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화. 전선을 가르고 (5)
“오랜만이구나.”
“그렇군요.”
“안 본 새에 많이 야위었다.”
“바빴습니다.”
“바쁘기야 했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네가 자초한 일이 아니더냐.
범과 사자의 싸움에 몸을 던졌으니, 들개만도 못한 우리가 고생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
“그건 정정하셔야 할 표현이로군요.”
“음?”
“용(龍)과 굶주린 늑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고양이에 불과하지요.”
“…….”
“그래서 저는 용의 등에 타기로 했습니다. 그와 함께하면, 본문을 둘러싼 암울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허튼소리.”
스르륵.
휘장이 젖혀지며, 창백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 여인의 눈에는 굉장한 엄기(嚴氣)가 깃들어 있었다. 병약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인한 눈빛이었다.
“우리는 최악의 땅에서 최선을 만들어 내는 자들이다.
깨끗한 곳을 찾는 자들이 아니라, 그나마 덜 더러운 곳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야. 그것이야말로 본문이 수백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 전략이다.”
“과거에는 그랬지요. 이제 그래선 안 됩니다.”
“과거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수년 전에 불과하다. 내가 쓰러지고 난 후, 네가 하오문을 이끌며 본문은 본연의 전통을 잃었고 생존 전략조차도 잊고 말았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분명 중요하지만, 문도들의 생명과 문파의 미래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본문이 수백 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생존 전략이란 결국, 발전 없는 삶이었을 뿐입니다.”
“발전 없는 삶이라니. 그것은 본문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말이다.”
“전혀 다른 문제를 동일한 것으로 엮어서 보지 마십시오. 저는 정보를 다루는 일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
“본문이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무림이라는 세상에 발을 반만 걸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역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살아 봤자 결국 저흴 기다리는 건 파멸뿐입니다.”
공야치의 눈이 서늘해졌다.
“더욱이, 무림만이 아니라 중원 전체의 역사가 흔들리는 이런 시국에는 말입니다.”
중년 여인의 얼굴에 노기가 일었다.
“그렇다면 왜 숨어들지 않았느냐.”
“숨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요.”
“허튼소리! 너의 과격한 사상과 움직임으로 수많은 문도가 목숨을 잃었어!”
“그래서, 예전에 우리가 생존했던 대로 쥐새끼처럼 숨어서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세상에 나오면,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신 겁니까?”
중년 여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공야치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죽은 문도들에 관한 책임은 전부 제가 져야 합니다. 그 목숨의 무게를 감당할 자는 문주님이 아니라 접니다.
이유인즉, 문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쓰러져 계셨고, 실질적으로 문을 이끈 자가 저이기 때문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멈출 순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도, 미래를 위해서도.”
중년 여인이 탄식을 토해 냈다.
“대체 너를 그렇게 과격하게 만든 자가 누구냐?”
“문주님의 그 말씀이, 저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 것인지 알고는 계신 겁니까? 설마하니 제가 타인의 희언에 일희일비할 만큼 줏대가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이 녀석아.”
“하오문에 속했던 그 순간부터 저는 본문에 뿌리내린 패배감과 저열한 본성을 벗겨 내고 싶었습니다.”
“……!”
“하지만 저 역시 쥐새끼 같은 본성을 버리진 못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변명은 변명이지요.”
“그래서, 본문을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해 줄 명마의 등에 탔던 것이냐?”
“그 또한 틀렸습니다. 명마는 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 등에 용을 태운 것만으로도, 용과 교분을 나누어 우정을 쌓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따위 친분 조금 가졌다고 해서 신교의 교주가 우리를 책임져 주기라도 할 것 같더냐?”
“책임은 타인이 아닌 본인이 져야 합니다. 다만, 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요.”
“세상이 천마신교를 마교라 부르는 까닭에 대해 고민했어야 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종교 단체다.
설령 도움을 준다 한들, 우리를 철저하게 휘하에 둘 생각으로 움직일 거야.”
공야치가 희미하게 웃었다.
“문주님.”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쓰러진 몇 년간의 넌, 분명 문제가 있었어.”
“대체 왜 그리 변하신 겁니까?”
“뭐라?”
“몇 년 동안 정신을 잃고 아프셨다 하여 문주님의 혜안이 무뎌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문주님을 무시하는 처사니까요.”
하오문주, 공야방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설마 하오문이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보 문파로서, 앞으로 천년을 더 살아갈 거라고 확신하고 계신 겁니까?”
“……!”
“문주님께선 본문의 전통과 특유의 생존 전략이, 저들에게 통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공야방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공야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정보로만 접하셨겠지요? 저는 다릅니다. 일선에서 직접 뛰고, 천하가 움직이는 흐름을 몸소 겪었습니다.”
“…….”
“백문불여일견. 감히 확신컨대,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이상 본문의 멸망은 확정입니다.”
무시무시한 발언이었다.
공야방은 제 후계자의 목소리에서 치욕과 분노, 기대와 희망의 감정을 읽었다.
공야치가 절을 올렸다.
“다시 깨어나신 것을 보니 기쁩니다. 문주 대리자로서, 현 시간부로 하오문의 전권을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가 품에서 황금빛 패를 꺼내 땅에 놓았다. 하오문주를 상징하는 문주패였다.
공야방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복수는 했느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 몸뚱이를 이렇게 만든 놈들. 그놈들에게 복수는 했냐는 말이다.”
