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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579화 (578/774)

579화. 서글픈 축배 (4)

부우우웅!

자흑색 거대한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화려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칼질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칼질에는 적의 회피를 막고 방어를 깨부수는 진결이 가득하였다.

도(道)에 이른 도(刀)였다.

후웅.

자연스럽고도 부드럽다.

양손으로 도병을 쥐고 회전시키는데, 사방의 공기가 그에 맞춰 춤을 추는 듯했다.

한참이나 대도를 돌리고, 서서히 왼손에 힘을 풀었다. 자연스레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번쩍!

한없이 부드럽기만 하던 도무(刀舞)가 일순 벼락처럼 사나워졌다.

허공에 빛의 잔영을 남긴 일도(一刀)였다. 한없이 자유롭고 여유로웠던 칼질이 난폭하고 직선적인 무공으로 변모했다.

번쩍! 번쩍! 번쩍!

칼이 허공을 벨 때마다 시퍼런 벼락이 찰나의 그림을 그려 낸다.

동작의 이음새는 부드럽고, 공격의 순간은 벼락처럼 빠르다.

나아가는 발걸음은 산뜻하면서도 뜨거워 불꽃을 보는 듯했고, 움직임에 따라 휘날리는 장포 자락은 바람의 신(神)이 깃들기라도 한 듯 선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파바박!

물처럼 도도한 흐름을 잃지 않던 몸놀림이, 일순간 뚝뚝 끊겼다.

번쩍! 번쩍!

칼질 한 번에 바위가 동강 나고, 칼질 두 번에 수목이 우수수 쓰러졌다.

위력적인 도법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무리가 담긴 도법이었다.

초식의 투로를 따르지 않고 있음에도 천하제일의 절공(絶功)처럼 보인다. 그저 기분에 따라 휘두르는 칼질이 이미 하나의 무공으로 화(化)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경지다.

이제는 약해지고 싶어도 약해질 수가 없는 경지였다.

극에 이른 의념을 천하에 비할 데 없는 기(氣)에 담아 선사하는 무적(無敵)의 무도(武道)를 선보이지 않는 이상,

이제 그 어떤 요인도 칼의 주인을 약하게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강하게 만들 뿐이다.

끝없이 강해지게, 끝없이 발전할 수 있도록.

그러나 품고 있는 욕망의 끝을 보았기에, 결국 이 이상 강해지기는 어려운.

그런 모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무신(武神)은 오늘도 반나절이 넘는 칼춤 끝에야 흘러넘치는 감정을 수습했다.

우우우우웅.

꽉 쥐고 있던 도병을 놓았음에도 천마도(天魔刀)는 요요로운 빛을 발하며 허공에 떠 있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군.”

우우웅! 우우웅!

천마도가 저 혼자서 울음을 토해 냈다.

마치 앙탈을 부리는 듯했다. 이대로는 아쉽지 않냐며,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니 더 강하고 화려하게 휘둘러 보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오늘은 안 된다, 이놈아.”

스르릉.

정자 옆에 놓아 둔 길쭉한 보검이 천천히 떠오르더니, 서량의 앞으로 날아왔다.

마검 중의 마검이다. 당대는 물론 고금을 뒤져도 이보다 더 화려하고 막강한 마력을 지닌 마검이 또 있을까 싶었다.

스승은 이 검을 마황보검이라 불렀다.

뽑아 든 적은 많지 않았지만, 언제나 요대에 매고 다니며 전대(前代)의 폭정을 상기하였다.

그러나 검이란 게 꼭 쥐고 휘두른다 하여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의식하고 또 의식하는 새에.

질 좋은 강철로 제작된 것도 아닌, 그저 화려하기만 할 뿐인 이 보검은 선천마기로 새로이 제련되어 극강의 마력을 담은 그릇이 되었다.

마검(魔劍), 그리고 마도(魔刀).

전대의 의지와 당대의 의지가 하나로 귀결된다.

