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화. 지키는 자, 죽이는 자 (4)
재빨리 신법을 펼쳐 나아가려던 서량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
서량이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호왕과 금호가 걱정스러운 듯 그를 보았다.
우우우우우웅!
일순 서량의 몸에서 군림마황기가 번뜩였다.
마공을 전개하지 않았는데도 마기가 저 스스로 튀고 있었다. 그 튀어오르는 마기는 마치, 떨어져 나간 조각 하나를 회수하기 위해 알아서 움직이는 듯했다.
까드드득.
천마도를 쥔 서량의 손이 떨렸다.
굵게 도드라진 핏줄. 격동과 슬픔으로 가득 찬 그의 손에 쥐어진 천마도가 둔중한 울림을 발했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밑으로 한 줄기 투명한 액체가 흘렀다.
* * *
퍼어어엉!
고루마존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곧장 치고 들어가 그의 목을 날려 버리려던 담사영은 순간 가슴팍까지 밀고 들어온 무형의 장력에 눈을 부릅떴다.
쾅!
본능적으로 내친 일수(一手)로 장력을 터트렸지만, 손바닥 전체에 은은한 통증이 남았다.
담사영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를!”
서걱!
물러난 고루마존의 어깨에 깊은 검상이 났다.
놀라운 반응 속도였다. 본래라면 목젖을 사선으로 가른 검력이 빗장뼈와 어깨까지 통째로 잘라 냈어야 했는데도, 어깨 근육을 베어 낸 것에서 그쳤다.
‘이놈.’
우우웅.
비틀거리던 고루마존의 어깨에서 흑갈색 마기가 치솟았다. 쩍 갈라진 상처가 무서운 속도로 아물었다.
물론 외상에 한해서였다. 상처의 단면으로 침투한 혈금신기는 단숨에 왼팔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었다.
딱 그 정도.
본래라면 일격만으로도 몸 전체가 경화되어 옴짝달싹도 못 해야 정상이었다.
그 상식이 고루마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옆구리에 난 상처로 인해 기문혈이 손상되고 근육이 굳어 버렸지만, 그 경화가 척추와 고관절까지는 파고들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에 자잘하게 입은 검상도 상처 주변의 근육만 굳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승부에서 치명적인 손해를 입은 것이나 다름이 없거늘.’
고수의 싸움은 한 끗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옆구리와 상체 곳곳의 근육, 나아가 왼팔까지도 굳어 버렸다면 단숨에 승부가 갈려야 정상이었다.
한데도 고루마존은 위기의 순간, 불가사의한 힘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궁금한가.”
저것도 이상하다.
옆구리에서 올라온 혈금신기로 안면 근육이 죄 경직되었는데도 신기하게 성대와 혀는 굳지 않았다.
담사영이 좌수에 담긴 청천허상검의 검력을 풀었다.
푸화아악!
빈틈을 보고 달려들었던 마인 다섯의 몸이 쪼개졌다.
‘흠.’
콰득!
갈라진 시신의 상체를 밟으니 갈비뼈가 움푹 들어갔다.
그 정도면 충분히 굳어졌다고 봐야 했다. 본래라면 갈비뼈부터 등뼈까지 완전히 으스러졌어야 정상이니까.
즉, 천마군의 마인들에게는 혈금신기가 통한다. 그러나 고루마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담사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괴학(怪學)을 익힌 것이냐.”
“헛소리.”
우우우우웅.
담사영의 눈이 흔들렸다.
‘움직여?’
연검의 검첨이 고루마존을 향해 슬금슬금 기울어졌다.
강력한 인력(引力)이 담사영의 검을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고루마존의 고목인이라는 수법이었다.
“감히 사술을!”
파아아앙! 서걱!
담사영의 눈이 흔들렸다.
천영까지는 아니더라도, 허극신을 극성까지 펼쳐 내 내친 일격이었다. 설령 고루마존이 멀쩡했더라도 쉽게 피하지 못했을 일격이었다.
한데 이번에도 일검이 팔뚝을 스친 것에 끝났다.
