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화. 서글픈 축배 (7)
한 달 후.
"다녀왔습…… 억?"
호요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 칠공녀님?"
"앗! 안녕하세요!"
채여민이 해맑게 웃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는데도 미소만큼은 햇살처럼 눈부시다. 생기가 잔뜩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여어, 총군사 왔나?"
웃통을 까고 천마도를 어깨에 걸친 서량이 터덜거리며 다가왔다.
호요성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일은 잘 마무리되었고?"
"예에."
묘하게 힘 빠진 목소리를 내던 호요성은, 일단 결과부터 말씀드리기로 했다.
"철혈성주가 동의했습니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네. 하기야 선택지가 많지 않을 테니까."
"예. 그렇기도 합니다만, 사람 자체가 달라진 느낌입니다."
"자네, 예전에 송 성주를 본 적이 있었나?"
"직접 만나 보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달라진 걸 알아?"
"거야 그간의 언행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지요."
"참나."
쿵.
천마도를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꽂은 서량이 한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되었든 수락했다니 다행이야.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되겠구만."
"그렇습니다. 물론 그 전에……."
"정리할 건 정리해야지."
"역시 교주님이십니다."
"자네가 돌아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네. 몸이 근질근질하거든."
순간 호요성의 눈이 커졌다.
"설마, 교주님께서 직접 중원에 출도하시려고요?"
"왜? 그러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만…… 사람도 많은데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서량이 피식 웃었다.
"혹시나 해서 말이야. 전쟁은 이겼지만, 아직 세상은 위험하잖나. 하기야, 언제는 위험하지 않은 때가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호요성의 표정이 다소 진지해졌다.
"교주님."
"맞네."
"예?"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고. 그래서 직접 나가려는 거야."
호요성의 눈이 흔들렸다.
서량이 정자 난간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담사영은 아직 죽지 않았다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교의 정보단은 물론, 하오문의 정보망에도 놈이 어디로 향했는지가 잡히지 않았어."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주님을 제외하면, 당금의 무림에 담사영만큼 강한 자는 없으니까요.
그만한 고수가 작정하고 몸을 숨기려 든다면, 천하 어떤 정보 조직도 찾아내기 힘들 겁니다."
"통상적으로 봤을 때, 패배를 선언한 적군의 수장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거나 당당히 죽음을 맞거나,
그도 아니면 승자와의 교섭으로 세력을 유지하거나, 셋 중 하나의 길을 택하게 마련이야."
"담사영은 그중 첫 번째 길을 택했군요."
"당당히 죽음을 맞이할 놈도 아니고, 혐오하는 상대와 교섭할 만큼 자존심이 없는 자도 아니지.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칠 가능성은 아예 없는 인간이라고 봐야 해."
"그렇습니다. 즉……."
"뭔가 노리는 게 있다. 그건 당연해. 중요한 것은, 놈이 패배 선언까지 하면서 노리는 게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지."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저 없는 동안 생각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생활이 꽤 여유로웠거든. 머리라도 바쁘게 굴리지 않으면 정말 나태해질 것 같아서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량은 아직 이천상의 말을 잊지 않았다.
- 담사영이 천하와 하나가 되기 전에 막으란 말이다.
그 말을 하면서, 이천상은 천룡기(天龍氣)의 특성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천룡기의 특성은 잠식과 붕괴라고 하셨지.’
잠식, 그리고 붕괴.
생각해 보니 담사영과 참으로 어울리는 기운이 아닌가 싶었다.
놈은 욕망이라는 독을 품고 정파 무림을 잠식해 갔으며, 그들을 내부에서부터 철저하게 붕괴시켰으니까.
‘천하와 하나가 된다? 어떤 식으로 그런 게 가능한 것인지 상상도 안 가. 하지만 사부님께서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니겠지.’
전쟁에서의 패배와 담사영의 생존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지 않다.
담사영에게 있어 패배는 곧 죽음이다. 심지어 상대는 자신이 개처럼 부려 먹었던, 격 떨어지는 종자라고 괄시해 왔던 천하진 아닌가.
현실을 인정할 만한 상황이 왔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의도도 없이 패배를 인정할 리는 없다. 그에게는 패배 선언 자체가 또 다른 계략의 일부일 것이다.
‘보인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그의 육안은 하늘을 향해 있되, 그의 마음은 담사영을 보고 있었다.
‘여유가 없었을 때는 흐릿하기만 했던 놈의 욕망이, 이제는 선명하게 보여.’
우우우우웅.
군림마황기와 구유마공이 꿈틀거렸다.
일차 전쟁의 종료 이후 신교로 귀환하고 얼마간, 서량은 자신의 힘을 제대로 개방한 적이 없었다. 그저 무공을 단련할 때만 조금 신경을 쓴 정도랄까.
그러나 대호법 무담과의 술자리로 마음을 푼 뒤 수뇌부들과의 대화, 나아가 채여민과의 무공 수련으로 어느새 본래의 자신을 회복한 그다.
‘담사영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어.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를 더 불려 가고 있다.’
파지지직.
서량의 어깨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구유마공이 아니라 군림마황기다. 군림마황기가 분노에 찬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
서량은 자신이 담사영의 살기를 읽을 수 있었던 이유, 그의 욕망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진짜 이유를 근래에 와서야 깨달았다.
‘군림마황기가 노리고 있다.’
서량은 천하에서 안 돌아다녀 본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몸에는, 언제나 군림마황기가 함께하고 있었다.
군림마황기의 본질은 순수한 파괴.
세상천지에 파괴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아마도 그 경지가 신화에 이르면, 하늘이 허락한다는 조건하에 하나의 개념(槪念)마저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군림마황기가 담사영을, 정확히는 그놈이 품고 있는 천룡기를 노리고 있는 거야.’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기운.