서량이 마황보검의 검병을 쥐었다.

스르륵.

손에 감기는 감촉이 영 뻑뻑했다.

어쩔 수 없었다. 능히 고금제일마검이라 불릴 만하나, 애초에 의장용으로 만들어졌으니 빈말로도 쥐고 휘두를 만한 병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천상은, 바로 이 검 한 자루로 정파 무림 연맹의 본거지를 날려 버렸다.

‘하긴, 검 없이도 가능했겠지만.’

한참이나 마황보검을 바라보던 서량은 문득 검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훤칠하게 생긴 얼굴. 그러나 두 눈은 왠지 모르게 지쳐 보이는 듯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검신에 비친 서량도 웃었다.

“마도가 나 자신이라면, 마검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 이거냐?”

서량이 검을 놓았다.

우우웅. 탁!

마황보검이 알아서 날아가며 검집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들어와.”

“……예.”

문이 열리고 무담이 들어섰다.

“군림성교, 천마…….”

“그만.”

“…….”

“오늘은 그 간지러운 신마경어를 참고 들어 줄 만한 기분이 아니야.”

“송구하옵니다.”

“송구할 것까진 없고.”

서량이 웃으며 정자 기둥을 두들겼다.

“자네가 바로 날 찾아올 것 같았지. 그럴까 봐 미리 술상도 봐 뒀는데, 한잔할 텐가?”

“영광이옵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조촐한 술상을 마주하고 정자에 앉았다.

서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예?”

“뭘 또 그렇게 무릎까지 꿇고 있어? 편하게 앉아.”

“아, 예.”

평소라면 그럴 수 없다며, 송구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담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뵙는 교주님은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해 보이셨다.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신하 된 자의 소임이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더욱 교주님의 심기를 상케 하지 않겠다고 무담은 다짐했다.

“고생했네. 간만에 바깥바람 쐬느라고 삭신이 쑤시진 않던가?”

“목숨을 내놓고 나선 길입니다. 언감생심 어찌 피로를 느끼겠습니까.”

서량이 피식 웃었다.

“자네는 여전하구만.”

“송구하옵니다.”

“사람 참. 일단 한 잔 받게나.”

“예.”

육천심주가 서서히 잔을 채웠다.

무담의 잔을 채워 주며, 서량이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사실 곧장 철수시켜도 상관은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신, 죽을 때까지 야전을 전전해도 행복할 것이옵니다.”

“얼씨구. 오늘따라 혓바닥에 기름기가 좔좔 도는구만?”

“송구하옵니다.”

“자, 나도 한 잔 따라 주시고.”

“예.”

서량이 가득 찬 잔을 들었다.

찌잉.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이 시원하게 술을 비웠다.

“크으, 좋네.”

“근래에는 약주를 즐기지 않으십니까?”

“오늘 자네가 올 줄 알고 꾹꾹 참고 있었지. 술도 좋은 사람과 마셔야 맛이 사는 법이니까.”

“영광이옵니다.”

서량은 또다시 무담의 잔을 채웠다.

무담 역시 서량의 잔에 술을 따랐다.

다시 한번 잔이 비워지고, 또 잔이 가득 찼다.

“이보게, 대호법.”

“예, 교주님.”

“나는 괜찮네.”

“…….”

“괜찮으니까 그리 안절부절못할 것 없어.”

서량이 피식 웃었다.

“간 사람은 간 것이지. 언제까지 고인이 된 사람 환영이나 붙잡고 슬픔에 젖어 있을 순 없잖은가?”

“…….”

“사부님께서 돌아가실 때도 그랬지. 참으로 슬펐지만, 또한 그분은 당신께서 원하신 죽음을 맞이하신 거야.”

“……그러셨지요.”

“내 마음대로 사는 것과 내 마음대로 죽는 것은 결국 같은 거야.

