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화. 유희는 없다 (1)
‘참으로 이상하군.’
탁자 위에 수십 장의 문서들을 쫙 펼쳐 놓은 공야치의 얼굴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역시 없다.’
한참이나 고민을 이어 가던 공야치의 귀로 음상단주 초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주님."
"음?"
"차 한잔 드시고 하시지요."
"아, 고맙네."
향이 제법 고급스럽다. 공야치가 코를 벌름거렸다.
"벽라춘인가?"
"그렇습니다. 마침 질 좋은 찻잎이 들어와서요."
공야치가 미소를 지었다.
"벽라춘이라. 그분도 이 차를 마음에 들어 하셨는데."
"예?"
"교주님 말이야."
"아!"
"다종을 딱히 가리지는 않으셨더랬지. 하지만 그중 벽라춘만은 유독 좋아하셨어."
초해가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양이 제법 넉넉합니다. 교주님께 따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시게나."
"한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지요?"
"음?"
"표정이 너무 진지해 보이셔서요."
"아, 그게."
공야치가 눈살을 찌푸렸다.
"중원 정세를 살피고 있자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어떤 생각 말씀이십니까?"
"황태자."
초해의 눈이 반짝였다.
"황태자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공야치가 문서 한 장을 들어 초해에게 건넸다.
"담사영이 패배를 선언한 후부터 지금까지의 정국이 세밀하게 기록된 문서일세. 한번 살펴보게나."
빠른 속도로 문서를 읽어 내린 초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세가 어수선하긴 합니다만……."
"딱히 이상함은 느끼지 못하겠는가?"
"예에. 부끄럽지만, 소인은 문주님께서 왜 황태자를 언급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음."
공야치가 구석에 놓여 있던 다른 문서를 들어 건넸다.
"자, 이것도 보게."
문서를 살핀 초해의 눈이 번뜩였다.
"이건?"
"오늘 아침에 올라온 보고일세. 너무 늦은 감이 있긴 했네만."
문서에 적힌 내용은 바로 담사영의 이동 경로였다.
정확히는, 담사영으로 추정되는 자의 이동 경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담사영이 똬리를 튼 곳은 호북 무당산이었네. 명령 체계와 지리적 이점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명당을 찾기도 힘들겠지."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것이야. 그뿐만이 아닐세. 무당산에 남은 담사영 휘하 본군(本軍)까지 모조리 사라져 버렸어."
"그건 알고 있습니다."
"황군이 황궁으로 돌아가는 거야 당연한 일일세. 하지만 담사영 휘하 교룡조와 삼왕, 그리고 천룡의 병력은?"
공야치의 눈이 빛났다.
"자네라면 그들이 어디로 향했을 것 같나?"
초해의 얼굴도 어느새 진지해졌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저도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만."
"말해 보게."
"가장 가능성이 큰 건, 역시나 새외입니다."
"역시 그렇게 봤군."
"예. 섣불리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지만, 현재 천마신교의 병력은 건재합니다. 그러나 그 병력을 쉽사리 운용할 수는 없습니다."
"천하가 눈앞에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이 중요한 시국에 병력을 새외로 파견하긴 어려울 것이고, 담사영 측 역시 그 부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겁니다."
"그랬겠지. 워낙에 잔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문제는 역시나 담사영의 성격이겠지요."
공야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나 역시 그 부분이 걸려. 그가 새외로 나간다는 건, 진짜 패배를 의미하는 거거든."
"그렇습니다. 한번 꼬리를 만 맹수는 다시 발톱을 드러내기 힘든 법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외로 향했다고 생각하나?"
"예. 그 외의 선택지도 떠올려 봤습니다만, 그 어떤 행보도 새외로 향하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작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초해가 물었다.
"하지만 문주님께서는 그리 생각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음."
"그리고, 황태자의 어떤 부분이 의아하신 건지요?"
"그의 야망."
"예?"
공야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전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담사영과 손을 잡았던 때 말일세."
"아, 예."
"그때 꽤 여러 가지를 조사했었다네. 물론 담사영보다는 그 주위 인물에 관한 것이었어.
워낙 철두철미한 사람이라, 조금만 파고들어 보려 해도 즉시 정보를 통제했거든."
"그 주위 인물 중 황태자도 포함되어 있었군요."
"그렇다네."
공야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 멀리, 무당산이 보였다. 두 사람은 하오문의 호북지부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자는, 말하자면 담사영이 가진 가장 강력한 패인 동시에 계륵과도 같은 존재라네.
담사영은 황태자를 쥐고 흔들 능력이 충분하지만, 또한 그의 명령과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있기도 했지."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그릇이 작은 자야. 하지만 망해 버린 황궁의 후계자라도 황태자는 황태자야.
적어도 배움에 있어서만큼은 누구 못지않았을 걸세. 하긴, 그 정도 배움이 있었으니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야망이라도 품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겠지요."
"조사하면서 느꼈다네. 담사영을 향한 황태자의 시선을."
"시선이요?"
"그렇다네."
공야치의 눈이 깊어졌다.
"분명히 말하건대, 황태자는 담사영을 혐오하고 있었어."
"혐오요?!"
"담사영뿐만이 아니지. 황태자는 담사영을, 나아가 무림인 전체를 혐오하고 있었어."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사영과 손을 잡았다? 그릇은 작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싫은 일을 감내할 줄은 아는 자라는 뜻이라네."