담사영이 품고 있는 천룡기는 그러했다. 당대 무림에서, 유일하게 서량의 군림마황기에 대적할 만한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주인인 서량이 진기의 영성을 타고 올라 담사영의 욕망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기(氣)는 곧 의념이고, 의념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 그러니 내 마음이 흐트러지면 담사영을 파악하는 눈 역시 흐려지는 것이다.’
서량 정도의 경지에서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이 생겼고, 그로 인해 그는 지닌 능력을 봉인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능력을 해방하고, 마침내 천하일통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비로소 서량은 자신이 올라선 경지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능력과, 확고부동한 의지로 타오르는 철저한 안목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었다.
"교주님."
"음?"
"혹시 보이십니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호요성은 자신의 표정과 눈빛만 봐도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모양이었다. 워낙에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는."
"……과연 대단하십니다."
"대단할 것 없어. 그저 이 또한 숙명이라고 생각할 뿐이야. 그따위 너절한 단어,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서량이 호요성을 보았다.
호요성 역시 서량을 똑바로 마주했다.
"총군사."
"예, 교주님."
"알아서 잘하는 사람에게 굳이 이런 말이 필요할까 싶지만, 내 혹시나 해서 한마디 하겠네."
"세이경청 하겠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마."
호요성의 눈이 빛났다.
서량의 얼굴은 진지했다. 마치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듯했다.
"근시일은 아닐 거야. 느낌이 그래. 하지만 그건 내가 지금 움직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어."
"……."
"만일 내가 중원으로 향한다면, 놈의 대응도 달라질 수 있겠지."
"그렇군요."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 말씀은, 교주님의 중원행이 하루라도 빨리 담사영을 불러내기 위한 책략의 일부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지요?"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하고, 전쟁이 워낙 뜬금없이 종료되어 버렸으니까. 편 가르기는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상황에선 딱히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교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면, 언제쯤 출발하실 생각이신지요?"
"올 사람 오면."
"예? 올 사람이라니요?"
서량이 웃으며 채여민을 보았다.
어른들 대화에 끼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했을까. 어느새 채여민은 한옆으로 가서 충보와 당수 수련을 하고 있었다.
"본교의 전력을 끌고 갈 생각은 없다네. 그렇다고 명색이 신교의 주인이란 작자가 호천마황단만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호요성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 말씀은……?"
"그래."
서량이 천마도를 뽑아 들었다.
"진정 마도천하를 이루려면, 사부님께서 직접 인정하신 천재들도 활용해야 할 거야."
* * *
"군림성교! 천마불사! 종리영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대전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낮았다.
서량은 놀란 눈으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너, 영이 맞냐?"
"그렇습니다, 교주님."
약간의 쑥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서량은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여민이도 그렇고 안 본 새에 뭐 이렇게들 컸어?"
마도칠가 중 거경가의 후계자이자 이천상의 여섯 번째 제자였던 또 하나의 천재.
실로 오랜만에 보는 종리영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도 소년치고는 큰 덩치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했다.
키는 육 척이 훌쩍 넘었고, 굴강한 어깨와 까무잡잡한 피부는 건강미가 넘쳤다.
핏줄도 핏줄이지만, 그간 굉장한 수련을 쌓기도 했을 것이다. 극한의 수련 없이는 근육의 강직도가 저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나기 어렵다.
‘애들은 정말 빨리 크는구나.’
감탄한 얼굴로 종리영을 보던 서량이 일순 표정을 굳혔다.
"그나저나 이놈아.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왜 또 교주님이래?"
"예? 아! 그, 그게……."
종리영이 멋쩍은 듯 웃었다.
"여기는 대전이잖습니까. 사적인 칭호는 금물……."
그때, 회랑 안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라버니! 종리 사형 왔어요?"
"오냐, 방금 왔다."
회랑에서 나타난 소녀는 바로 채여민이었다.
종리영의 눈이 소 눈알처럼 툭 불거졌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둘은 오랜만에 보겠네?"
"아……."
채여민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사형!"
"어? 어…… 어어, 오랜만이다."
종리영이 어색한 듯 손을 올렸다. 그러나 이내 이곳이 대전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다급하게 손을 내렸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사형은 무슨. 그냥 똑같은 오라비지."
"하지만 종리 사형이랑은 오라버니만큼 친하지 않은걸요?"
발랄한 목소리로 상큼하게 외친다.
대뜸 묘한 방식으로 비수를 꽂는 그녀였다. 종리영의 얼굴이 더더욱 어색해졌다.
"아버님께서는 잘 계시고?"
"……."
"어이."
"……."
"인마!"
"헉! 예? 아, 예!"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귀신 봤어?"
"아, 아닙니다! 그냥……."
종리영이 고개를 숙였다.
"막내도 많이 컸구나, 싶어서요."
"많이 컸지. 세월은 사람을 가리지 않거든. 그래서, 아버님은 잘 계시냐?"
"예. 여전하십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저……."
"형님."
"예?"
"……."
"아, 예! 혀, 형님."
"그래."
종리영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한데 어인 일로 저를 호출하셨는지……?"
"왜? 그러면 안 돼?"
"컥! 아,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서량이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사형제들끼리 우애나 다지고 싶어서 말이야."
"아…… 그러시구나."
"어째 실망한 표정이네?"
"아닙니다!"
"자식."
서량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창날은 잘 갈아 두고 있느냐?"
종리영의 눈이 반짝였다.
"물론입니다."
자신 있는 목소리였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 한번 마음에 든다. 좋아, 사흘 후에 출교할 것이니 준비 단단히 해 두도록 하거라."
"예! ……예? 출교요?"
"그래."
"어, 어디로요?"
서량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십만대산의 무수히 많은 봉우리 너머, 흐릿한 세상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천하(天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