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화. 지키는 자, 죽이는 자 (3)
콰아앙!
언극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런!’
장창을 양손으로 잡고 다시 한번 휘둘러 본다.
콰릉!
자줏빛 섬광이 터지며 막강한 충격파를 발산했다.
일섬의 창격, 모든 것을 관통하는 무적의 창술이다. 그 창술 위에 각고의 노력과 깨달음으로 창안한 자전삼기(紫電三氣)를 담아 후려쳤다.
카아아앙!
그런데도 막힌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방어력인가.’
그때, 땅에서 기묘한 울림이 발했다.
쿠르릉!
대지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철혈성 일대가 거세게 흔들렸다.
실제 강진(强震)에 가까운 파괴력에 부서지다 만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무수히 많은 무인이 제자리에서 쓰러졌다.
단련이 덜 되었다고 타박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많은 고수가 중심도 못 잡을 만큼 강한 진동에 놀라야 정상이었다.
이변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콰르르르릉! 콰아아앙! 콰아앙!
귀청을 떨어 울리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나무줄기가 땅 곳곳에서 솟구쳤다.
언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무슨 사술인가!”
“사술이라니, 그 말은 좀 섭섭하네요.”
아미파의 대장로, 항경사태가 요기(妖氣)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룡술법, 혈목신기(血木神氣)를 이용한 목극대진(木極大陣)이랍니다.”
“이…… 요사스러운!”
“요사스럽다니요? 천룡의 술법은 대자연의 힘을 이용한 정도(正道)의 도술이에요. 편협한 시각으로 우리의 공부를 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이내 항경사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뭐, 곧 죽을 사람이니 별 상관은 없지만.”
“이년!”
파아아앙!
귀혼창술(鬼魂槍術)이 불을 뿜었다.
언극이 익힌 무수한 창술 중에서도 가장 기본에 충실한 무공이 귀혼창술이었다. 다만 그 기본이, 창의 본질은 물론 공격의 본질에 닿아 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공격의 본질은 곧 살상이다.
귀혼창술은 지극히 단순한 창술이었지만, 자전삼기의 도움을 받아 벼락처럼 빠르고 불꽃처럼 화려한 창술로 변모했다.
하지만 그러한 창술로도 완성된 혈목신기를 어찌할 수 없었다.
퍼어엉!
귀혼창 일격이 성인 남성의 허리보다 몇 배는 더 굵은 나무줄기 십여 개를 일시에 꿰뚫었다.
항경사태의 눈이 반짝였다.
“놀랍군요. 과연 십대고수, 완성된 혈목의 힘까지 부술 줄이야.”
“다음은 네년 주둥이니라!”
“하지만 목기(木氣)의 특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콰드드드득!
번개와 같은 신법으로 들이닥쳐 항경사태의 목을 뚫어 버리려던 언극은 순간 자신의 발목을 잡아챈 나무줄기에 깜짝 놀랐다.
우우우웅.
항경사태의 동공이 붉게 달아올랐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도 버티는 게 식물이죠. 식물의 성장력과 생명력은 자연에서 비할 만한 게 없어요.”
언극이 재차 창을 휘둘렀다.
퍼어어억!
그의 발목을 휘감은 나무줄기가 단번에 뜯겨 날아갔다.
마음 같아선 그러거나 말거나 항경사태부터 죽이고 싶었지만, 발목을 감은 나무줄기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그대로 있었다면 양 발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목기(木氣)는 천하 모든 식물을 관장하는 생명력 그 자체에요. 사파 나부랭이에 불과한 당신 따위가 그 오묘한 이치와 대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기란 어렵겠죠.”
“닥치거라!”
파아아악!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언극이 왼손으로 창대 끝을 잡았다.
언극의 두 눈에서 강렬한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후우우우웅.
창날은 물론 창대에까지 스며든 자전삼기가 무섭게 증폭했다.
항경사태의 눈에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언극이 하늘로 솟구치고 진기를 모으는 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지만, 짧은 순간 증폭된 힘의 크기가 너무나도 거대했던 것이다.
‘저것이 신창 언극의 힘!’
