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서글픈 축배 (2)
“거긴 괜찮은가?”
“예, 예!”
“그러고 보니 자네, 아직 허리가 다 안 나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이쿠! 그거야 한나절만 쉬면 됩니다! 성의 무사님들께서 이리 발 벗고 나서 주시는데, 저희라고 가만히 있어서야 쓰겠습니까.”
“그리 말하면 되레 우리가 더 미안하다네. 이번 일은 철저하게 무림의 일이었어. 적도들 때문에 자네들까지 크게 피해를 봤으니, 응당 우리가 미안해할 일이지.”
“아닙니다! 절대 그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누구 덕분에 지금껏 편히 살았는데요. 다들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습니다요.”
“허허허, 무안하구먼. 어찌 되었든 쉬엄쉬엄하세나. 급하게 움직인다고 금방 처리될 일도 아니니.”
“예!”
송금백은 웃으며 양민들을 다독였다.
철혈성 전투가 끝난 이후, 송금백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의 복구에 힘을 쏟았다.
내성과 외성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양민은 물론 무인들의 상태도 꼼꼼히 살폈다.
심지어 숙식 역시 그들과 함께했는데, 사파의 제왕이란 사람이 길바닥에서 양민들과 함께 먹고 자는 모습까지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양민들은 그런 송금백의 행동에 감격을 금치 못했다.
윗사람의 과도한 친절은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송금백은 달랐다. 그는 양민들을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똑같은 위치, 똑같은 사람으로서 그들의 감정에 깊이 공감해 주었다.
그 이전에 그들을 대하는 송금백의 자세 자체가 겸허했다. 그는 양민들이 입은 피해가 진심으로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진심은 절절하게 전달되었다.
과거의 송금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깨달음을 얻으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간 반면교사를 수도 없이 많이 봐 왔기 때문일까.
그는 사파(邪派)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군주가 되어 가고 있었다.
“후, 이 정도면 충분한가.”
휘하 무사 다섯과 함께 무너진 전각들을 보수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새로 세우겠지만, 새로 만들기에는 다소 애매하게 무너져 있었다. 결국 기술자를 불러 보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 전각들이 무려 이십여 개나 되었다. 절반을 보수했으니, 이제 절반만 더 해치우면 송금백의 노동도 얼추 마무리되리라.
“성주님.”
“음?”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예.”
혈위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마교, 아니 신교 측 총군사입니다.”
송금백의 눈이 깊어졌다.
* * *
“허어, 그렇게 안타까울 때가.”
“정말이지 오싹했더랬지요.”
“해서, 지금은 괜찮아졌답니까?”
“하하! 거기까지는 알려 드리기 힘듭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본성의 후계자분 아닙니까.”
“쩝, 역시 철두철미하십니다.”
“하마터면 호 군사님의 언변에 홀라당 넘어가서 이것저것 다 불어 버릴 뻔했습니다그려.”
“하하하! 언변이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그저 황 군사님과의 대화가 워낙 재미있어, 저도 모르게 신이 난 모양입니다.”
“영광이로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황곤이 말했다.
“그나저나, 세상일이라는 게 참으로 모를 일이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철혈성의 총군사와 신교의 총군사가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하하.”
“두 세력 중 하나가 망하거나, 혹은 천하일통이 코앞인 상황이 아닌 바에야 절대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요.”
호요성이 씨익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황 군사님 말씀대로 세상일이라는 게 참 알 수가 없어요.”
한 모금의 차로 목을 축인 호요성이 말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성주님께서는 무척 바쁘신 모양입니다?”
“헛, 이 사람과의 대화가 이제 재미없어지셨습니까?”
“어이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호요성의 당황 가득한 얼굴에 황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 다소 지루하시더라도 이 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나 좀 더 하십시다.”
“하핫, 그 또한 좋지요.”
천마신교의 총군사라면 무림 최고 귀빈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황곤은 미안하다, 대신 사과하겠다, 등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 자체가 송금백의 위상을 깎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요성은, 그런 황곤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이라고 황곤과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이왕 성주님 말씀이 나와서 말인데, 참으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어떤 부분에서요?”
“설령 보여 주기식일지라도 아랫사람과 함께 노동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물며 숙식까지 함께하신다니요.”
“하하.”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과연 철혈성 정도 되는 조직의 수장이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릇이 다르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호요성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굳이 상대를 띄워 줄 이유가 없다. 황곤 역시 그걸 알기에 호요성의 말을 사심 없이 받았다.
“인간적인 매력이 출중하신 분입니다. 오죽하면 저 같은 놈까지 성주님의 휘하에 들어왔겠습니까.”
“헛? 황 군사께서 왜요?”
“욕심 많고 이기적인 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망나니였지요. 만일 성주님께서 거둬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름 모를 무뢰배의 손에 객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또한 빈말이 아니었다.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성주님께서는 참 인복이 많으신 분 같습니다.”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두 사람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호요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셨군요.”
“그렇군요.”
황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동시에 문이 열리고, 웃통을 벗은 송금백이 들어왔다.
호요성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철혈성의 주인을 뵙습니다. 천마신교의 총군사 호요성이라 합니다.”
“음.”
날카로운 눈으로 호요성을 보던 송금백이 이내 미소를 띠었다.
“반갑네, 호 군사.”
“감사합니다.”
“일이 바빠서 시간을 지체했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문사 나부랭이를 만나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요.”
황곤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었다.
송금백이 입맛을 다셨다.
“자네가 문사 나부랭이면, 세상에 글 좀 읽는다는 놈들은 다 머리 박고 죽어야겠구먼.”