초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래."
공야치가 어지러이 쌓여 있는 문서들을 가리켰다.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 그리도 혐오하는 담사영과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황군 총수인 담사영이 패배 선언을 한 순간 황태자의 야망도 무너져 버린 셈이 되지. 심지어 그리 혐오하는 상대와 손을 잡았는데도."
초해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야 문주님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알겠다.
"반응이 없군요."
"그래."
황태자 주천양은 참을성이 많지 않은 자다.
그런 그가 담사영이 밀리는 와중에도 한 번을 발작하지 않았다. 자신과 담사영이 운명 공동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사영이 패배 선언을 한 이상, 더는 그와 손을 잡을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아니, 오히려 패배한 장수의 목을 잘라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어야 정상이었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담사영을 향해 있었지. 그럴 수밖에 없어. 지금의 중원에 이러한 환란을 몰고 온 자가 바로 그니까.
그만큼 담사영이 벌인 짓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했지."
"……!"
"하지만 이제 와서는 담사영보다 황태자 주천양을 봐야 하네. 이유인즉, 그자야말로 유일하게 담사영을 억압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야."
"그, 그렇다면?"
초해가 침을 삼켰다.
"황태자 주천양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없다는 것은, 아직 담사영에게 노림수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혹은."
공야치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황태자가 길길이 미쳐 날뛰지 못할 상황에 처한 것일지도 모르지."
"헉!"
"담사영에게 있어 패배 선언이란, 제아무리 노림수가 있다 한들 받아들이기 힘든 치욕일세. 하지만 그는 그 방법을 택했지."
"……!"
"미리 황태자와 말을 주고받았다? 글쎄, 나는 회의적이라네. 설령 그랬다 한들 황태자는 담사영이라는 패를 버렸어야 정상이야."
"살수!"
"그래."
공야치가 또 다른 문서를 집어 들었다.
"신교의 총군사님과 무색사장 어르신의 합작으로 만들어 낸 기가 막힌 한 수였다네.
그 한 수로, 담사영을 향한 황태자의 신뢰는 거의 바닥까지 떨어졌다 해도 좋아."
"그렇지요."
"황태자는 절대 담사영을 믿지 않아. 버렸으면 버렸지, 안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게야."
"하지만…… 황태자에게는 실질적인 힘이 없습니다. 비록 담사영이 제국의 차기 황제로 인정해 주고는 있습니다만, 담사영이 마음만 먹으면 황태자 정도는……."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세."
공야치가 입술을 깨물었다.
"황태자의 반응이 없다는 것은, 담사영이 황태자를 해치면서까지 뭔가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야."
초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태자를 해친다? 정작 그 자신이 말한 바였지만, 실제로 담사영이 황태자를 죽였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황궁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천하의 담사영이 괜히 그에게 절절매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런 그가 황태자까지 죽여 버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물론 이 또한 가정에 불과하네. 하지만……."
"……담사영이 지금껏 했던 짓을 생각해 보면, 놀랍기는 해도 불가능한 짓은 아닙니다."
"그렇다네."
공야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분명 그렇긴 한데."
만약 담사영이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다면, 담사영은 절대 황태자를 죽일 수 없다.
‘황군!’
당대 최강의 고수이자 살아 움직이는 마신이라 불리는 자.
십대천마 서량의 손에 황군 오천 병력이 몰살을 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규격 외의 재앙,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해라고 봐야 한다.
황군은 강하다.
개활지에서 정면 승부를 벌인다면, 설령 구파일방급 대문파라도 맞서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무림인 같은 자존심도 없어서,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전국(全局)을 뒤바꾸는 최고의 패가 될 수도 있다.
‘담사영이 그만한 패를 버리려 할까? 황태자를 죽이면서까지?’
제아무리 심사가 뒤틀렸다 해도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담사영은 빤히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감정에 휩쓸려 내던질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가정이었다.
‘만일 그자가 황태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런데도 황태자가 길길이 날뛰지 않는 거라면?’
공야치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혹, 담사영이 황태자를 진짜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담사영은 천룡술법의 대가다.
술법 중에는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기괴한 술수도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 당대 최고수 중 하나인 저 철혈성주조차도 까딱하면 적의 손에 놀아날 뻔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리하면 후폭풍이…….’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대체 담사영은, 황태자는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그때, 문밖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주님. 신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공야치의 눈이 반짝였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들어온 하오문도가 공손한 자세로 서신을 건넸다.
서신을 펼친 공야치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초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교주님께서 출교하신다고 하네."
"예?!"
초해는 깜짝 놀랐다.
"이, 이 시국에요? 한창 내정(內政)에 신경을 쓰셔야 할 상황 아니었습니까?"
"……아시는 거지."
공야치의 눈이 반짝였다.
"교주님께서도 아시는 거야.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중원 어딘가에서, 당신의 숙적이 피 묻은 칼을 갈고 있음을 확신하고 계시는 것이다."
서량의 능력은 이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다.
무신(武神)의 경지를 넘어, 진정 신(神)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전대 교주이자 고금제일인으로 숭상받는 이천상보다도 더 지독한 파괴 행위를 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마음만 먹는다면.
"교주님께 따로 연락 드리게. 내가 꼭 뵙고자 한다고."
"알겠습니다."
공야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번만큼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교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