그녀는 십대고수를 제법 많이 봐 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실력을 겪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그들이 평소 품고 다니는 힘의 총량을 보았을 때, 혈목신기 앞에선 한없이 무력할 거란 판단을 내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언극은 십대고수 중에서도 잘해야 중위권이라는 평가를 받는 고수였다. 창술가로는 천하제일이지만, 무공으로는 천하제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어정쩡한 고수가 발산하는 힘이, 어찌 저리 강할 수 있을까.
천하제일의 공부가 분명한 천룡술법 앞에서도, 저 사파 나부랭이는 어찌 겁을 먹지 않는 것인가.
휘이이잉! 휘이이이잉! 파지직!
항경사태의 눈이 커졌다.
‘바람이……?!’
공기를 빨아들이는 창의 회전.
허공에 생겨난 무수히 많은 무형의 창이 공기를 빨아들이며, 반투명한 송곳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런 바람의 힘 위로 자줏빛 전광이 미친 듯이 이글거렸다.
언극의 입이 열렸다.
“자전회곡(紫電廻哭).”
언극의 이대 절기 중 하나 풍뢰구절창(風雷九絶槍).
그중 광범위한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는 절대의 무공이 펼쳐졌다.
피이이이잉! 콰아앙! 콰쾅! 퍼어어엉!
활시위 놓이는 소리와 함께 아홉 개의 무형장창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퍼어어어억! 푸화아악!
자전회곡에 격중당한 고수들의 몸이 산산이 찢겨 날아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전회곡의 대상은 사람과 나무, 땅과 벽을 가리지 않았다.
콰드드득! 퍼엉! 퍼어엉!
미친 듯이 쏘아지고 꿈틀거리는 자전회곡의 아홉 창격이 헤아릴 수 없는 나무줄기를 마구 터트렸다.
항경사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이럴 수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힘이었다.
마치 뇌창(雷槍)을 얻은 풍백(風伯)이 지닌바 모든 힘을 쏟아 내는 것 같았다.
심지어 일격을 터트리고 나면 소멸하는 여느 기공술과 달리, 살아 움직이는 풍뢰창이 끊임없이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지금의 항경사태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무도(武道)였다.
‘하지만!’
항경사태가 힘차게 발을 굴렀다.
콰앙!
땅이 들썩이며 더 많은 나무줄기가 솟구쳤다.
언극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조각나 흩어진 나뭇조각이 땅으로 파고들더니, 스스로 씨앗이 되어 더 많은 줄기를 생성해 낸 것이다.
항경사태가 하얗게 웃었다.
“당신들은 절대로 우릴 막을 수 없어.”
“빌어먹을 년이!”
파아아앙!
허공답보로 순식간에 항경사태의 후방으로 날아간 그가 창을 고쳐 쥐었다.
“터트려 짓누르는 게 안 된다면, 모조리 태워 버리면 그만이다.”
화르르르륵!
바람과 벼락의 자전회곡.
그다음은 불벼락의 뇌화일섬(雷火一閃)이었다.
파아아아아앙! 퍼어어억!
쾌속하고도 묵직한 일격에 가장 거대했던 나무줄기가 통째로 불타올랐다.
그때였다.
촤아아아아악!
언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럴 수가!’
나무를 태우던 불길이 일순 허연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사방으로 강한 습기가 번져 나갔다.
수기(水氣)였다. 무형의 수기가 나무에 붙은 불을 완전히 꺼트려 버린 것이다.
“목극대진으로 철혈성을 장악한 후, 화극의 힘으로 일대를 지옥으로 만든다.”
언극이 항경사태를 보았다.
항경사태가 미소를 지었다. 불법을 모시는 아미파의 제자일진대, 그 웃음이 마치 요괴의 그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화극의 힘은 지옥의 겁화와도 같죠. 휩쓸리면 우리라고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는바,
아직 미완성이지만 혈수신기(血水神氣)를 다룰 줄 아는 이도 몇 데려왔어요.”
“젠장맞을.”
“내가 왜 이런 사실을 다 말해 주는 줄 알아요?”
항경사태의 두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포기하는 게 낫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예요. 막을 수가 없거든요. 우리의 계획을 다 알아도 말이에요.”
언극은 답답함을 느꼈다.
‘이따위 장난질은 성미에 안 맞거늘.’
비록 잔혹하고 독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는 실로 무인다운 무인이었다.
술법이니 뭐니, 그런 건 신경 써 본 적도 없다. 그저 한 자루 창으로 세상과 드잡이질하며 지금 이 자리에 올라섰을 뿐이다.