이유인즉, 생(生)과 사(死)는 하나이기 때문이지. 당신께서는 당신이 죽을 자리를 직접 정하셨고, 결국 만족하고 가셨어.”

“…….”

“오히려 잘 살다 가셨다며 축하를 해 드려야 마땅할 테지.”

“그 말씀 또한 옳습니다.”

무담은 대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고루마존은 아니었지요.”

잔을 쥔 서량의 손이 움찔했다.

그도 잠시.

“그랬지.”

“…….”

“총군사가 그러더군. 제 잘못이라고. 죽어도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분이었다며, 최대한 화려한 길을 깔아 줬어야 했다며 난장을 치더라, 이 말일세.”

“총군사답군요.”

“그래.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게 그 사람 일이거든.”

“맞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이었나?”

서량의 눈이 조금씩 충혈되었다.

“죽지 않게 하는 거야.”

“…….”

“고루마존은 내 사람이었네. 그리고 그를 죽지 않게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어. 하지만 나는 그걸 못 했네.”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교주님께서는 고루마존의 뜻을 잊지 않아 주시면 됩니다.”

“……!”

“불경하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미리 용서를 구합니다.”

“해 봐.”

“교주님께서 지금보다 더 강해지셔도, 아니 전대 교주님께서 살아 돌아오신다 해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본교의 모든 마인을 죽지 않게 할 수도 없습니다.”

“…….”

“그것은 신(神)의 절대적 한계입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몰라.”

“신은 그저 존재하며, 보고 듣고 품어 주는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서량이 차갑게 웃었다.

“그거 재미있군. 내가 봤을 땐 그런 것도 다 개소리에 불과해. 교주는 이래야 한다, 신은 이런 존재다.

상황에 따라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하게 만드는 몹쓸 변명거리지.”

“그것도 신의 마음입니다.”

“…….”

“신의 존재 이유를 빌어 인정하고 싶으시면, 그리하시면 됩니다. 신의 존재 이유를 빌어 도망치고 싶으시다면, 그 또한 그리하시면 됩니다.”

“…….”

“그럼에도 저희는 교주님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교주님께서 가시는 길이 어디든, 소신들의 충심과 신심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서량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자네들은 너무 외골수야.”

“외골수지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주셔야 합니다.”

“……?”

“외골수여도, 손가락질을 당해도,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평생을 지옥에 처박혀 꿈틀거리게 된대도 괜찮습니다. 교주님께 영육(靈肉)을 바쳤기 때문이지요.”

“……!”

“대상 없는 믿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믿음의 대상을 찾았습니다.”

무담이 홀로 잔을 비웠다.

“감히 짐작건대, 고루마존은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떠한 한(恨)도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웃으며 갔겠지요.”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

“저뿐만이 아니라, 그날 취임식에서 고개를 조아렸던 모든 마인이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서량이 고개를 숙였다.

물결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의 표정을 숨겨 주었다.

“고루마존은 처음으로 날 인정해 준 마존이었어.”

“알고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적으로 날 대해 준 마인은 그가 처음이었다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 경지에 오르고, 사람으로서의 감정이 일부분 마모되었다고 느꼈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

“그의 죽음이 이렇게나 큰 고통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네.”

무담이 미소를 지었다.

안쓰러움과 믿음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소였다.

“저희가 진정 하늘에 있는 신(神)을 모셨다면 교주라는 존재는 필요치 않았겠지요.”

“…….”

“교주는 사람으로 태어나 신이라 불리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모르시겠다면……, 그냥 모른 채 존재하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

“고루마존은 지금도 기뻐할 겁니다. 충신의 죽음에 슬퍼하는 신이 있으니, 얼마나 벅찰지 상상도 가질 않습니다.”

“…….”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대호법.”

“예, 교주님.”

“고맙네.”

무담이 희미하게 웃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교주님께서는 저희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고 계셨군요.”

그렇게 두 사람은 계속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의 술자리는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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