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화. 서글픈 축배 (1)
“멈추라고요?!”
“그렇다네.”
위홍련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갑자기?”
떨어진 명령이 회수되는 것이야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마왕령의 특작과 대호법을 위시한 신교 최상위 병력의 합공은, 적의 사천 병력 일각을 무너트리는 것은 물론 운용 시간까지도 잡아먹을 수 있다.
즉, 시작이 언제이냐가 관건일 뿐 회수될 만한 명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격 즉시 막대한 이득을 뽑아낼 수 있는 전략인데, 갑작스레 대기 명령이라니?
“정보망에 혼선을 주기 위함인가?”
위홍련의 혼잣말에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군사부 직속 비각에서 직접 떨어진 명령일세. 제법 급했는지 초지급으로 왔더군.”
“초지급으로…….”
그렇다면 진짜로 명을 회수한다는 뜻이다.
위홍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본교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때, 소연심이 입을 열었다.
“그럴 리는 없어요.”
그녀가 초지급으로 온 서신의 하단부를 가리켰다.
“여기, 뿔이 두 개인 아수라상(阿修羅像)이 그려져 있어요. 그 뜻은…….”
위홍련의 눈이 커졌다.
“전시 체제?!”
“맞아요.”
“그, 그렇다면 진짜로 본교에 이상이?!”
“그래서 더더욱 본교에는 이상이 없지요. 진짜 본교에 문제가 터졌다면, 그 즉시 철저한 귀환 명령이 떨어졌을 테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무담이 소연심에게 물었다.
“하면, 소 원주께서는 지금의 이 명령을 어떻게 해석하시는가?”
소연심이 미소를 지었다.
그간의 강행군 때문일까? 얼굴이 조금 수척해진 느낌이었다. 반면, 실로 오랜만에 마인다운 호쾌한 전투를 벌여서 그런지 눈빛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별일이네요. 대호법께서 본단의 명령에 의문을 표하시다니.”
출교 후 숱한 전투를 벌이며, 수뇌부들의 사이가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듯했다. 소위 말하는 전우애였다.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괜한 의문을 품는 것은 아닐세. 다만 위 령주 말마따나, 시기가 문제일 뿐 타격만 가하면 무조건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작전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세.”
“안타깝게도 저 역시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텐데, 본교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그 이상을 유추하기에는 정보의 양이 너무 적군요.”
“그런가.”
그때, 철무정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변했을 수도 있소.”
모두의 시선이 철무정에게 향했다.
철무정이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본교에 무슨 일이 생겨서도 아니고, 전투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닐 것이오. 그렇다면 발상을 거꾸로 해 보면 어떨까?”
“거꾸로? 그게 무슨 말인가?”
“적의 사천 병력을 타격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보는 건 어떻겠소?”
순간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위홍련이 떠듬떠듬 말했다.
“그, 그 말씀은?”
“속단할 수는 없지만, 굳이 가능성을 논해 보자면 그것 외에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잖소.”
“……!”
“위 령주 말대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이유가 하나도 없소.
그건 우리도 우리지만, 총군사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즉, 이만큼 탐스러운 먹잇감을 포기해도 될 만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
철무정의 눈이 반짝였다.
“벌써 전쟁 종료인가?”
* * *
“고생하셨습니다.”
“아닐세. 매번 하는 일인 것을.”
“술 한잔 받으십시오.”
“허허, 고생한 사람에게 차가 아니라 술이라? 자네, 제법이구먼.”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익숙한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공야치가 채워 준 잔을 강우경이 시원하게 비웠다.
“어떻습니까?”
“좋은 술이군. 분주인가?”
“그렇습니다.”
“문주가 되더니 꽤 좋은 술을 자시는군.”
공야치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네들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무색사의 정보력도 상당하다네.
특히나 사파 뒷골목 쪽은 자네들 다음으로 꽉 쥐고 있지. 하오문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그 정도 정보도 몰라서야 어디 살수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오문의 문주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대외비였다. 말이 대외비지, 어지간한 정보력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새삼 무색사의 정보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 수 있었다.
“축하하네. 내 잔도 받으시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잔을 나누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강우경의 말에 공야치가 곧장 대답했다.
“황군 총수의 패배 선언 말입니까?”
“그렇다네.”
황군 총수 담사영.
전(前) 의천맹주이자 무림 최강의 고수로 손꼽히는 중원삼제(中原三帝)의 일인.
그 대척점에 염라마제, 아니 이번에 철혈성에서 보여 준 무적의 무공으로 염라마신(閻羅魔神)이라 불리게 된 서량이 있었다.
그러나 세세하게 따져 보자면, 이번 전쟁이 시작된 원인은 전적으로 담사영에게 있었다.
그는 건드리지 않아도 될 곳을 건드렸고, 끊임없이 여론을 조작하여 천마신교를 밀어붙였다.
만일 소교 시절의 서량이 세상에 나와 천마신교의 인식을 바꿔 놓지 않았다면, 천마신교의 움직임은 지금보다 훨씬 제한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담사영은 먼저 싸움을 걸었고, 한 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
심지어 중원 무림의 기반이었던 의천맹이 단 한 명의 절대마신의 손에 와해가 되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때도 담사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음에도, 공백이 된 북부에 자리를 잡곤 끝까지 천하일통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담사영이, 드디어 패배를 선언했다.
