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화. 유희는 없다 (5)
"후우. 후우."
숨소리가 몹시도 거칠었다.
하지만 그리 거칠어진 호흡으로도 양손에 품은 마기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상대를 노려보는 눈에는 흔들림이 없으며, 두 다리는 언제 어느 때라도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근육에 적당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대단하다.’
종리영은 채여민의 그와 같은 모습에 내심 감탄을 넘어 경이를 느꼈다.
‘여민이는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저런 안정성을?’
그 역시 거경가의 진신 절학을 익힌 몸으로,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몇 차례 한계를 돌파했고, 심지어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정말이지 아버지께서 봐주지 않으셨다면 무리한 수련으로 주화입마에 걸려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안다. 채여민의 호흡이 얼마나 지독하게 단련된 것인지를.
‘재능의 영역이 아니야. 몇 번이나 죽음을 실감했을 거야.’
선천적으로 강인한 육체를 타고난 사람도 있다. 그 또한 재능이라면 재능일 것이다.
하지만 호흡이 흐트러진 상황에서도 내공을 끝까지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건 철저한 수련과 경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유인즉, 그것은 의념과 내공, 육신 모든 것을 일체(一體)화하는 후천적 노력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강해졌구나.’
종리영이 미소를 지었다.
‘나만 성장한 게 아니었어.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을, 우리 사형제들 모두가 허투루 보내지 않은 거야.’
사형이자 교주인 서량은 말할 것도 없고, 사저인 주서윤 역시 지금의 자신으로선 감히 쳐다도 보기 힘든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종리영은 그 사실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사부님이 살아 계셨을 적엔 교류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들과 사형제지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자, 다시 간다."
파아악!
종리영이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채여민의 눈이 번쩍였다.
‘엄청 빠르다!’
지금까지의 몸놀림도 굉장했지만, 이번에는 또 달랐다. 마치 풀숲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던 표범이 혼신의 힘을 다해 덮쳐 오는 듯했다.
채여민의 두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포천장(捕天掌), 통천장(通天掌).’
후우웅! 후웅!
하얀 손 한 쌍이 어지럽게 허공을 수놓았다.
종리영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역시!’
포천장 일격으로 전방위를 아우르는 방어막을 세우고, 숨겨 두었던 통천장으로 재빠르게 어깨를 노려 온다.
기가 막힌 응수였다. 본인의 기량을 넘어선 속도로 다가오는 상대를, 피하거나 막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가해 물러서게 만든다.
투사(鬪士)의 성정이다. 어지간한 배포 없이는 절대 이런 대응을 선보일 수 없다. 심지어 워낙 시기적절해서 종리영조차 순간 주춤할 정도였다.
파바박!
두 발로 거칠게 땅을 밟아 이동 방향을 뒤튼 그가 채여민의 손을 올려 쳤다.
퍽!
채여민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종리영의 각법에 팔뚝을 맞아 통천장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놀란 것은 종리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읽었다?’
발등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약하다. 타격 순간에 본능적으로 손을 거둔 것이다. 움직임이 조금만 더 빨랐어도 각법이 허공을 칠 뻔했다.
후욱!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팔이 튕겨 나간 방향으로 자연스레 몸을 틀어 팔꿈치를 내쳐 오는데, 그 박자가 참으로 읽기가 힘들었다.
속도는 별것 아니지만, 엇박자로 내쳐 상대의 자세가 알아서 무너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종리영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쿵!
반경 삼 장이 흔들릴 정도로 강인한 진각이었다.
진각의 힘을 고스란히 받은 그가 힘차게 장(掌)을 내쳤다. 제게로 날아드는 채여민의 팔꿈치를 향해서였다.
쾅!
"윽!"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을 물러난 채여민이 결국 그 자리에서 벌러덩 쓰러졌다.
"아이고, 아파라!"
채여민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팔꿈치와 팔뚝을 마구 주물렀다.
종리영이 미안함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니?"
"네, 괜찮아요."
그래도 사형의 걱정에는 억지로나마 웃어 보인다. 하지만 말은 괜찮다고 해도, 실제로는 오른팔이 마비가 될 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종리영이 채여민의 팔을 풀어 주려고 다가설 때였다.
우우우웅.
포천금마기가 샘물처럼 솟아나며 뭉친 곡지혈을 풀었다. 채여민이 입맛을 다시며 오른팔을 휘휘 돌렸다.
"굉장하시네요, 사형. 제대로 된 유효타는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했어요."
"……."
"사형?"
종리영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아직 여력이 남았던 것이냐?"
"네?"
"내가 힘 조절을 못 해서 팔이 마비되었을 텐데?"
"아, 이거요?"
채여민이 히죽 웃으며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미세하게 떨리고는 있지만, 점점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는 듯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혈도와 혈맥에 대해서는 꽤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그, 그래?"
"강호에는 점혈(點穴)의 고수가 많다면서요? 고수라도 방심하면 점혈에 당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년 전부터 열심히 공부해 뒀어요."
그게 공부한다고 되는 문제였나?
종리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노력하는 천재라니. 정말 못 당하겠군.’
전대 교주, 천마신교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최강의 교주 휘하에는 일곱 제자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중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이가 오공녀와 칠공녀이며, 조금 더 깊게 따져 보면 칠공녀의 재능이 근소한 차이로 오공녀를 앞선다고 하였다.
지금껏 그 말이 비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흰소리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민이는 재능 못지않게 노력도 많이 했구나?"