“하하.”
“자, 앉으시게.”
“예.”
그렇게 두 사람이 마주하고 앉았다. 황곤은 자연스럽게 송금백의 뒤에 시립했다.
호요성이 웃으며 물었다.
“방금까지 일을 하다 오신 겁니까?”
송금백이 허연 천으로 땀에 젖은 상체를 닦았다.
“근래 또 새로운 무리(武理)를 깨달아서 말이네. 머리도 복잡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일에 힘을 쏟다 보면 집착에서 멀어지는 기분인지라.”
“굉장하십니다. 그런 걸 제게 말씀해 주셔도 되는 겁니까?”
“무엇을? 무리를 깨달은 것 말인가?”
“그렇습니다.”
송금백이 피식 웃었다.
“내가 깨달은 무리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당대 천하제일인의 발치에라도 이를 수 있을까 싶네.”
호요성의 눈이 반짝였다.
담담하고 여유가 넘치는 패배 인정이었다. 송금백은 자신의 수준으로는 서량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에선 어떠한 패배감도,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단한 사람이야.’
수라제 송금백.
그간 담사영과 함께하며 이런저런 과오를 많이 저지른 반쪽짜리 거인이다.
그중 몇몇은 치명적인 실수로 직결된 터라, 대처가 조금만 늦었어도 철혈성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 아찔한 실수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본 절대고수.
‘이제야 진정 대종사로서의 면모가 보이는군.’
새삼 황곤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송금백은 큰 사람이다. 아마 이천상보다 송금백을 먼저 만났다면, 그의 능력 이전에 인간적인 매력에 혹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귀하신 신교의 총군사께서 기별도 없이 어인 일로 찾아오셨는가?”
“강서상회를 좀 만져 보다가, 이제야 때가 된 듯하여 직접 찾아왔었습니다.
물론 연락부터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근래 생각이 많아서 크게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죄를 받자고 한 말은 아니었네.”
송금백의 눈이 번뜩였다.
“혹시 옥새 문제 때문인가?”
호요성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송금백이 엄지로 황곤을 가리켰다.
“본성의 총군사 역시 머리가 상당히 좋다네. 근시일 내에 신교 측에서 옥새 문제로 접근할 거라 하더군.”
“대단하십니다.”
호요성의 감탄에도 황곤은 담담한 표정을 고수했다. 입도 열지 않았다. 성주님의 대화에 섣불리 끼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이리라.
호요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옥새 문제로 왔습니다.”
“설명하게.”
“아시다시피 저희에게는 황제와 옥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이면, 제국을 등에 업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요.”
송금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라를 세운다?”
“그렇습니다.”
“기존의 황궁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 나라를 건국하겠다는 뜻인가?”
티는 내지 않았지만, 호요성은 또 한 번 감탄했다.
부러 설명한 게 아니고서야 그 차이를 잡아낼 사람은 많지 않다. 황곤만큼은 아니지만, 송금백 역시 일파의 종주로서 차고 넘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위험한 생각이로군.”
“본래 옥새를 그런 용도로 쓰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옥새의 쓰임새는 이번 전쟁의 명분을 제시하는 걸로 끝이었지요.”
“한데?”
“일차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교주님의 마음이 크게 흔들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주님께서는 진실로 분노하셨지요. 그것은 성주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당연히 송금백도 알고 있었다.
철혈성의 전투가 한창일 때, 하늘 전체를 뒤덮을 듯 엄청난 마기를 발산하며 나타난 서량.
그리고 서량은, 단 한 수로 철혈성의 전투를 종결지어 버렸다.
그야말로 신(神)의 무공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그때 서량이 선보인 힘은 이미 무공의 범주를 초월한 것이었다.
심검(心劍).
마음으로 검을 다루는 지고(至高)의 경지다. 서량은 그 심검의 경지를 이용해 천재지변에 가까운 힘으로 철혈성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물론, 그 절대의 일격을 퍼붓고는 반쯤 빈사 상태에 빠져 버렸지만.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전쟁의 명분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위화감부터 줄여야 한다고.”
“위화감?”
“교주님께서는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진정한 천마(天魔)가 되셨습니다. 즉, 교주님의 살의(殺意)가 향하는 곳은 지상에서 사라진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송금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철혈성 전체를 아우르는 절대무공,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재앙 같은 힘을 다루는 자를 상대로 그 누가 저항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문제입니다. 교주님께서는 너무나 강해지셨어요. 그리고 그 강함을, 무수히 많은 사람 앞에서 드러낸 것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위화감이라.”
“그렇습니다.”
호요성의 눈이 깊어졌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기존의 황궁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한다 한들, 정상적인 운용은 불가능할 겁니다.”
“찬탈이 되어 버리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이제 무림에서 서량의 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 그가 황궁을 등에 업고 무림을 장악한다?
그것은 과연 제국인가, 아니면 신교의 세상인가.
“저희는 지금껏 양민들이 느끼는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무진 애를 써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황곤이 입을 열었다.
“명분에 그리 집착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황곤을 보았다.
“현재 천마신교는 최강의 문파요, 조직입니다. 황궁을 점거해 세력을 확장하든 새 나라를 건국하든,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을 텐데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인즉, 어떤 명분으로 천하를 일통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명운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조금 전, 일차 전쟁 막바지라고 하셨지요?”
황곤의 얼굴이 어느새 굳어졌다.
“설마하니 이차 전쟁도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
“그리고 그 전쟁은, 지금까지처럼 요란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테지요.”
호요성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설마, 두 분께서는 담사영이 진정 물러난 거라 생각하고 계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