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지키는 자, 죽이는 자 (6)
펑! 화르르륵!
“크아아악!”
“뭐, 뭐야?!”
“저놈이다! 항경사태가 말한 놈이 저놈이야!”
콰르릉!
대지를 뒤흔드는 진각과 함께 벌겋게 타오르는 구유마화가 사방을 뒤덮었다.
각 방위를 향해 쏘아지는 불기둥이 철혈성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 덩굴과 나무를 불태워 버렸다.
목극대진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에 몽땅 없애 버릴 생각인 것이다.
“쿨럭!”
마동필이 밭은기침을 뱉었다.
피는 배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호흡이 격해지고, 안색 또한 창백해졌다. 무리한 마공 운용으로 내부가 진탕되기 시작한 것이다.
‘불가능한가.’
철혈성은 넓다. 오죽하면 하나의 소국(小國)이라 불릴 정도이지 않은가.
마동필이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뽑아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젠 활력단도 떨어져 버린 상황이며, 설령 활력단이 있다 해도 소모된 마기가 순식간에 차오르는 건 아니었다.
결국 판단을 내려야 했다.
‘내성, 혹은 외성.’
범위는 외성이 훨씬 넓다. 그건 당연했다.
중요한 건 내성이야말로 철혈성의 진짜 전력이 집결된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외성에는 무공을 모르는 범부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싸움에 휘말려선 안 되는 양민들이었다.
동맹군의 전력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이 싸움과 관계없는 양민들을 살려야 하는가.
‘제기랄.’
천하의 마동필로서도 선뜻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교주님.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콰르릉! 퍼어어어엉!
끔찍한 폭음과 함께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었다.
마동필이나 언극이나,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들이다. 그래서 이 괴상한 덩굴과 나무줄기를 손쉽게 뜯어내거나 태워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민들에게는 이 무서운 공격을 막을 힘이 없었다.
덩굴은 양민들의 몸을 휘감아 부러트렸고, 몸통을 파고들어 피를 쪽쪽 빨아먹었다.
피를 흡수한 덩굴과 나무줄기는 점차 붉게 물들었다. 붉게 물든 덩굴과 나무줄기는 이전보다 더욱 질기고 단단해졌다.
마동필이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선 아군 전력의 보존이 필수다.
그러나 마동필은, 죄 없는 양민들이 기괴한 수목(樹木)에 당해 비참하게 죽어 가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콰아앙!
강력한 진각과 함께 핏빛 화염이 불타올랐다.
마동필의 두 눈이 동공을 넘어 흰자위까지 몽땅 핏빛으로 물들었다.
“구중마검세(九重魔劍勢).”
무공의 이름을 직접 소리 내 외치며 무공이 지닌 본질의 위력을 극대화한다.
흑혈마검이 폭발적인 움직임을 토해 냈다.
콰르르르릉!
아홉 줄기로 쏘아져 나간 화염의 돌풍이 일대에 뻗어 있는 수목을 몽땅 태워 버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이다. 작정하고 모든 힘을 쏟아 내는 마동필의 무공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했다.
‘부족해.’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극마의 고수로서 낼 수 있는 힘의 한계치를 뽑아내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었지만, 외성 전체로 보면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래도 한다.’
외성에 드리워진 수목의 삼분지 일도 불태우지 못하고 쓰러질 게 뻔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불가능한 걸 알아도 해야 한다.
퍼어어엉! 퍼퍼퍼펑!
연신 터져 나오는 폭음과 함께 수목들이 꿈틀거리며 불타올랐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채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는 수목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이승인지 지옥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때였다.
성벽 근처를 뒤덮은 수목을 태워 버리려던 마동필의 눈이 커졌다.
쿠구구구궁! 콰아앙!
거대한 성루가 부서지며, 수십 명의 양민을 그대로 깔아 뭉개 버렸다.
‘이……!’
이건 전적으로 마동필의 실수였다.
이들은 목극대진을 펼쳐 철혈성을 에워싸고, 화극대진의 힘으로 철혈성 자체를 통째로 소멸시킬 생각이었다.
그것은 술력으로 증폭된 목기와 화기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동필이 뿜는 화기 역시 보통 화기가 아니었다.
