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유희는 없다 (4)
"후우."
무당산 초입.
다 망가진 해검지(解劍池) 앞에 이른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참으로……."
그의 두 눈에 아련함이 어렸다.
"참으로 자연스럽군."
이 몸으로 살아난 뒤, 담사영과 처음 독대했던 그 오솔길 부근이었다.
치솟는 호승심과 불같은 한을 터트리며 무시무시한 승부를 벌였던 그때, 무당산 전체가 신음했더랬다.
산세 좋았던 땅에는 엄청난 발경의 여파로 이곳저곳에 고랑이 파였고, 무수히 많은 나무가 박살 났으며, 바위가 하늘을 날고 흙이 끓어올랐다.
천재지변에 육박하는 충격파가 온 산을 메아리치던 그때.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았던 산세가, 어느새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고랑이 파였던 자리에 새로이 물길이 생겼고, 부서진 바위 조각 주변에는 수목이 자랐다.
박살 나 흩어진 나뭇조각들은 산의 자양분이 되어 수많은 곤충과 식물을 키워 냈다.
"벌써 이렇게, 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구나."
서량이 주서윤을 보았다.
"어떠냐?"
순간 서량은 깜짝 놀랐다.
주서윤은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는 선기(仙氣)를 연상케 하는 맑은 기운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분명 마기(魔氣)를 발산하는데, 그 마기가 너무나도 깨끗하다. 도무지 마공을 연성한 무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이것은?’
우우우웅.
마기 가득하던 서량의 두 눈이 어느새 신안(神眼)의 힘을 발휘했다.
서량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움직인다.’
땅이 움직인다.
아니, 정확히는 지기(地氣)가 움직이고 있었다. 무당산의 산운(山雲)처럼 풍성하고도 부드러운 지기가 천천히 주서윤의 발밑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이내 주서윤의 몸이 새하얀 기운으로 뒤덮였다.
무당산의 기운이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어 체내의 탁기와 피로를 모조리 몰아내 주고 있었다.
스읍, 후우.
들이쉬는 숨에 청량한 공기가 폐를 채우고, 내뱉는 숨결에 열기 가득한 탁기가 섞여 나왔다.
배출된 탁기는 허공에서 분해되어 무수히 많은 나무에 스며들었다.
‘숨 쉬고 있다.’
나무가 숨을 쉬는 게 보인다.
주서윤의 탁기를 받아들인 나무가 크게 심호흡을 하는 듯했다. 탁기를 빨아들인 후, 다시 내뱉는 공기는 더더욱 맑고 청량했다.
서량이 산을 둘러보았다.
"선배가 오셨군."
자신이 본 것이 실제인지 허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량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무당산과 하나가 된 현천진인이 두 사람을 환영해 주고 있다고.
그중 유독 주서윤에게 반가움을 표하는 듯한 느낌은 단순한 착각만은 아니리라.
마침내 주서윤이 눈을 떴다.
우웅.
환하게 빛나던 기운이 그녀의 몸으로 휙 빨려 들어갔다. 그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러워 거침이 없었다.
"할아버지."
서량이 웃으며 물었다.
"반가워하시더냐?"
"네."
주서윤 역시 맑게 웃으며 답했다.
"너무나도 반가워하셨어요."
"그래, 그렇다니 되었다."
이런 걸 보면, 정말이지 세상은 이해하기 힘든 오묘함으로 가득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충분히 높게 올라왔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많다. 어떨 때는 세상을 한 손에 잡고 흔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어떨 때는 한 치 앞을 몰라 겁이 나기도 한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괜찮아.’
그래도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세상사 흐름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지혜가 아니라, 그저 숙적의 섬멸과 마도천하일 뿐이니까.
그때,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자네일 수 있는 것이네.
서량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노선배?’
환청인가? 아니면 진짜 현천진인인가?
서량의 얼굴에 다시 한번 미소가 떠올랐다.
