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지키는 자, 죽이는 자 (9)
“그래?”
“……그렇습니다.”
보고를 받는 담사영의 모습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교룡조의 최고 조장, 교룡대장(蛟龍大將)은 주군의 그러한 담담함에 내심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는 뒷모습이, 마치 해탈한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달라지셨다.’
그렇다. 담사영은 달라졌다.
특히 근래 들어 그 변화가 눈에 띄게 컸다. 본래 이 정도 보고라면 크게 흔들려야 정상이었다.
물론 수장의 부동심은 수하에게 신뢰를 주기 마련이지만, 지금의 담사영은 마치 그가 처한 상황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듯했다.
흡사 남의 일인 것처럼.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니 별것 아니라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이 교룡대장은 불만이었고, 동시에 그런 주군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다행히 삼왕(三王)은 도주에 성공했습니다만, 추격자의 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부상을 수습하며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알겠다.”
“…….”
“보고가 끝났다면 이만 나가 보도록.”
교룡대장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스르륵.
교룡대장이 나가자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 분노, 서글픔, 체념, 광기 등 어느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소였다.
“서량…….”
서량, 서량, 서량.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읊조리던 담사영은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 더는 천하진이 아닌 서량이라 이거냐?”
천마신교 삼공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후부터, 그는 분명 서량이었다. 더 이상 자유를 갈망하던 살수지왕 천하진이 아니란 뜻이다.
당사자인 서량은 그것을 깨닫기까지 일 년에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고, 담사영은 아직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때가 온 것 같았다.
‘하긴, 계속 부정한다 한들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담사영이 창틀에 양손을 올렸다.
쿠드드득.
그의 손과 닿은 창틀의 경도가 무서운 속도로 올라갔다.
이제는 손을 댄 채 의지만 일으켜도 알아서 혈금신기가 운용되는 경지다.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 혈금신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그였다.
출중한 재능, 완벽하게 다듬어진 그릇.
‘하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
서량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청년의 얼굴 위, 조금은 음침하고 속을 알 수 없게 했던 회색빛 가면을 쓴 암살왕의 얼굴이.
‘그래, 인정해야지.’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그간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하나의 사실을, 다른 사람은 다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만은 꽉 붙들고 놓지 않았던 진실의 밧줄을.
‘이대로라면 진다. 아니…….’
담사영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기실, 이미 졌다고 봐도 되겠군.’
통렬한 패배감이 엄습해 온다.
담사영은 정말이지, 자신이 이 패배를 담담하게 수용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이번 철혈성 공략은 마교 쪽으로 쏠렸던 전쟁의 추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단순히 철혈성이라는 전력을 없애 버릴 수 있어서?
그렇지 않다.
철혈성을 없애는 데에 굳이 화극과 목극의 모든 힘을 끌어다 던진 것은, 철혈성을 없앰과 동시에 그 자리에 새로운 혈신기가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한번 뿌리를 내린 혈신기는 저 이천상이 되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로 증발시킬 수 없다. 담사영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땅속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내린 혈신기가 마침내 강소성 전체를 장악하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공성 병기 하나를 갖게 되는 격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실패했다.
그나마 목극과 화극의 정수라도 빼 올 수 있었던 게 다행이랄까. 그러나 그 힘의 핵(核)을 불려 쓸 만하게 만들려면,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른다.
그렇다. 이번 전쟁에서, 결국 혈목신기와 혈화신기의 대규모 사용은 완전히 막혀 버린 것이다.
그때,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힘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순 있지.”
담사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하여 이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담사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있지.”
그러나 그것이 내가 원하는 길은 아니었지.
담사영은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머나먼 길이었어.’
세상에 태어나 야심을 갖기 전까지,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눈이 난생처음 야심으로 불타올랐을 때.
바로 그때부터 그는 달라졌다.
그렇게 참으로 먼 길을 달려왔다. 중원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필연코 새외의 힘이 필요하다 싶어 암중에 천룡궁을 손에 넣었고,
나아가 중원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불렸다.
황궁의 인사와도 미리 손을 잡았으며, 욕망이라는 독을 풀어 정파 무림을 오염시켰다.
의천맹주가 되고 나서는 그 욕망의 불씨가 작아졌지만, 그 와중에도 꺼지지는 않았다.
한 발, 한 발 성큼성큼 나아가 어느새 정점에 선 인생.
그 인생이, 욕망 가득한 삶이 무언가를 더 얻으려는 마음 때문에 이 정도로 무너져 버릴 줄이야.
“왜 무너졌다고 생각하지?”
담사영은 눈을 감았다.
“무너져 버린 게지. 인간 담사영은, 본디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하긴, 당신은 예전부터 모략과 귀계에 능했지. 아마 유구한 무림사(武林史)에서 최초일 거야. 힘이 아닌 머리로 천하 정점에 올랐던 자는.”
“그런가.”
“뭐가 되었든, 이것 하나는 분명해. 당신은 죽을 때까지 욕망의 늪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
“당신 때문에 나도 이렇게 되어 버렸잖아?”
“뭐?”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단 하나의 천룡으로서 후인들에게 신(神)으로 숭앙받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용신(龍神)이라는 호칭을 당신이 빼앗아 가 버렸지.”
담사영이 눈을 떴다.
여전히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결국 전부 당신 덕분이고, 당신 때문이야.”