천룡술법의 상생으로 발생하는 파괴력만은 못하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더 큰 화재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끔찍한 결과가 나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며 뿜어냈건만, 결국 완벽하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마동필이 서둘러 성루에 깔린 양민들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르르릉.
수목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졌다. 사방으로 튄 피를 빨아들이기 위해서였다.
혈목(血木)의 신기(神氣)다. 그들이 다루는 힘 앞에 언제나 혈(血)이라는 글자가 붙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천룡의 술법을 극대화하는 힘은 피였다.
기(氣)는 고여 있지 않고 흐르는 법이고, 그것은 인체의 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인체의 기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 바로 피였다. 혈관을 타고 흐른 피가 온몸에 기를 퍼트리는 것이다.
피는 곧 생명력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즉, 천룡술법은 혹독한 대자연의 재앙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은 인간이라는 종(種)의 생명력을 바탕으로 상상과 의지를 현실로 구현하는,
마공 못지않은 역천의 술법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들이!”
흑혈마검이 허공을 갈랐다.
파아아악!
파괴적인 화검(火劍) 일격에 수목들이 우수수 잘려 나갔다.
마동필의 호흡이 격해졌다.
‘이대로는 안 돼.’
외성에서 날뛰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철혈성의 무사들도 외성 곳곳에서 날뛰고 있었다. 그들은 수목을 베어 내거나 양민들을 대피시켰다.
‘양민은 물론 아군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도 있다.’
콰드드득.
사방에서 덩굴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어느새 쑥쑥 자란 나무줄기는 거목이 되어 전각 하나를 통째로 에워쌌다.
‘어떻게 하지.’
비명이 난무했다. 폭음이 울렸다.
사방에서 핏기 없는 살점들이 흩날렸다. 무너지는 성벽이 철혈성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 지옥 같은 세상 한가운데에 선 마동필의 두 눈이 점점 어둡게 물들었다.
그때였다.
마동필의 눈에, 또 하나의 성루가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마동필의 실수가 아니었다. 땅에서 솟구친 수목이 성루의 중심을 무너트려 버린 것이다.
‘……!!’
그리고 무너지는 성루 앞에는 수많은 양민이 있었다.
파아아아앙!
마동필의 몸이 빛살이 되어 나아갔다.
수목을 태운다? 적을 죽인다?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지킨다.’
언제나 그랬다.
신교에 들어와 호법원의 삼 조장, 나아가 십대천마의 밀착 호위가 되기까지.
그는 언제나 누군가를 지키는 자로서 성장해 왔다. 나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호위 대상을 지키는 사람이이 바로 그였다.
‘이번만큼은 지킨다!’
저들을 절대로 죽게 하지 않겠다.
지키는 자로서 성장했지만, 지금껏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했던가. 얼마나 많은 동료를 잃었고,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가.
극마의 고수? 교주의 오른팔?
분수에 넘치는 이명이다. 마동필에게 그런 거창한 말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그는 그저 지키기 위해 세상에 난 사람이었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내가 지키고자 하는 세상을 지킨다.
오직 그거면 되는 것이다.
‘안 돼.’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마동필의 눈에 거의 다 무너져 가는 성루가 보였다. 그리고 성루 바로 밑에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공포와 절망으로 얼룩진 양민들이 보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거리를 좁혔지만, 여전히 이십여 장이나 되는 거리가 남아 있었다.
지금의 마동필로서는 저들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신법의 실력도, 마공의 깊이도, 잔존하는 내공도 모두 부족했다.
‘이번에도 난 지키지 못하는가.’
지키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번에도 실패하는가.
전쟁과는 무관한, 이 버러지 같은 목숨 수천 개보다도 더 소중한 저 사람들이 죽어야만 하는가.
‘지키고 싶다.’
느려진 세상 속, 성루가 점점 더 기울어지고 있었다.
양민들의 공포와 절망은 무서운 속도로 증폭하고 있었다. 성루가 기울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이번만큼은.’
어둠으로 물들었던 마동필의 눈에 핏줄이 섰다.
‘이번만큼은 지킨다!!’