‘왼팔?!’
더 놀라운 것은 고루마존의 대응 방식이었다. 이미 움직이지 않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잡아 검격을 막아 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대응이었다. 움직이지 않는다 한들 제 몸뚱이임은 분명한데, 마치 물건처럼 잡아서 검격을 막다니?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퍼어어엉!
묵직하고 부드러운 일격에 담사영의 몸이 십여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밀어 내는 것에 가까운 무공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수법에 담사영이 당했다는 것이다.
무공의 격차가 분명한데도 몇 번을 당했는지 모른다. 제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았다 해도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담사영은 그 자리에 서서 고루마존을 노려보았다.
“헉헉.”
고루마존의 호흡이 점점 격해졌다.
‘호흡이 안 된다.’
치고 올라오는 혈금신기를 간신히 막아 냈지만, 혈금신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의 힘이 약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격, 일격을 허용할수록 혈금신기의 전파를 막기가 버거워졌다.
고목인의 반대 구결로 척력(斥力)을 극대화, 격산타우의 수법까지 섞어서 담사영을 밀어 냈지만, 체내에 남은 혈금신기는 그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폐장을 건드렸다.
폐가 조금씩 조금씩 굳어져 갔다. 극히 미세하지만, 그 미세한 경화로도 단숨에 호흡이 격해졌다. 깊은 호흡을 기반으로 하는 내공의 발출력까지 줄이는 것이다.
‘역시, 안 되는군.’
담사영을 보는 고루마존의 눈이 깊어졌다.
상당히 놀란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만도 했다.
물론 고루마존은 상대와 자신의 힘의 격차를 오인하지 않았다.
‘놈은 언제든 날 죽일 수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담사영이 진심으로 일격을 가하면 지금의 자신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담사영은 자신을 일격에 죽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피 흘리는 사냥감을 노리는 표범처럼 고요하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고 싶은 것이겠지.’
놈은 심상치 않은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힘은 분명 천룡술법의 근간이 되는 기운일 것이다.
덕분에 놀랍도록 강해졌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신체의 유연성, 강도, 체력, 내공 운용까지 전반적인 기량 자체가 상승했지만.’
고루마존은 지어지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그의 얼굴 위로, 환하게 웃는 마존의 환상이 일었다.
‘넌 절대로 교주님을 넘어서지 못해.’
교주님의 경지는 단순히 신체와 내공의 활용도가 상승한 정도가 아니었다.
고루마존은 알고 있었다. 이미 교주님께서는 천리(天理)의 틈새마저 엿본 분이라는 것을.
결국 신화경에 들지 못했다?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교주님께서 그 길에 한 번이라도 올랐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 한 번의 오름은 극치의 깨달음이요, 만상(萬象)을 이해하는 지혜였다.
천룡술법도 대단했지만, 그저 껍데기뿐인 힘을 이용해 강제로 힘을 취한 자는 어떠한 편법 없이 깨달음의 바다에 몸을 던진 사람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다만, 자신처럼 애초에 수준 차이가 극명한 사람이라면 결과가 반대겠지만.
“궁금한가?”
담사영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다소 거칠어졌었던 상대의 호흡이 점점 안정적으로 가라앉았다.
미묘한 변화. 공기가 점차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제각기 산개해 퍼진 천마군의 마인들이 섬뜩한 마안을 빛내며 담사영을 노려보았다.
담사영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저들 모두가 천하진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시건방진 놈들.”
감히 천하의 주인이 될 자신을 저따위 눈으로 노려보다니, 용납할 수 없는 놈들이다.
고루마존이 말을 이었다.
“이해되지 않겠지? 네놈의 그 사이한 힘에 저항하는 내가.”
“시끄럽다.”
화아아아아악!
담사영이 쥐고 있던 연검이 일순 완전한 핏빛 광채로 뒤덮였다. 그 빛이 어찌나 찬란한지 검신(劍身)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뭐가 어찌 되었든, 다 날려 버리면 그뿐이다. 유희는 여기까지야.”
“네놈이 절대 교주님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는 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뭐라?”