공야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을 분열시켰습니다. 향후 백 년간은 제대로 된 정보 활동을 못 할 겁니다.”
“……그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져가거라.”
“예?”
공야방이 턱으로 문주패를 가리켰다.
“다시 가져가라고 하였다.”
가만히 공야방을 보던 공야치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장로들에게는 미리 말해 두었다. 난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
“이제부터 네가 하오문주다.”
공야치의 눈이 흔들렸다.
공야방이 한숨 쉬듯 말했다.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네가 지금껏 벌여 놓은 일을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 네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들이 타성에 젖어서 나온 결과였다거나 네 의지가 박약했다면, 절대 문주직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어.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너는 너만의 방식대로 하오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지.”
“……문주님.”
“말했잖느냐? 이제 문주는 너라고.”
“…….”
“문도들의 목숨까지 이고 가겠다는 너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어찌 답이 있겠느냐. 새로운 미래를 그리겠다는 너의 다짐, 한번 지켜보겠다.”
공야치가 고개를 숙였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때였다.
“무, 문주님! 소문주님!”
두 사람이 방문으로 눈을 돌렸다.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교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랍니다!”
“들어오게.”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온 무원각주(武園閣主)가 서신을 전했다.
서신을 펼쳐 본 공야치의 눈이 형형해졌다.
“무슨 내용이냐?”
“……시작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공야치가 서신을 접었다.
그의 눈에 격정의 빛이 담겼다.
“이제야 신교가 작정하고 판을 흔들 생각인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거기서, 저희가 맡아야 할 일이 하나 있는 듯합니다.”
* * *
훅!
송금백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지?’
깊고 깊게 가라앉았던 심상 수련을 단번에 깨부술 정도로 심상치 않은 기파가 느껴졌다.
송금백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두 눈과 함께 마음으로도 세상을 보았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어졌다.
‘살기?!’
그것도 보통 살기가 아니었다.
지닌 살기를 기공의 힘으로 몇 배는 부풀릴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그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기를 숨기는 데에도 능했다.
몸을 수복하고 천룡기를 없애며 얻은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느낄 수 없었을 은밀한 전의(戰意).
“혈위.”
츠츠츠.
핏빛 무복으로 몸을 감싼 검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성주님.”
“지금 당장 성 전체에 비상령을 내려라. 적이 나타났다.”
혈위는 되묻지 않았다. 놀라지도,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명을 받듭니다.”
사라락.
귀신처럼 사라진 혈위가 다시 나타난 것은 일각이 지나서였다.
“성주님의 명을 모두에게 전파했습니다.
내성 전체가 전투를 준비하기까지 반 각, 외성의 은둔한 병력 모두가 일어나기까지는 일각에서 이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늦군.”
그것은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철혈성은 넓었고, 게다가 외성에는 사파의 무사들보다 양민들이 몇 배는 더 많이 살고 있었다.
가만히 창밖을 주시하던 송금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보러 가야겠다.”
혈위의 눈이 흔들렸다.
느닷없이 적이 출몰했다는 말에도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던 그였다. 하지만 송금백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경우가 달랐다.
송금백이 손을 뻗었다.
쿠구궁.
묵직한 대전의 철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신기(神技)에 이른 허공섭물의 술수였다. 기공을 운용하는 능력이 자유자재, 능히 천하 정점에 이르렀다 해도 무방했다.
그 순간, 송금백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파라라라라락!
화려한 곤룡포가 바람을 따라 미친 듯이 펄럭였다.
순식간에 내성을 돌파, 외성 곳곳에 세워진 첨탑 중 하나에 이른 그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
송금백의 눈이 흔들렸다.
“저놈들은?!”
북, 서, 남.
무려 세 방위에서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데 그 속도가 몹시 빨랐고, 기세는 소름이 끼치도록 기괴했다.
‘술법? 천룡!’
그렇다. 천룡궁의 병력이 남북 위아래에서 일시에 몰려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라는 송금백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긴장감 넘치는 살의를 풍기는 한 무리의 적이 있었다.
후욱.
적측 역시 송금백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수백 장이 넘는 거리에서부터 막강한 기파를 숨기지 않고 발산해 냈다.
사왕(四王)이었다. 남궁세가를 멸문시킨 그들이, 이제는 철혈성을 무너트리기 위해 진군한 것이다.
“재미있군.”
송금백은 차갑게 웃었다.
“분명 대단한 전력이기는 하다만, 고작 그 정도로 본성의 전력을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던가.”
타당한 자신감이었다.
의천맹이나 천마신교보다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철혈성의 전력은 건재했다.
고작 천 단위의 적 앞에서 무너질 만큼 만만한 조직이었다면 지금까지 유지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송금백이 외쳤다.
“무상(武相)!!”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근엄한 목소리.
잠시 후, 한 줄기 벼락같은 기운이 내성 안쪽에서 피어올랐다.
후우우우웅.
순식간에 송금백의 앞에 도착한 언극이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성주님.”
“보이나? 저 주제도 모르는 것들 말이야.”
우우우우웅.
언극이 든 장창이 희미한 울음을 발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부나방 떼로군요.”
“그렇지.”
송금백이 서늘하게 웃었다.
“이유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구먼. 어떤가? 본성의 위엄을 보여 주고 오겠는가?”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로지 행동으로 보여 줄 뿐이다.
쾅!
폭음을 내며 날아간 언극의 몸에서 자줏빛 광채가 피어올랐다.
“이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