환청이건 뭐건, 오랜만에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어떻소? 이곳에 사니 좋소?’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목소리 같은 의지가 느껴지는 듯했다.
- 세상 편안하다네.
"하하."
서량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주서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응? 아, 별거 아니다. 그냥 사바세계의 다툼에 끼지 않아도 되는 노선배가 부러워서."
주서윤이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는 마도천하를 이루셔야 하잖아요. 죽기 전까지 편한 삶을 살긴 어려우실걸요?"
"악담을 해라, 이놈아."
"현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 치열하기 짝이 없는 삶에 한 손이라도 거들어 주길 바란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 천주봉까지 슬슬 걸어 올라가 볼까?"
"네!"
그렇게 두 사람은 주변 경관을 둘러보며 천주봉에 올랐다.
천천히 걷고 있지만, 워낙에 이룬 경지가 출중했다. 그저 평범하게 걸을 뿐인데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의 뜀박질보다 빨랐다.
어느새 천주봉 정상에 다다른 두 사람.
그리고 그곳에는, 두 사람을 맞이해 주는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오랜만이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삿갓을 벗은 사내의 이마에는 선명한 계인이 찍혀 있었다.
치렁치렁하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닿았다. 마치 본래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듯, 머리를 기른 모습이 몹시 자연스러워 보였다.
바로 소림의 전대 방장, 혜심이었다.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어엿한 속인(俗人)이로군. 불가의 제자라는 느낌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는데."
혜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것이겠지."
"다만, 불당의 향내는 사라졌어도 불심(佛心)은 그대로군."
"……."
"당신도 어지간하구만. 이 정도 했으면 됐잖아? 이제 다시 소림의 품으로 돌아가지 그래?"
"계율은 지엄하고 법도는 냉엄한 법이외다. 한번 파문당한 제자가 다시 숭산을 오를 순 없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라는 게 있는 법이야. 당신이 큰 잘못을 저질러서 파문당한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나?"
"상황이 그랬다 한들 어쩌겠소? 서 교주의 말마따나 나는 불가의 제자라는 신분을 버렸소이다. 그저 부처를 믿는 한 명의 속인으로서 평생을 살아갈 따름이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당신답다고 해야 할지."
"칭찬으로 듣겠소이다."
"그나저나, 웬일로 날 불렀어? 아니 그 전에, 내가 세상에 나왔다는 건 어떻게 아셨고?"
혜심이 미소를 지었다.
"당대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당신이오.
당대 무림의 천하제일인이자 십대천마이며, 전대 교주에 이어 마도 역사상 최강의 반열에 오를 거란 절대자가 세상에 나왔는데,
그 소문이 내 귀에는 닿지 않았을 것 같소?"
"거창한 별명이구만."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날 보자고 한 용건은?"
물끄러미 서량을 보던 혜심이 입을 열었다.
"언제 담사영을 치러 갈 것이오?"
"……."
"부디 알려 줬으면 하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담사영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그렇소."
"그런가……."
"이미 서로가 다 아는 얘기 아니오? 나도, 당신도 담사영이 죽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있소.
아니, 당신은 한발 더 나아가 그를 상대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려 놓았겠지."
서량이 피식 웃었다.
"나를 너무 계획적인 사람으로 보는군."
"중요한 것은, 분명 당신은 담사영을 처리하러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오."
"그건 또 어인 확신인가?"
"아니란 말이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오가다 마주치면 당연히 작살을 내 버려야지. 하지만 단순히 담사영을 죽이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야."
혜심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면?"
"당신 말마따나 담사영은 아직 죽지 않았다. 아니, 마지막 한 방을 먹이기 위해 또 음침한 수를 꾸미고 있겠지."
"……?"
"놈이 나한테 오기 전에, 우선 세상을 좀 정리해 보려고."
"정리? 어떤?"
서량의 눈웃음 속에 요악한 살기가 번뜩였다.
"칠파."
"……!"
"그리고 삼가."