서로를 향하는 병장기 끝에서, 누가 더 위인가를 가리는 것만이 지고의 가치일 뿐이다.
이 힘은 이렇고 저 힘은 저렇고 등의 쓸데없는 잡공 따위엔 관심조차 준 적이 없었다.
즉, 언극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쪽만 답답한 건 아니군.’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철혈성의 외성 곳곳이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고작 일천의 병력으로 이 넓은 외성의 절반 이상이 초토화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은 전부 이 기묘한 목기(木氣) 탓이었다. 굵직한 나무줄기가 이 넓은 지역 곳곳에서 자라나며 돌벽과 사람을 무차별로 부수고 있었던 것이다.
‘개 같은 일이야.’
처음 출격할 때만 해도 사왕에게 한 방 먹여 줄 생각이었지만, 일순간 몰아치는 술사들 때문에 진로를 변경했다.
잡술에 목매는 머저리들부터 완전히 박살 낸 후, 사왕들을 하나하나 손봐 줄 생각이었다.
설마하니 이 답답한 싸움터에서 일각이 넘도록 붙잡혀 있을 줄이야.
그때, 땅을 뚫고 조용히 올라온 덩굴 하나가 은밀하게 언극의 목덜미를 향해 다가왔다.
퍼어어억!
아무렇게나 휘두른 창에 덩굴이 갈려 나갔다.
푸스스스스.
그것을 기점으로, 언극의 주위 곳곳에서 얇은 덩굴들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것들은 얇았지만, 나무줄기보다 훨씬 질기고 유연해 보였다.
“안 되겠어.”
언극의 두 눈에 결심의 빛이 어렸다.
“더 늦었다가는 이 나이에 성주님께 야단을 맞겠다.”
콰앙!
강인한 진각과 함께 그의 창이 수십 개의 환상을 만들어 냈다.
퍼버버버벅!
덩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더 많은 덩굴이 솟아 나오며 언극을 노렸다.
항경사태가 미소를 지었다.
점점 수를 더해 가는 덩굴이 꿈틀거리며 언극의 모습을 지워 내고 있었다.
“그래도 오래 버텼군요. 과연 십대고수는 대단해요.”
퍼퍼퍼퍼퍼펑!
“너무 애쓰지 말아요. 어차피 당해 내지 못할 것,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찌이이이익! 퍼퍼퍼펑! 퍼엉!
항경사태의 얼굴이 굳어졌다.
언극이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 그를 수많은 덩굴이 에워쌌지만, 언극의 창은 시간이 갈수록 빠르고 단순해지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기공술이고 나발이고, 성미에 안 맞는 짓은 그만두자고.”
퍼버버버벅!
연신 창을 휘두르며, 언극이 말했다.
“대자연이고 나발이고, 네년 역시 무공을 익혔다면 십대고수와 손속을 나눠 보고 싶지 않나? 고작 술법 나부랭이에 도취되어 근본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싸구려 도발이군요.”
“완전히 망가져 버린 거냐?”
“말조심하세요. 망가진 게 아니라 효율을 중시하는 거죠.”
“그래서 부처도 배신하고 그 자리에서 이 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있는 거냐?”
항경사태가 냉정하게 말했다.
“사파 잡졸의 보호를 받는 쓰레기들이에요. 차라리 윤회의 길을 걸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죠.”
퍼어어어엉!
순간 항경사태는 침을 꼴깍 삼켰다.
까드드드드득.
언극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창을 뻗은 자세 그대로 움직임이 제한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창은 항경사태의 목 한 치 앞에 멈춰 있었다.
“아쉽군. 개소리만 뱉는 그 모가지에 바람구멍을 내 줄 수 있었는데.”
“……당신!”
“끄응! 더 강해졌는데?”
“호호호! 당연하죠. 남쪽 진의 중추는 나예요. 내게 향하는 살의는 목기가 모조리 막아 줄…….”
“덩굴을 말하는 게 아니야.”
“……?”
“아주 괘씸한 놈이 하나 있거든. 그놈을 말하는 거다.”
“뭐라고요?”
그때였다.
퍼어어어어엉!
거대한 불덩이와 함께 흑혈의 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극이 으르렁거렸다.
“내 먹이에 손대지 마라!”
“싫소.”
흑혈마검이 항경사태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졌다.
퍼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