우우우우웅.
고루마존의 오른손에서 은은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놀랍게도 그 마기는 고루마존 고유의 마기가 아니었다. 흑갈색의 마기 속, 번갯불 같은 섬광을 뿜어내는 파괴적인 힘이 번뜩이고 있었다.
담사영의 눈이 커졌다.
“그건?!”
“군림마황기의 편린이다.”
고루마존의 눈이 빛났다.
“네 말이 옳다. 이 못난 늙은이는 그때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교주님의 하해와도 같은 은총 덕에, 한 번 멈췄던 나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지.”
지이잉. 지이이잉.
흑갈색 마기가 불길하게 방전했다. 군림마황기가 점점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그때 교주님께서 내게 넘겨주신 이 힘, 극히 작은 마신(魔神)의 편린만으로도 너의 기묘한 힘에 저항할 수 있었다.”
군림마황기의 본질은 파괴다.
그저 그 하나뿐이다.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대적인 힘, 그 앞에서는 정종의 무공도 마도나 사파의 이학도, 심지어 술법조차도 무의미하다.
없애고 멸하는 것.
군림마황기의 독보적인 힘은 천룡의 술력조차도 산산이 파괴해 버린다.
시전자의 의지만 확고부동하다면, 목숨을 걸 각오만 되어 있다면 존재하는 무엇이라도 멸할 수 있다.
“마신이 마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힘.
나는 그 힘의 편린을 받아서 강해진 게 아니다. 그 편린이 품고 있는 지독한 파괴 의지를 억누르기 위해 본신의 무공이 상승한 것이야.”
“……!”
“알겠느냐? 교주님께서는 고금에서 가장 강력한 기운을, 역사상 손에 꼽힐 만큼 농축된 절대마기를 품에 안고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계신 것이다.”
꿈틀.
고루마존의 얼굴이 작은 미소를 그렸다.
돌처럼 굳어졌던 근육이 점차 풀리고 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우리가 천마(天魔)를 신으로 숭배하는 무수히 많은 이유 중에 하나다.
이 강력한 힘을 품은 채로도 멀쩡히 살 수 있는 자는 이미 사람이 아니야.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아니고서야 버틸 수가 없지.”
“…….”
“네놈이 그 부스러기 같은 힘을 태산만큼 모은다 한들, 신을 상대할 수는 없다.”
퍼어어어억!
고루마존이 담담한 눈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담사영의 연검이 흉골을 뚫은 것도 모자라, 팔뚝까지 쑥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담사영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신이니 교리니, 그따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더 이상 듣지 않겠다.”
“쿨럭!”
“딱히 재미는 없었다만 흥미로운 실험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혈금신기가 너희 마인들에게도 통한다는 걸 안 것으로 되었어.”
“……그래?”
“잘 가시게. 자네는 퍽 흥미로운 실험체였어.”
그때였다.
사락.
담사영의 눈이 흔들렸다.
고루마존이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왼팔은 움직일 수도 없을 텐데, 어떻게 잡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루마존의 눈이 흐릿해졌다.
‘교주님.’
서량의 얼굴이 떠올랐다.
십대천마 서량이 아닌, 삼공자 서량의 얼굴이.
나아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천하제일살수 살왕 천하진의 모호한 얼굴이.
‘노신은 먼저 갈 터이니, 부디 스스로의 모순조차 깨닫지 못하여 괴물이 된 이 숙적을 물리치고 마도천하를 이루시기를 진심으로 바라옵니다.’
그리고 그 과거의 모습들이 뭉개지고 또 뭉개지며, 현재 서량의 모습으로 재탄생되었다.
핏빛 전포를 걸친 채 거대한 태사의에 앉아 만인을 굽어보는 절대마신(絶代魔神)의 환상.
고루마존이 버럭 고함을 토해 냈다.
“이노옴!!”
우우우우우웅!
그의 양손에서 군림마황기가 증폭했다.
담사영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어렸다.
콰르르르릉!
폭음과 함께 흑갈색 뇌전이 방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