"……."
"담사영이 뭘 준비하고 있는지는 몰라.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수를 쓸지는 짐작이 가지만 확실하지 않지.
중요한 것은, 놈은 이번 한 수를 위해 엄청나게 무리하고 있다는 거야."
"한데……?"
"하지만 칠파와 삼가는 다르지. 놈들은 아직도 담사영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어.
담사영이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손에 쥐는 거야 무섭지 않지만, 칠파와 삼가는 좀 무섭거든."
"무섭다…… 당신이 말이오?"
"무섭지."
서량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들에겐 내 사람을 해칠 만한 힘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운 존재다."
"……!!"
"그래서 온 거야. 그들이 날뛰는 걸 막기 위해서. 아예 발을 떼기도 전에 원천 봉쇄해 버릴 작정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가만히 서량을 보던 혜심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만 확인하고 싶소."
"언제든지."
"당신 혼자서 칠파의 하나를 상대할 수 있겠소?"
"조건만 맞는다면 그들 중 절반 이상도 상대할 수 있지."
혜심의 눈이 커졌다.
괜한 허풍으로 들리진 않았다. 서량은 진심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일정 영역으로 적을 몰아넣고, 그 이후에 어떠한 싸움도 없다는 확신이 들 경우.
바로 그때, 적들의 머리 위로 천상천하멸가종무(天上天下滅迦終無)가 쏟아질 것이다.
철혈성에 존재하는 모든 적과 진법을 일격에 소멸시켰던 무적의 무공이다.
비록 그 직후 쓰러져 버렸지만, 적절한 환경만 만들어진다면 설령 칠파 전체가 나선다 해도 모조리 없앨 수 있다.
지금의 서량은 그런 경지에 올라 있었다.
궁극의 무공과 천재적인 지략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영역, 그야말로 무적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손을 보태고 싶소."
서량의 눈이 커졌다.
"손을?"
"그렇소."
혜심이 한숨을 쉬었다.
"서 교주의 말대로요. 내 비록 파문당한 몸이라 다시 불가에 입적할 수는 없지만, 봉문(封門)을 푸는 건 얘기가 다르오."
서량의 눈이 번쩍였다.
"봉문을 푼다?"
"그렇소."
"언제 또 봉문을 했었어?"
"보시오. 소림이 다시 봉문한 것도 모르지 않소?"
서량이 피식 웃었다.
"땡중도 보통 땡중들이 아니로군. 아무도 모르게 봉문을 해 놓고서, 이제는 때가 되었으니 풀겠다 이건가?"
"그렇소."
담백한 인정이었다.
혜심이 고개를 숙였다.
"파문당한 내게 소림을 대표할 자격은 없소. 다만, 서 교주와는 나름의 인연이 있으니, 소림을 대신하여 왔소이다."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소림이 도와준다면야 우리로서도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지."
"……."
"하지만 당신들, 괜찮겠나?"
"소림이 왜 봉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시오?"
혜심의 눈이 깊어졌다.
"법도와 계율로는, 저 거대한 악의 무리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오.
우리가 죽어도 누군가 대신할 사람이 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테지만, 담사영은 어떤 문파라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서 이렇게 왔소. 미약한 힘이지만, 서 교주와 함께 세상을 바로 세우고자 치욕을 무릅쓰고 온 길이오."
혜심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부디 우리와 함께해 주시길 바라오."
가만히 혜심을 보던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함께할 필요가 있겠나?"
"……."
"사천은 내가 맡지."
혜심이 놀라서 서량을 보았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먼저 끝낸 쪽이 도와주러 가는 걸로 하세. 내가 사천을 맡기로 했으니, 소림이 섬서를 장악하면 되겠군."
"……고맙소. 정말 고맙소."
"고맙긴. 난 아직 세상의 주인이 아니야."
서량의 두 눈에서 마기가 타올랐다.
"내가 세상을 거머쥐면, 바로 그때 허락을 받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