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화. 유희는 없다 (2)
두두두.
마차가 관도를 경쾌하게 달렸다.
크기가 어지간한 마차 서너 대를 합친 것만큼이나 큰데도 이런 속도와 안정성을 보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히히힝!
마차를 이끄는 여섯 마리의 말도 하나같이 장대한 체구를 자랑했다.
한혈(汗血)의 피가 섞인 말에 각종 영약을 먹여 기른 중원 최고의 명마(名馬)들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무게가 호왕의 두 배에 달하면서도 지구력 역시 뛰어났다.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마차.
그리고 그 마차의 후미에는 웅장한 필치로 천마(天魔)라 적힌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중원을 가로지르는 것임에도 천마의 깃발을 내걸었다. 예전에도 세상 눈치를 봤던 건 아니지만, 유독 당당함이 느껴지는 깃발이었다.
"공기가 차군."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모는 마동필의 얼굴에 기분 좋은 여유가 깃들었다.
‘오랜만이야.’
교주님께서 타신 마차를 몰고 중원으로 나섰다.
얼마 안 된 것도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하긴, 그때는 교주님께서 아직 소교이시던 시절이니까.’
그사이에 참 별의별 일이 있지 않았는가.
전대 교주님의 죽음, 새로운 교주님의 즉위, 강서상회와의 일, 철혈성주와의 만남, 그리고 담사영 측에서 보낸 전력을 섬멸하던 일까지.
마동필이 눈을 감았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교주님.’
격동의 시기였다.
평화로 포장된 혼돈의 시기에, 교주님께서는 온갖 전투와 정쟁에서 승리를 거머쥐며 기어이 중원 최강의 존재로 우뚝 올라서셨다.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지만, 마동필은 서량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분을 모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있었다.
만일 서량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테니까.
그때, 마차 안에서부터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필아."
"예, 교주님."
"마차 흔들린다. 잘 좀 몰아 봐라."
마동필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적당히 하다가 이따 나랑 교체하자고."
"헉! 아, 아닙니다! 제가 계속 몰겠습니다!"
"싫어? 싫음 말고."
싫은 걸 떠나서 절대 안 될 일이다. 천마신교의 주인이 마차를 몰다니?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마동필은 눈을 부릅떴다.
끝까지 집중을 잃지 않으리라. 그의 두 눈이 맹렬한 의지로 불타올랐다.
한편 마차 안에서는,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심이세요?"
"음?"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이냐?"
종리영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정말로 마 호위님과 교체하려고 하셨어요?"
"그럼 마음에도 없는 말로 동필이 놀려 먹겠냐? 당연히 진심이지."
"헉!"
종리영은 혀를 내둘렀다.
"형님, 절대 그러지 마세요."
"왜?"
"형님은 천마신교의 주인이시잖아요. 당대 천하제일인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런 분이 마차를 몰다니요? 말도 안 돼요."
근 며칠간 워낙 자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종리영의 언행도 상당히 편해져 있었다.
서량이 혀를 찼다.
"안 될 건 또 뭐야?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저희가 보고 있는데요……."
"왜? 싫어? 이상해?"
"싫은 건 아니지만, 이상하긴 하죠."
"이상할 것도 많다. 윗사람은 일하면 안 된다? 그것도 다 웃긴 얘기야. 윗놈은 팔이 없어, 다리가 없어?
내 사람 힘든 거 빤히 알면서도 늘어지게 쉬고만 있으면 눈치 안 보이겠냐?"
"눈치…… 안 보셔도 될 위치잖아요."
"이놈 보게? 이놈 이거, 제 아랫사람 등골 뽑아 먹을 놈이로구먼."
종리영이 울상을 지었다.
"억울해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런 평가는 받고 싶지 않으면서 왜 하기 싫고 귀찮은 건 다 아랫사람에게 맡기려고 해?"
"윽."
서량이 피식 웃었다.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 위와 아래를 너무 선 그어 가면서 따지려 들지는 마라. 위아래 따지기 전에, 나한테 소중한 사람인지 아닌지부터 판단하는 게 먼저지."
"아……."
"어차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야. 내가 하기 싫은 건 남들도 하기 싫은 법이니, 적당히 나눠 들고 살아야지."
종리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서량을 보았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그 기괴한 짐승 보는 듯한 눈깔은?"
"짐승이라니요! 그냥 신기해서 그래요."
"뭐가 그리 신기해."
"저는 형님께서…… 엄청나게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필요할 때는 그렇게 살지."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너도 나중에 가문을 이어받아야 할 것 아니냐? 네가 어떤 가주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아랫사람의 고생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진 말았으면 한다."
종리영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할게요, 형님."
"오냐.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때, 주서윤이 물었다.
"저, 오라버니."
"엉?"
"한데 저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아, 내가 아직 말 안 했나?"
주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그냥 중원에 진출하자고만 하셨지, 목적지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목적지라."
서량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변 풍경이 엄청난 속도로 홱홱 지나갔다.
"무당산부터 가 보려고."
순간 주서윤의 눈이 흔들렸다.
"무당산이라면……."
"그래."
"괜찮으시겠어요?"
"안 괜찮을 것도 없지. 그리고 너도 한번 가 보고 싶지 않으냐?"
서량이 눈을 빛냈다.
"현천 노선배께서는 무당산과 하나가 되셨다. 비록 천하에서 가장 악질적인 놈에게 유린당하긴 했지만, 그곳은 여전히 선한 도기(道氣)를 품고 있을 거야."
