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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564화 (563/774)

564화. 전선을 가르고 (4)

호요성의 눈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보고를 받은 그는 심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당하기만 하진 않겠다는 건가.”

칠대문파와 삼대세가를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잘 묵혀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대단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들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이쪽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만큼 대응한 것도 놀랍다 아니 말할 수 없지만, 더 대단한 것은 이쪽의 시선을 끝까지 붙잡아 둔 상태로 총군사인 자신과 교주님조차도 속였다는 것이다.

‘아니지. 속였다기에는 어폐가 있어. 다만 우리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을 뿐.’

게다가 이미 칠대문파와 삼대세가는 서량의 손에 제대로 혼이 난 적이 있었다. 한 번 꺾은 위상, 두 번을 못 꺾을까.

즉, 칠대문파와 삼대세가를 서서히 배제할 수밖에 없는 흐름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들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총군사인 자신의 잘못이었다.

‘당한 뒤에 갚아 주는 건 기분이 썩 좋지 않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아는 건 교주님께서도 아실 테니, 아마 지금쯤 철혈성으로 향하고 계실 것이다. 어쩌면 그 반선의 무공으로 벌써 도착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의 싸움은 교주님께서 맡아 주십시오.’

호요성은 지도의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간다. 저쪽에선 이미 선이 없는 싸움을 시작했으니, 이쪽에서도 자비 없는 총력전을 벌일 수밖에.

“총군사님.”

“음?”

“무색사장이 왔습니다.”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드시라 해라.”

잠시 후, 강우경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호요성이 포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흘흘, 그렇구먼.”

강우경의 외관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간 밀린 수련을 몰아서 한 것인지, 펑퍼짐한 의복 속에 감춰진 육체가 꽉 응축된 근육으로 가득했다.

제아무리 내공의 고수라도 황혼기의 접어든 노인이 저런 육체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야말로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노력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리라.

“죄송합니다. 빠른 일 처리를 위해선 서신으로만 주고받는 게 더 나았겠지만, 사안이 사안이라 직접 뵙고자 했습니다. 여로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닐세. 나도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상쾌하네.”

“일단 앉으시지요. 차는…….”

“굴송차 한 잔 내주시겠는가?”

호요성의 얼굴에 뜻밖의 기색이 어렸다.

“굴송차를요?”

“알잖나? 내 오랜 세월 신교에서 음식을 만들던 사람일세. 원래는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막상 신교를 나서니 그 향이 그립더구먼.”

“하하, 알겠습니다.”

잠시 후, 두 사람 사이에 굴송차가 놓였다.

강우경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어렸다.

“막상 향을 맡으니 입에 대기가 싫구먼. 그냥 추억으로 남겨 둘 것을 그랬나?”

“다른 차로 올릴까요?”

“괜찮네. 한번 마셔 보지, 뭐.”

차 한 모금을 마시니 정신이 번쩍 깬다. 강우경이 연신 눈을 끔뻑였다.

“각성 효과가 무지막지하구먼. 졸릴 때 세수하는 것보다 훨씬 강렬한 것 같네.”

“그래서 자주 애용합니다.”

“늙으면 잠도 안 온다네. 젊었을 때 많이 자 두게나.”

생각보다 훨씬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실제로 호요성은, 강우경을 충분히 존중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패배한 것도 모자라 꼬랑지까지 만,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라 매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우경을 짓눌러 버린 자는 다름 아닌 저 이천상이었다. 이천상 앞에서는 그 어떤 패배도, 수긍도 수치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꼬리를 말고 살았던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는 이천상과 거래를 했다.

누가 먼저 제안했든, 고금제일마와 거래가 가능했다는 사실 자체가 강우경의 그릇이 크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호요성이 강우경에게 깍듯한 이유였다.

“자네 얼굴을 보아하니 시시콜콜한 얘기로 시간 보내는 건 어렵겠구만?”

“죄송합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이해하네.”

강우경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 어인 일로 퇴물이 다 된 늙은이를 예까지 부르셨을꼬?”

호요성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의뢰를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평범한 의뢰였다면 서신으로 충분했겠지?”

“그렇습니다.”

“대상이 누군가?”

“황태자입니다.”

순간 강우경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황태자 주천양?”

“그렇습니다.”

“……흐음.”

강우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탁자에 올려놓은 손가락이 연신 꿈틀거린다. 이 정도로 엄청난 의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왜 그를 죽여 달라고 하는 건지, 왜 이 시점에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지 묻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강우경이 이내 한숨을 뱉었다.

“황태자…… 황태자라…….”

“…….”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네만, 황태자는 상대측 최우선 보호 대상일세.”

“그렇습니다.”

“필시 철옹성과 같은 방벽을 쌓아 두었겠지.”

“당연히 그럴 겁니다.”

강우경의 눈이 깊어졌다.

“자네가 왜 직접 보자고 했는지 이해가 가는군.”

수년 전에 죽은 살왕 천하진은 명실공히 암살계의 황제였다.

