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화. 서글픈 축배 (5)
“헛! 교주님!”
“오랜만에 보네.”
웃으며 다가오는 서량.
얼굴은 다소 초췌해 보였지만, 표정에선 여유가 묻어났다. 휘하 마인들의 죽음이 불러온 심마(心魔)에서 자연스레 벗어났기 때문이리라.
소연심이 고개를 숙였다.
“미리 기별을 하셨더라면 술이라도 한 상 차려 놓았을 것을요.”
“기별 없이 왔다고 욕하는 거야?”
“헉! 그럴 리가요!”
서량이 시원하게 웃었다.
“역시 원주는 여전하구먼. 그 발칙한 신마경어를 읊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어.”
소연심이 미소를 지었다.
“교주님께서 그걸 원하실 것 같아서요.”
“껄껄.”
“설마, 예를 표하지 않았다고 속으로 욕하시는 거 아니죠?”
“그런 걸로 욕하기에는 그간 오그라든 내 손발이 수백 개는 될 걸세.”
“호호.”
“술은 됐고, 차나 한잔 얻어 마실 수 있겠나?”
“물론이에요.”
잠시 후, 두 사람이 환희원 후원 정자에 마주 앉았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표정이 아주 보기 좋구먼.”
“교주님께서 보시기에도 그런가요?”
“응, 이제야 좀 편안해 보여. 예전에는 건드리면 가시를 바짝 세울 것 같더니만, 지금은 여유가 있군.”
“다 교주님 덕분이에요.”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게 왜 내 덕인가. 말이야 자네들 한풀이 시켜 주겠다고 했다만, 그 또한 결국 나를 위한 소집이었어.
자네들이 제대로 날뛰어 주지 않았다면 나도 골치가 아팠을 테니까.”
소연심이 고개를 저었다.
“전사(戰士)가 죽을 곳은 전장이에요. 다만 전사로 키워져 죽을 곳을 정하지 못할 운명이라면, 인생에 한 번이라도 화려하게 불태울 수 있기를 원하죠.”
“그래?”
“네. 그리고 교주님께서는 물에 젖어 버린 장작들을 모아서 불을 붙여 주셨지요. 아마 대호법을 위시한 수뇌부 전원이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꼈을 거예요.”
“해방감이라.”
소연심이 빙긋 웃었다.
“나아가, 그것이 교주님을 위한 일이라니 명분으로는 그만이죠?”
“하하!”
확실히 소연심에겐 다른 수뇌부와는 다른 독특한 면이 있다.
실제 천하진의 인생까지 따지자면, 소연심은 서량보다 한참이나 어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서량은 느낀다.
소연심은 마치 손위 누이 같은 존재였다. 뭣도 모르던 시절, 거래랍시고 들이닥친 자신을 내치지도 않았고, 이런저런 도움도 많이 주었다.
어떻게 보면 소연심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호법이나 호천마황단보다도 더 열렬히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되겠나?”
“네?”
“살풀이 말이야. 그 정도로 만족하겠어?”
소연심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아무리 맛난 음식이라도, 과식하게 되면 탈이 나거나 꼴도 보기 싫어지기 마련이지요. 배를 채운 듯 안 채운 듯 먹어야 음식 귀한 줄도 알 테고요.”
“뭐, 그건 그렇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저는 충분다고 생각합니다.”
“어지간히 미쳐 날뛰었나 보구먼.”
“대호법이 저더러 희대의 마녀(魔女)가 따로 없다고 하더군요.”
“그건 좀 실례 아닌가?”
“그러게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만큼 화려하게 날뛰었다는 뜻이겠지요.”
서량은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문제는, 마인의 호승심과 음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겠지.”
“다르지요. 하지만 저는…….”
“마(魔)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호승심은 본능과도 같은 거야. 마치 죽을 걸 알고도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의 맹목적인 돌진과도 같지.”
“…….”
“그 뼈에 새겨진 본능을, 원초적인 투쟁심을 완전히 불살라 버릴 만큼은 날뛰어 줘야 나중에 한(恨)이 남을 일도 없지 않겠나.”
소연심의 눈이 반짝였다.