그때, 마동필이 흑혈마검을 뻗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렇게만 하면 저들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마동필의 모든 ‘욕망’이 흑혈마검에 실리고, 수목을 베며 흡입한 양민들의 피가 짙은 원혼(冤魂)을 일깨웠다.
번쩍!!
흑혈마검이 암광(暗光)을 발했다.
욕망의 깊이, 극마의 한계.
본래 갖고 있던 욕망의 한계치를 돌파한 강력한 염원이 구유마공의 삼 식(三式)을 강제적으로 일깨웠다.
크아아아아악!
여기에, 또 하나의 마왕이 땅을 뚫고 솟구쳤다.
쿠구구구궁!
천지를 뒤흔들며 이승에 강림한 진정한 마왕이다.
세상을 찢고 공포의 포효를 쏟아 내며, 하늘 아래 유일무이한 파괴신이 나 자신임을 증명하는 욕계(欲界)의 또 다른 주인.
구유마공 삼 식, 열세마왕공포식(裂世魔王恐咆式)의 발현이었다.
마동필의 입이 열렸다.
크허허허헝!
낮고 탁한, 새까만 어둠이 한가득 느껴지는 마왕의 포효.
‘막아!’
흑혈마검이 일순 훅! 하고 사라졌다.
파바바바바바박!
한 줄기 흑선(黑線)으로 화한 흑혈마검이 일순 수백 번이나 성루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번개처럼 빠른 속도였다. 눈 깜짝할 새에 수백의 참격으로 성루를 산산조각 내 버리는, 그야말로 신(神)에 이른 검술이었다.
검을 다스린다. 검을 조종한다.
검도(劍道)의 극치, 이기어검(以氣馭劍)이었다.
본인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깊어진 욕망이 구유마공의 삼 단계를 개방하고, 나아가 마왕이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권능인 어검술까지도 돌파해 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동필의 두 발이 불을 뿜었다.
번쩍!
극한의 속도였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무공의 한계를 넘어선 고수가, 이제는 경지(境地)라는 한계마저 넘어서며 극속(極速)의 보법으로 먼 거리를 격하고 쏘아졌다.
기울어진 성루가 수백 조각으로 박살 나며 대지에 돌의 비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사이, 마동필의 신형이 모든 양민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콰콰콰쾅!
사방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허억! 허억!”
마동필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주저앉아 버린 그의 옆에는 무너지는 성루에서 구한 양민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지켰다.’
주르륵.
코와 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일순간 열세마왕공포식을 해방하며 무공의 경지 자체를 끌어올렸지만, 그 상태에서도 한계를 넘은 움직임을 선보였다.
내상이 한층 심화되고, 전신의 신경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극심한 통증에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마동필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지켰어.’
지켰다. 그들을.
내 의지로 지키고자 다짐했던 이들을, 드디어 지켜 내고야 말았다.
마동필이 흐릿한 눈으로 양민들을 바라보았다.
공포에 질렸던 양민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마동필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야.’
저 표정, 환희와 놀라움으로 점철된 저 생동감 넘치는 표정.
저거면 됐다. 저 얼굴을 봤으니 이걸로 충분하다.
‘다행…….’
마동필의 눈이 점점 감겼다. 극심한 내상과 너덜거리는 혈도가 그의 혼을 저승으로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 마왕(魔王)을 자처하는 이가 나타났다면, 그 위에는 마신(魔神)이 있어 하늘을 열고 강림한다.
화아아아아아악!
뜨겁게 달아오른 열풍에 막대한 마기가 실렸다.
번쩍!
마동필의 두 눈이 다시 뜨였다.
쿠르르르릉.
너덜거리던 혈도가 무서운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극심한 내상 또한 불가사의한 속도로 치유되고 있었다.
콰르르르릉!
마른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휘몰아쳤다.
마동필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죽음의 늪으로 떨어졌던 그가, 신의 부름에 강제로 송환 당한 것이다.
그가 서쪽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는 서쪽 하늘에서, 재앙에 가까운 힘이 밀려오고 있었다.
“……교주님.”
부덕과 악의, 치졸함과 복잡함으로 얼룩진 이 기괴한 전장을 일거에 쓸어 버릴 마신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