하지만 그는 살수이기 전에 무인이었다. 그 무공의 경지가 뛰어났고, 살법의 이해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에 당당히 살수지왕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정확히 말하자면 천하진은 ‘죽이는 능력’이 천하제일로 뛰어난 자였다. 심지어 살수다운 언행은 보여 준 적도 없었다.

강우경은 달랐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살수라는 느낌에 십 할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암살자. 무공의 경지를 논하기도 전에 은밀하게 숨어들어 목표물의 목을 베어 버리는 죽음의 안개.

강우경이야말로 당대 살수들의 제왕이라 불릴 만하다. 이천상 앞에 가로막혔지만, 그 전까진 누구도 그가 마신궁에 침투한 사실을 몰랐다.

“결론부터 말하겠네.”

강우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도는 해 보겠네.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말게.”

놀라운 발언이었다.

무상으로 십 년 동안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황태자를 암살하는 일이다. 의뢰를 거부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의 결단,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후우, 이거야 원. 엄청나게 바빠지겠군.”

“하지만 제 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음? 끝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저는 의뢰 대상이 황태자라고만 했지, 그를 죽여 달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강우경의 눈이 번뜩였다.

“죽이지 말라고?”

“어르신께서도 방금 말씀하셨잖습니까.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그랬지.”

“황태자를 공격하는 것. 그 행위의 주체가 되어 달라는 것만으로도 무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리되면, 어르신께서 갖고 계신 기반이 모두 날아가 버리지 않겠습니까.”

강우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면 내게 무엇을 바라나?”

“공격해 주십시오. 천하의 모든 살수를 동원해서.”

“…….”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나 주십시오.”

“호오.”

강우경이 미소를 지었다.

“물어뜯는 들개 역할을 해 달라?”

호요성이 마주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도, 눈치가 빠른 사람도 많지 않다. 그중 한 사람이 아군인 강우경이라서 다행이었다.

“황태자는 적의 최우선 보호 대상임과 동시에 상당히 떨떠름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담사영은, 황태자가 죽어 버리면 더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이왕지사 황태자까지 죽었겠다, 본인이 직접 황제가 되려 할 수도 있으니까요.”

“위험한 자야. 진정으로.”

“하지만 제 손으로 황태자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담사영에게 황태자는 아직 쓸 만한 가치가 있는 패일 테니까요.”

“음.”

“죽으면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든 막기는 막아야 하는 대상. 그것이 담사영에게 있어 황태자라는 존재입니다.”

정확한 안목이었다.

강우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즉, 남들 눈 때문이라도 황태자를 존중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거기서 나아가, 황태자가 원하는 거라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무엇이라도 들어주는 관계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호요성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가 죽지 않은 채,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겪는 것이 최상입니다.”

강우경의 눈이 흔들렸다.

“자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었군.”

“그렇습니까.”

“차라리 황태자를 죽여 달라 했다면 이해했을 걸세. 한데 자네나 담사영이나, 황태자를 장기의 말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군.”

호요성의 웃음이 씁쓸해졌다.

“저쪽은 선을 넘지 않는 싸움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쪽 역시, 적이 지키지 않는 선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지요.”

“…….”

“나아가 저의 주인은 교주님이십니다. 저는 불충하게도 총군사라는 직함을 변명 삼아 교주님조차도 장기 말로 쓰는 못난 사람입니다.

그에 비하면 황태자 따위야 별것도 아니지요.”

진심이다. 강우경은 호요성의 말에서 진심을 읽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우경은 생각했다.

‘저런 위험천만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총군사야말로 서 교주에게 있어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호요성이 물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 허허,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적을 공포에 질리게 하라는 것 아닌가?”

강우경이 슬쩍 턱을 치켜들었다.

음지의 살수 집단,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조직이라는 무색사의 주인다운 위엄이 묻어 나왔다.

“걱정하지 말게.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걸세. 아마 목표 대상이 된 사람은 공포에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강우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도 다 끝났으니, 시간 길게 끌 것 없겠지. 곧바로 움직이겠네.”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최대한 발 빠르게 움직일 것이니, 늦어도 사십 일 안쪽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호요성의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기 때문이다.

몸을 돌리려던 강우경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호요성을 내려다보았다.

“궁금한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미리 말하네만, 곤란한 질문이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알겠습니다.”

강우경의 눈이 반짝였다.

“옥새, 신교가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네.”

호요성이 씨익 웃었다.

“그렇습니다.”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알려 준다. 그가 강우경을 얼마나 믿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 옥새. 옥새는 중요하지. 옥새라는 물건 자체가 황권이고 명분이니까.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 옥새를 언제 쓸 것인가.”

“그렇다네.”

일순 호요성의 두 눈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깃들었다.

그 파멸적인 살기에 강우경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놈들은 철혈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혈성에는, 본교와는 달리 양민들도 많이 있지요.”

“……?!”

“담사영은 중원의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겁니다. 그래서 어르신께 황태자를 쥐고 흔들기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하면?”

“예.”

호요성이 차갑게 웃었다.

“옥새를 쓸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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