“그 말씀은?”
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은 몰라. 하지만 알잖나? 평화의 시대라고 분란이 없는 것은 아니야. 난세라면 말할 것도 없지.”
“…….”
“이대로 은퇴하기엔 조금 이르지 싶네. 그 주먹, 아직 내려놓을 때가 아닌 것 같으이.”
물끄러미 서량을 보던 소연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교주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담사영 말이로군.”
“……네.”
소연심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다소 주제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자, 이렇게 포기할 만한 자가 아니잖습니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네. 전대 교주님의 절대적인 힘 앞에서도 잠시 물러났을 뿐,
언제 그랬냐는 듯 세력을 형성하여 다시 천하를 도모하려 한 인간이에요. 제아무리 밀리고 있다 한들, 이런 식으로 포기할 위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간의 양상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 놈도 내가 이 정도로 강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전력의 열세를 뒤엎을 비장의 수까지 모조리 실패해 버렸으니까.”
“송구한 말이지만…… 전대 교주님의 힘은 절대적이었지요.
애초에 전략 전술을 세우긴커녕 도주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는 기어이 살아남아 또다시 힘을 모았습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자네는 태풍과 해일 앞에서도 분하다며 이를 갈겠는가?”
“……!”
“놈에게 사부님은 그런 존재였네. 그래서 겁을 집어먹었지만, 동시에 패배감은 흐릿할 수밖에 없어. 당연하지. 사부님은 인외(人外)의 존재였으니까.”
“교주님께서는…….”
“나는 아니지. 놈에게 나는 반드시 짓눌러 버려야 할, 당연히 정복할 수 있는 산봉우리에 불과해.”
소연심의 두 눈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놈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말이야. 현실은 다르지.”
“아주 다르지요. 교주님께서는 선대(先代)의 어떤 천마와 비교해도 능히 손에 꼽히는 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과 비교해 봤자 아무 의미 없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놈도 슬슬 현실을 깨달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야.”
“현실…… 이요?”
“그래, 현실. 놈은 누구보다 고고한 자존심을 지닌 만큼이나 현실을 보는 눈 역시 무척이나 뛰어나.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무수히 많은 위정자와는 또 다르다는 말이지.”
“하면 지금까지는 실패했군요. 그 자존심 하나로 인해 가진 병력의 상당수를 날려 먹었으니까요.”
“그런 셈이지. 하지만 더는 그러지 않겠지.”
“그렇다면?”
서량은 가타부타 대답지 않고 차만 홀짝였다.
재차 입을 열려던 소연심은 문득 서량의 두 눈을 보았다.
맑고 고요했다. 이룬 경지가 경지이다 보니 그거야 당연했지만, 그녀는 서량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서 넘치는 여유와 확고한 부동심을 느꼈다.
소연심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길게 했지요?”
“영양가 있는 얘기만 하는 사람은 매력 없지. 괜찮네.”
“호호.”
미소 짓는 소연심에게 마주 웃어 주는 서량의 표정은 담백했다.
그 모습을 보며, 소연심은 또 한 번 확신했다.
‘자신이 있으시구나.’
담사영이 정말로 패배 선언을 했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아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힘을 들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래도 교주님께서는 당황하지 않으실 것이다. 흔들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저 자신 있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서 상대를 짓눌러 버릴 뿐.
소연심이 새삼 탄식했다.
“아쉬워요.”
“뭐가?”
“그간 제가 엄청 바빴잖아요. 그래서 교주님께 육천심주 한 병도 못 받아 봤네요.”
“이 사람아, 육천심주 그거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냐.”
“제가 아무나는 아니잖아요.”
“하하! 뭐, 그거야 그렇지.”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연심 역시 서량을 따라 일어났다.
“어쨌든 간만에 얼굴 보니 좋구만. 당분간은 별일 없을 테니, 심심하면 궁에 한번 들르게. 술이나 양껏 마시자고.”
“저야 영광이지요. 아! 그리고 교주님.”
“음?”
소연심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칠공녀 말인데요.”
“칠공녀? 여민이 말하는 건가?”
“네.”