아직 전쟁의 끝을 보기 전인데도 스스로 백기를 흔든 것이다.
“영 찝찝하더군.”
“그렇습니까?”
강우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살수 노릇을 하다 보면 말일세, 여느 무인들이 갖지 못한 날카로운 육감이라는 걸 손에 넣게 된다네.
물론 그 육감은 상대를 죽이고자 할 때 발휘되는 게 보통이지만.”
“하지만 노선배님께서는 전대 교주님과 거래까지 하신 분입니다. 여느 암살자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시죠.”
“칭찬 고맙군.”
“해서, 그 육감이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모른다네.”
“예?”
“모르기 때문에 더 찝찝해.”
강우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야 모든 게 끝났다는 듯한 안도감과, 이게 끝이 아닐 것임을 확신하는 답답함이 섞인 한숨이었다.
“담사영의 패배 선언은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짓이었네. 그건 정보를 다루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그렇습니다. 패배 선언이라는 것은 절대로 작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을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기실 그런 걸 고려하지 않아도, 그간 알아본 담사영의 성격상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런 짓은 못 할 게야. 패배 선언이라니? 차라리 죽고 말지.”
“그래서 더더욱 찝찝하다고 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네. 패배 선언을 할 사람이 아니라서 찝찝하고, 패배 선언으로 무언가를 획책하기에는 잃을 것이 지나치게 많아서 또 찝찝하다네.”
“어떤 식이든 상식을 벗어난 셈이로군요.”
“내 말이 그 말일세.”
강우경이 은근히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담사영의 이 패배 선언 말일세.”
공야치가 턱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의외이긴 합니다.”
“물론 그렇겠지.”
“노선배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과거 저는 담사영과 함께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강우경이 입맛을 다셨다.
“굳이 그리 말할 필요 없네. 하오문을 구하기 위해, 나아가 천마신교와의 공동 노선을 위해 일부러 놈과 손을 잡은 것 아니었나.”
“하하, 무슨 이유에서든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운 일이었지요.”
“여하간, 그래서?”
“그때 제 눈에 비친 담사영에 대한 평가는 딱 이랬습니다.”
공야치가 한 마디, 한 마디 딱딱 끊어 말했다.
“제법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아온, 나름의 인생 굴곡은 있는 어린애.”
상당히 신랄한 표현이었다.
강우경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 예상 밖의 표현이 우스웠던 것이다.
공야치가 따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의외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담사영이 그간 어떻게 의천맹을 장악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평가임에도, 저는 딱 그런 느낌을 받았지요.”
“즉, 자존심이 강하다?”
“강해도 보통 강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의 자존심은 상대를 가리지요.”
“상대를 가린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자가?”
“그렇습니다.”
공야치가 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 무척이나 심각한 사안을 두고 얘기하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묘한 여유가 묻어났다.
강우경은 그런 공야치를 보며, 이놈도 보통 천재는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잠시 후, 공야치의 입이 열렸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담사영의 자존심은 오로지 천마신교를 상대할 때만 바짝 날이 서 있었습니다.”
강우경의 눈이 반짝였다.
“천마신교만 짓눌러 버린다면,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이 컸겠지요.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이성적인 이유 외에, 천마신교라는 단체 자체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느껴졌어요.”
“신교에 대한 증오와 혐오라?”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서량이 세상에 나와 천마신교에 대한 악소문을 걷어 내기 전까지 세인들의 인식이 딱 그랬으니까.
“저는 세인들이 품고 있는, 직접 겪은게 아니라 그저 학습되었을 뿐인 맹목적인 혐오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면?”
공야치의 눈이 깊어졌다.
“더 원초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부러움과 아련함마저 섞여 있는 복합적인 무언가.”
“……!”
“애써 말로 표현하려니 좀 난해하군요. 하지만 제가 받은 느낌이 딱 이랬습니다. 담사영은 애초에 천마신교라는 단체 자체를 남들과는 다른 심정으로 보고 있었어요.”
“으음.”
공야치가 표정을 풀곤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래서 더 의외입니다. 이번 담사영의 패배 선언 말입니다.”
“게다가 담사영 그 사람, 서 교주를 특히 더 의식하는 듯했네만.”
“그렇습니다.”
강우경이 머리를 긁적였다.
“참으로 골치 아픈 작자로다. 정작 패배를 선언했음에도 자꾸만 사람을 찝찝하게 만드니.”
“그만큼 담사영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인식되었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부정할 수 없는 말이로군.”
공야치가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든, 무슨 심경으로 패배를 선언했든 오늘만큼은 기쁨에 젖어도 될 것 같습니다.
설령 그가 이전보다 더한 재앙을 안고 찾아온다 한들, 적어도 하루 정도는 기뻐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강우경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자네 말도 맞네. 어쨌건 그를 그렇게나 몰아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니까.”
“황태자 건은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절묘한 공방이었어요.”
“늙은이 얼굴에 금칠하지 말게나. 나는 그저 신교의 총군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어찌 되었든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 사람이 연신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었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 가지, 이것만큼은 정말 궁금하더구먼.”
“어떤 부분 말씀이십니까?”
“전쟁이 끝난 지금, 그 패배를 선언한 황군의 총수는 어디에 있는가?”
공야치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