담사영이 미소를 지었다.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 본래 자리에 있어야 할 자를 억지로 끌어들여 자신 못지않은 괴물로 만든 것.
그 모든 것이 자신 덕분이고, 자신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담사영은, 놀랍게도 기뻐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동시에, 패배한 현실을 자각했기에 슬프기도 했다.
“정말이지 인정하고 싶지 않군. 내가 패배했다는 것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포기는 지닌바 모든 것을 동원해 부딪쳐 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굳이 부딪쳐 볼 필요가 있을까? 이미 결과는 명약관화한 듯한데?
그때였다.
“초, 총수님!”
교룡대장의 목소리였다.
담사영의 얼굴에 또다시 씁쓸함이 일었다. 수하의 목소리만으로도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황궁이! 황태자께서!”
순간 담사영이 두 눈을 부릅떴다.
“……황태자께서?”
“황태자께서 살수들의 암습을 받았다고 합니다!”
“……!”
“지금 바로 총수님을 호출하셨습니다!”
“나를 호출했다?”
“그, 그렇습니다!”
담사영은 이 사태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교다.’
서량의 머리에서 나온 건 아닐 것이다. 놈은 이런 일까지 주도할 만큼 여유롭진 않았을 테니까.
‘총군사 놈인가?’
하긴, 누구인들 어떠하랴. 이것이 마교의 소행이라는 것만 알면 되었지.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왜 살수들을 이용해서 황태자를 노렸을까?’
답은 바로 나왔다.
‘그렇군. 이쪽을 흔들려는 수작이군.’
하지만 단순히 이쪽을 흔들어 보겠단 생각만으로 황태자를 노렸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담사영이 물었다.
“살수의 수는? 아니, 살수들이 그냥 물러났다고 하더냐?”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포착된 살수의 숫자만 삼백입니다!”
삼백. 실로 굉장한 숫자였다.
“그, 그리고 살수들은 아직도 황궁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즉시 담사영은 깨달았다.
‘황태자를 압박하려는 것이다. 마교는 황태자의 성품을 알고 있어. 그럴 수밖에 없지. 황제를 납치했으니.’
담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거야 원, 외통수로군.’
잔인한 한 수다. 과연 마교의 총군사, 적진을 흔드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나아가 전력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살수를 동원했다는 점 자체가 놀라웠고,
무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황태자의 머리에 ‘암살자’라는 존재를 각인시킨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 할 만했다.
이건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다. 이유인즉, 당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황태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태자를 직접적으로 공략했다는 뜻은.’
담사영의 눈이 번뜩였다.
“때가 왔다는 것이로군.”
옥새다.
놈들은 이제 옥새를 쓸 생각인 게 분명했다. 그 제국의 상징성이라는 최강의 보검을 뽑아 들어 승기를 잡고, 단번에 굳히기로 들어가겠다는 뜻이리라.
“허허허.”
담사영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 담사영이, 결국 이렇게 무너지는가.”
힘없는 자의 명분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힘 있는 자에게 명분이 돌아가면, 그걸 내세우는 순간 정의가 된다.
‘설령 지금 이 상태에서 승리한다 한들, 결국 천하일통은 요원할 것이다.’
철혈성이 박살 났다면 힘으로 일통할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그조차도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담사영은 자신의 패배를 완전하게 받아들였다.
“……이거, 한숨도 나오지 않는군.”
패배의 쓴맛이 이리도 독한 것이었던가.
한숨은커녕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씁쓸하게 탁자를 내려다보던 담사영의 귓가에, 다시 한번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부터 아니야?”
“무슨 헛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반전은 이제부터 시작 아니냐고.”
담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알아듣게 말해!”
“말이 거칠어지는군. 역시 당신도 사람은 사람이라 이거지?”
스르르륵.
담사영의 눈앞에 외팔이 청년이 나타났다.
환상인지 실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담사영은 그 존재의 허실을 따져 보는 것 따위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청년이 빙긋 웃었다. 여인 같은 웃음이었다.
“기생충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 다른 생물의 몸에 기생하여 양분을 채우거나, 숙주를 뜻대로 조종하는 기묘한 벌레야.”
“그래서!”
“당신도 기생충처럼 살아왔잖아? 그 입에 욕망을 담아 적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조직을 장악하고는, 철저하게 뒤에 숨어 세력을 조종했었지.”
“……!”
“물론 마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마교주는…… 안타깝지만 지금의 당신이 상대하기 벅찰 테고. 뭐, 혈신기를 전부 받아들인다면 또 모르겠지만.”
담사영의 눈이 점점 충혈되었다.
청년, 무명이 말했다.
“과거를 떠올려 봐. 그리고 기억해 내. 패배한 이번 전쟁을, 말 그대로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 기가 막힌 한 수가 남아 있다는 걸.”
담사영은 무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한 순간, 강렬한 유혹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에 유혹을 느낀 지금의 상황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성공 가능성은?”
“내가 도와준다면 칠 할.”
“칠 할…… 칠 할이라.”
“높은 거야.”
“낮은 거다. 나는 고작 그 정도 확신으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야.”
“과거의 당신은 달랐지. 일 할의 가능성이라도 봤다면 거침없이 목숨을 걸 줄 알았어.”
“…….”
“어떻게 할까?”
담사영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렇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성공하기만 하면 적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가 막힌 한 수가 남아 있다.
“황태자에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