채여민이 입맛을 다셨다.
"아직 멀었어요. 사형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걸요. 게다가 사형은 창도 들지 않았잖아요."
너랑 나랑 나이 차가 얼만데.
종리영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뱉을 뻔했다.
"지금은 내가 조금 앞서 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금방 추월당하겠는걸?"
"헤헤, 그건 모르겠어요."
멋쩍은 듯 볼을 긁는 모습이 참으로 귀엽다.
"나중에는 꼭 전력으로 겨뤄 봐요. 알겠죠?"
"그래, 알았다."
"그럼 전 잠시 체력 좀요."
"응? 아, 그래."
채여민은 넉살 좋게 그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인상적인 무공을 보여 주었지만, 호흡이 흐트러질 정도로 내공 소모가 심했다.
즉시 보충하지 않으면 무기력해질 것이다.
우우웅.
채여민의 몸에서 무형의 마기가 피어올랐다.
팔짱을 낀 채 채여민의 운공을 지켜보던 종리영은, 문득 드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성장하니 좋긴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랐다. 후계자 쟁탈전이라는 것이 그렇게나 살벌한 무대인 줄은.
그저 이겨야 한다고 들었고,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래서 종리영 역시 누구 못지않게 단련했다.
하지만 종리영은 어렸고, 그의 위에는 장성한 사형제들이 무려 다섯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형님.’
종리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님께서는 어떠셨나요? 그…… 세 사람을 끌어내릴 때 괴롭진 않으셨나요?’
그들 역시 서량처럼 형님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형이라고도, 형님이라고도 부를 수 없다. 후계자 쟁탈전이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그들은 당대 교주를 죽이려 들었던 이들이니까.
대공자 진관용, 이공자 관평, 그리고 사공자 홍위문.
그중 홍위문은 가장 먼저 탈락했고, 진관용과 관평은 합심하여 서량을 몰아붙였음에도 서량의 무공과 기지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하지만…….’
종리영은 서량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소탈하고 장난기 넘치는 면모가 있다는 것 정도랄까.
기실, 종리영에겐 서량의 압도적인 무공보다도 그 성격이 훨씬 더 큰 놀라움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세 사람을 어떤 식으로 박살 내 버렸는지, 중원에서 벌어졌던 무수히 많은 갈등과 싸움은 또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가 좀처럼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지금.
셋 중 유일한 생존자이자, 지금껏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했다.
"호오, 제법인데?"
순간 종리영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서량과 주서윤이 공터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량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둘이서 한판 붙은 거야?"
"예? 아, 예!"
"뭐야? 갑자기 왜 그리 군기가 잡혔어?"
"아, 아니에요."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흔적을 보아하니 박투술로 붙었나 보군. 여민이가 많이 고전했겠어."
종리영은 혀를 내둘렀다.
"그게 다 보이시나요?"
"안 보일 건 뭐야? 땅에 찍힌 발자국,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경력이 할퀴고 지나간 나무의 흔적,
그리고 둘의 무공 수준을 생각하면 과정과 결과를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
"대단하세요, 형님."
"뭘 이런 걸 갖고."
종리영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가셨던 일은 잘 마무리되셨나요?"
"응. 간만에 무당산 구경도 하고, 만날 사람도 만났고. 이제 우리 갈 길 가면 된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종리영을 보며, 서량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어째 심사가 복잡해 보이는구나."
"예?"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어색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던 종리영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우리 사형제들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서량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짙어졌다.
참으로 솔직한 녀석이다. 거경가의 후계자이니만큼 나름대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도 배웠을 텐데, 말하는 것만 보면 아직도 순진한 소년 같았다.
그리고 서량은, 종리영의 그런 순박한 기질이 마음에 들었다.
"관평 때문에?"
"……예."
종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형님과 모종의 거래를 하여 중원에 나가 있다는 걸 들은 게 불과 얼마 전입니다."
"그랬겠지. 그전까진 말을 안 했으니까."
"그분…… 아니지, 그 사람이 중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막상 그를 보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해한다. 그럴 만하지."
"그리고 궁금합니다."
종리영이 서량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복잡함이 묻어나는 눈빛, 그러나 역시나 그 바탕은 솔직함으로 가득했다.
"형님께서, 아니 교주님께서는 왜 저희 사형제를 이끌고 세상에 나오셨는지요?
칠파와 삼가를 정리하고 희대의 난적인 담사영을 잡을 생각이시라면, 오히려 본교의 고수들과 부대를 소환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천하를 보여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예, 그러셨지요."
"왜? 그게 끝이 아닌 것 같으냐?"
"……예."
다소 위험한 발언이었다. 교주의 생각과 결단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서량은 종리영을 책잡지 않았다.
"여러 소소한 이유가 있긴 하다만, 천하를 보고 느끼라는 의도가 가장 컸다."
"그, 그러셨군요."
"그래. 어차피 나와 함께하는 한, 천하의 어떤 문파가 와도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
무시무시한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말 그게 가장 큰 이유인가요?"
"그렇다. 하지만 정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그다음으로 큰 이유도 설명해 줄 수 있지."
"예?"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깊은 그의 두 눈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숙적을 보고 있었다.
"이 정도가 적당하기 때문이다. 놈이 놀라서 주춤하지 않을 정도의 규모가."
"……?!"
"하지만 보아하니, 저 소림의 방장이었던 속인처럼 내게 찾아올 사람들이 많은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