核)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온다.’
한없이 차갑기만 하던 매방의 얼굴.
그런 그녀의 이마 위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엄청난 마기!’
담사영의 제자들은 술법과 무공의 재능 외, 저마다 한 가지씩 독특한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었다.
그중 매방은 유독 기감이 뛰어났다. 선천적으로 발달된 육감은 술법을 익히며 더욱 증폭되었다.
그런 그녀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저 멀리 서쪽에서부터 감당키 힘든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 정도 마기를 발산하는 자가 마교주 외에 또 있을까?’
없다.
아니, 당대 무림을 떠나 고금을 통틀어 살펴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저 마기의 폭풍은, 단순히 마기라서 더 위협적이고 흉흉했다. 심지어 그 기의 총량이 사부인 담사영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말 그대로 자연재해다. 육신에 담긴 힘의 크기가 천하 어떤 사람과도 비교를 불허했다.
‘빌어먹을.’
그녀는 사부인 담사영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천하진 그놈 역시 나와 같이 무림의 상식을 벗어난 경지에 돌입했다.
그건 송금백도 마찬가지지만, 그이는 워낙에 대가 약하니 논외로 쳐야겠지.
- 힘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다는 뜻인가요?
- 그렇다.
- …….
- 하지만 그 정도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꼭 같은 경지의 고수가 있어야 한단 법은 없다.
- 그렇다면?
- 술법진(術法陣)이다.
- 술법진…….
- 제아무리 술법의 대가라도 나나 그놈을 감당키는 어려워.
이유인즉, 무공이나 술법의 근간이 기(氣)이기 때문이다. 배우고 익힌 공부가 다를지언정 종국에 가면 결국 하나가 되는 법.
무공의 극치를 이룬 자에게, 술법은 독특한 기술의 하나일 뿐 감당 못 할 폭탄이 될 수 없다.
- 술법진은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해 준다는 뜻이로군요.
- 그렇다. 오행의 극진(極陣)은 각 오행기의 힘을 극대화하는 술법이다. 오히려 나나 그놈 정도의 고수에게는, 하나의 힘을 극한까지 증폭한 술법진이 더 위협적이다.
- 사부님께도 위협이 된다고요?
- 그렇다. 내 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지만, 당장 오행의 극진에 빠진다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 ……!
- 그것이 바로 상생(相生)의 힘이다. 수(水)는 목(木)을, 목(木)은 화(火)를 일깨우지.
- 그렇군요.
- 철혈성의 본진에는 수생목(水生木)의 목극대진(木極大陣)을 펼쳐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그 후, 사방(四方)에 깔아 둔 목생화(木生火)의 화극대진(火極大陣)을 이용해 철혈성을 깡그리 불태워 소멸시킬 것이다.
- ……!!
- 혈원기(血原氣)가 제법 소모되겠지만, 그 정도면 괜찮다. 눈엣가시 같은 철혈성을 날려 버릴 수 있다면, 그 정도 혈원기의 소모는 충분히 감수할 만해.
- 어차피 다시 차는 기운이니까요.
- 그렇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말이지.
사부 담사영은 오행의 극진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비록 저 마교주의 마안에 걸린 혈신기의 이력으로 다른 두 개의 기운은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수목화(水木火)의 세 기운은 확실하게 완성되었다.
그 극치의 기운을, 칠대문파의 고수들을 땔감 삼아 터트린다. 반선(半仙)의 강자라도 버틸 수 없으리라.
‘…….’
하지만 그런 자신감이, 다가오는 폭풍의 마기를 대하며 점차 수그러드는 게 느껴졌다.
매방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부딪쳐야 할 적이다. 그냥 통과시킬 수는 없으니, 차라리 이쪽의 화극대진을 이용해 마교주의 역량이라도 간파해 두는 수밖에.’
콰앙!
매방이 선 땅이 산산이 부서짐과 동시에 그녀의 주위로 시뻘건 화염이 넘실거렸다.
놀랍게도 그 화력(火力)은 화경의 고수가 내뿜는 삼매진화(三昧眞火)보다도 뜨겁고 맹렬했다. 그러한 화기(火氣)를 시전 영창도 없이 끌어내는 것이다.
화라라락!
마치 가벼운 불꽃처럼.
발목의 움직임 한 번으로 십여 장 뒤로 물러난 매방이 진의 중추가 된 정풍진인에게 외쳤다.
“화극대진을 개방하라.”
번쩍!
서른여섯의 목령귀(木靈鬼)가 혈신기와 하나가 된 원정을 개방했다.
정풍진인의 두 눈에서 백열(白熱)하는 화염이 쏟아졌다.
‘어?!’
순간 정풍진인은 당황했다.
‘뭐, 뭐야?’
목령귀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혈목신기의 힘이 너무 강했다.
버티지 못하면 죽을 정도였다. 정풍진인은 저도 모르게 혈화신기와 함께 원정을 개방했다.
그건 본능적인 대처였다. 쏟아져 들어오는 목기(木氣)에 휩쓸리는 순간 목숨을 잃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목숨은 어떤 식으로든 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정풍진인의 몸이 순간 돼지 오줌보 부풀 듯 부풀었다.
“어어어억?!”
그가 매방을 돌아보았다.
매방의 서늘한 눈이 자신을 향했다. 그 눈빛에 일말의 조소가 깃들어 있었다.
정풍진인의 얼굴에 원독의 기운이 솟구쳤다.
“너, 이 개 같은 년……!!”
퍼어어어어엉!
정풍진인이 폭사하는 순간, 반경 삼십여 장에 달하는 화염의 대진이 완성되었다.
화르르르륵! 치이이이익!
실로 무지막지한 화기였다. 화기의 농도가 어찌나 짙은지, 대지가 부글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와라.’
마침내 매방의 시야에, 검은 폭풍을 이끌며 쏘아지는 거대한 존재가 나타났다.
‘어디 네 실력을 보여 봐!’
그때였다.
콰르르르릉!
천지가 진동하며 적백의 화염이 솟구쳤다.
매방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쾅! 콰르르릉! 콰아앙!
화염의 마기를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땅이 쪼개지고 바위가 튕겨 날아간다.
적백의 화염, 지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 올린 겁화였다.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친 적백의 화룡(火龍)이 일대에 파멸적인 마기를 흩뿌렸다.
쿠구궁!
산산이 박살 나 흩어지는 땅과 나무들.
그 사이에서 괴물의 형상을 한, 체고만 이십 여장은 될 듯한 악마왕이 몸을 일으켰다.
‘헉!’
환상이 아니다.
비로소 선천의 초입에 다다른 절대마기가, 시전자의 의념을 형상화하여 현실로 구현해 낸 진짜 마신이었다.
마신, 악귀흉장이 포효했다.
커허허허허헝!
무지막지한 포효에 천지가 뒤흔들리고.
“비켜어어어!!”
묵직하면서도 낭랑한, 그러면서도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매방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번쩍!
반월을 그리며 떨어진 거대한 도기(刀氣)가 그대로 화극대진을 양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