“여민이가 왜?”
“저희가 출교한 이후, 한 번도 환희원에 찾아오질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바쁜 일이 있었나 보지.”
“혹시나 해서 주화가 거처에 들러 봤는데도 수련이 바빠서 만날 수 없다는 얘기만 듣고 돌아왔다고 하네요.”
“그래?”
“네. 물론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칠공녀 성격 아시잖아요? 제아무리 수련을 독하게 한다고 해도 찾아온 이를 문전박대는 하지 않을 분인데.”
서량의 눈이 빛났다.
“그랬단 말이지?”
* * *
“헉헉!”
온몸이 피와 땀으로 젖었다.
발산하는 마기는 불안정했고, 호흡은 지나치게 격했다. 마치 폐에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듯 내뱉는 숨에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허억! 허억! 익!”
투우웅!
정직한 일 보(一步)와 함께 장(掌)을 내쳤지만, 장심에서 나오는 진기는 발경의 묘리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울컥!
한 차례 피를 토한 채여민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당장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하지만 채여민은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이이익!”
후들거리는 다리를 어떻게든 세우려 했지만, 더 이상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력으로 해결될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더 움직였다간 생명이 위험할 지경이었다.
털썩!
기어이 채여민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련의 종료다. 끝났지만, 그녀는 절대로 눕거나 마음을 놓지 않았다.
끝까지 정신을 붙들고, 그 자리에서 오늘 했던 수련의 부족했던 점을 하나하나 되짚는다.
‘충보(衝步)와 당수(撞手)가 지나치게 빨랐어. 마음이 급하다는 증거야. 적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제압하는 수법도 중요하다고 그랬어.’
곰곰이 생각에 빠진 채여민.
그런 그녀를 보는 소당은 안절부절못했다.
‘저러다 정말 일 치르시겠어.’
그렇다고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채여민이 처음 저런 수련을 감행했을 때, 소당은 눈에 불을 켜고 막으려 들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채여민이 다짐한 수련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몸이 충분히 단련된 성인도 버티기 힘든 것이며, 오히려 채여민의 연배를 생각하면 악영향을 줄 수도 있는 수련이었다.
그러나.
‘…….’
소당은 내심 침을 삼켰다.
크게 소리치며 말리는 자신을 노려보던 채여민의 눈빛을, 그녀는 지금도 잊지 못했다.
그 눈빛으로 끝이었다. 소당은 그때 이후로 채여민에게 어떠한 관여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선 안 될 일이었지만, 소당은 처음으로 자신이 모시는 분에게 공포를 느꼈다.
한없이 여리고, 자신의 말을 순순히 믿고 따르던 어린아이가 드러낼 만한 위압감이 아니었다.
그때 소당은 깨달았다.
왜 전대 교주님께서 채여민을 제자로 삼았는지를.
그녀에게는 하늘이 내린 재능과 그 재능을 살릴 독기, 그리고 타고난 위엄이 있었다.
채여민을 가장 가까이서 돌봐 온 소당조차도 모르고 있던 패왕(霸王)의 자질이다.
그 누구보다도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준비가 된, 그러한 운명을 받고 태어난 자가 비로소 발아한 것이다.
‘이제 내 역할은 끝났구나.’
소당은 쓸쓸한 눈으로 채여민을 보았다.
그 독한 수련을 하면서, 어느새 채여민의 신체에도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 여전히 어렸지만, 이제는 제법 그 나이대의 소녀로 보였다.
‘어쩌면 나는…… 공녀님을 모시며 대리 만족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소당이 입술을 깨물었다.
몇 년을 모신 분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아직도 메워지지 않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큰 상처였다.
‘시녀 실격이구나.’
그때였다.
쿵. 쿵.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소당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또 누가 온 거지.’
채여민에게 조심스레 다가간 소당이 고개를 숙였다.
“들이지 않겠습니다.”
채여민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못했다. 이미 스스로에게 깊이 빠져든 것이다.
쿵. 쿵.
또다시 대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서둘러 대문 쪽으로 달려간 소당이 입을 열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현재 이곳은…….”
그때, 대문 밖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민이 거기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