"……."
"담사영의 흔적도 살펴볼 겸, 현천 노선배께 인사도 드릴 겸 무당산부터 들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주서윤이 고개를 숙였다.
"좋아요."
서량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시간도 빠듯하지 않으니, 괜찮으면 무당산에서 며칠 머무르도록 하자."
"네!"
그때였다.
"다 좋네만, 나한테 했던 말만큼은 지켜 줬으면 싶네."
주청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마지막 목적지는 반드시 황궁이 되어야만 하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나 역시 거기서 확인할 게 있으니까."
"그래."
주청이 다시 눈을 감았다.
서량이 물었다.
"이봐, 황제."
주청은 눈을 뜨지 않고 답했다.
"말씀하시게."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너무 답답해하지는 말아."
"……."
"전쟁에서 이겼다고 대뜸 천하일통이 된다? 그건 말이 안 되지.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
"나도 알고 있다네."
"아는 사람이 왜 그렇게 기분이 가라앉아 있어?"
나직이 한숨을 쉰 주청이 다시 눈을 떴다.
"찝찝해서 그러네."
"뭐가?"
"이번 전쟁 말이야."
서량이 눈을 빛냈다.
호요성이 그랬다. 주청의 안목이 실로 대단하다고. 전쟁은 물론, 천하 정세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눈이 누구 못지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호요성은 생각보다 훨씬 냉정한 사람이었다. 웬만해선 쉽게 남을 칭찬하지 않았다.
그가 주청을 얼마나 인상적으로 봤는지 알 수 있었다.
"전쟁이 왜?"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담사영이라는 놈, 이렇게 물러날 놈이 아니라는 걸."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잘 알고 있지. 그래서 세상에 나온 것이고."
"그렇지. 한데 말일세, 문제는 담사영만이 아니라는 걸세."
"황태자 말인가?"
"그렇다네."
주청의 눈이 깊어졌다.
"내 비록 자식 농사엔 실패했지만, 적어도 아들놈의 성품과 성격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네.
하긴, 어쩌면 나는 내 아들을 후계자가 아니라 황위를 넘보는 도전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더 잘 아는 것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당신이 보는 황태자는 어떤 사람인가?"
"녀석은 자존심이 강하다네."
"그건 알아."
"그 강한 자존심에, 무림인이란 족속을 극심하게 싫어하기까지 한다네."
서량의 눈이 빛났다.
"무림인을 증오한다?"
"증오라기보다는 혐오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호오? 그런데도 담사영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로군."
"그렇다네. 그 말인즉."
"이번 담사영의 패배 선언 직후, 잡았던 손을 냉큼 놓아 버렸을 거란 뜻이겠지."
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그릇이 작아. 작은 그릇에 이것저것 욱여넣다 보니 이제는 자신에게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네.
스스로를 모르니 타인을 알려고 하지 않고, 타인을 모르니 세상도 모르지."
"꽤 독특한 관점이군."
"그렇게 모르는 것이 많으니 감당키 힘든 야망을 품은 것이고, 감당키 힘든 자와 손을 잡은 것이야.
그 와중에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는지라, 자신이 손을 잡은 자가 실패한 것을 용납하지도 못한다네."
"생각보다 흔한 유형이야. 그런 사람들 많아."
"많지만, 황태자가 그래서는 안 되네. 황궁이라서가 아니야. 세상 어떤 조직이든, 사람을 부리는 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한계부터 알아야 하네."
"맞는 말이야."
"문제는 녀석이 위정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는 걸세. 그렇다면 지금쯤 반쯤 미쳐서 길길이 날뛰어야 정상이란 말이야."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황태자 측이 잠잠한 게 이상하다?"
"그렇다네."
주청이 한숨을 쉬었다.
"신교의 정보력이 하오문에 필적한다는 말을 들었네. 황궁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도 들었어."
"그렇지."
"내, 몇 번이나 총군사에게 물어보았네.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더군. 아직까지 잠잠하다는 것."
"흐음."
서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그렇군.’
워낙에 혼란스러웠기 때문일까.
서량은 황태자의 동향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숙적은 담사영이었고, 그의 욕망까지 읽어 낼 수 있으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들으니, 확실히 이상하긴 하다.
"만에 하나."
주청의 표정이 흐려졌다.
"만에 하나, 담사영이 녀석을 죽인 거라면…… 그럴 수도 있지."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내 감히 장담하건대, 황태자는 죽지 않았어."
"왜 그렇게 생각하나?"
"당신이 황태자를 잘 알 듯, 나 역시 담사영을 잘 알기 때문이지. 놈은 황궁의 전력(戰力)을 몽땅 잃어버릴 게 분명한 악수를 둘 리 없거든."
"음."
"황태자는 죽지 않았어. 다만……."
"다만?"
잠시 망설였던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쨌든 너무 심란해하지는 말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숨을 푹 내쉰 주청이 다시 눈을 감았다.
웃으며 주청을 보던 서량 역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는 죽지 않았어. 다만…… 어쩌면,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겠지.’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천룡술법의 악랄함을.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가 한낱 꼭두각시로 전락할 뻔했던, 신교의 충성스러운 대호법을 살아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들어 버렸던 그 위험천만한 술법을.
‘하지만 과연 황태자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보름 뒤.
호북 남단으로 진입한 일행에게 서신이 날아들었다. 무려 두 통이나.
"교주님!"
"누구한테서 온 거냐?"
"하나는 하오문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동필의 눈이 깊어졌다.
"소림 방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