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8화. 유희는 없다 (6)
"그가 세상에 나올 거라고?"
"그렇소."
"……그걸 이 사람에게 알려 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별 이유는 없소. 아랫사람들에게는 애써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정작 아직도 혼란을 지우지 못한 당신에게 나름의 활력을 줄 것 같아서 말이오."
"……."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가주는 물론, 휘하 검사들 모두 언제까지고 이곳에 계셔도 괜찮소."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지. 갚기 힘든 은혜를 받았으나, 결국 우리와 성(城)은 근본이 다르잖소."
"그것은 천마신교 역시 마찬가지 아니오?"
"맞소."
"대뜸 인정하시는군."
"그러나 나도,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서 교주에 대한 믿음이 있소. 건방지게 들릴지는 모르나, 나는 성주를 서 교주만큼 믿지는 않소이다."
"건방지게 들릴 말은 아니지만, 성주님께서 그 말을 들었다면 꽤 섭섭해하시긴 했을 것이오."
"그래서 군사인 당신에게 얘기하는 거요."
"하하하!"
"이런 말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간 받았던 은혜는 반드시 갚겠소이다."
"갚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든 갚을 거잖소?"
"당신들 역시, 이왕이면 갚는 게 좋잖소."
"우리에 대해 잘 아시는구려."
"배포 한번 보여 주겠답시고 천금을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가주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소이다."
"그렇소? 하면 둘 중 하나겠군. 나를 잘못 봤거나, 아니면 내가 변했거나."
"가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생각하고 싶지 않소."
"한 가지는 알겠소이다. 가주께서는 아직 정신적으로 꽤 피로하시다는 것.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피로가 도를 더해만 간다는 것."
"……."
"이해하는 척도, 괜한 응원의 말도 않겠소. 다만, 남궁(南宮)의 이름은 여전히 드높소이다.
귀가가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의기천추(義氣千秋)의 명성은 절대 단기간에 무너질 만한 것이 아니오."
"그만하시오."
"그러니 가시오."
"……?"
"가서 그를 만나시오. 만나서 답을 구하시오."
"서 교주가 내게 답을 줄 거라는 확신이 있소?"
"확신은 없소. 하지만, 가주께서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답을 찾아내지 못하셨잖소?"
"……!"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천마신교의 당대 교주 염라마신은 전대 교주를 제외,
역대 어떤 교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막강한 무공을 연성했소. 성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무공만큼이나 드높은 이치 또한 깨달았다고 하더이다."
"……."
"그리고 가주께서는 서 교주와 나름의 연이 있지 않소? 서 교주가 왜 세상에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주께서 찾아가면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외다."
"……어찌하여 이리 잘해 주는 거요?"
"음?"
"정파든 사파든 마도든, 결국 수장의 성품과 정치에 따라 파벌의 성격도 달라지게 마련이오.
하지만 귀성의 성주는 사파의 종주외다. 그리고 남궁은 철혈성과 지척에 있소. 나중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없어지는 게 이득일 텐데."
"하하, 그렇게 생각했다면 애당초 그대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잖소?"
"뭐, 그리 말하면 할 말은 없소이다만."
"이유가 무엇이오? 왜 내게, 아니 우리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것이오?"
"글쎄, 그 이유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외다. 게다가 나는 군사요. 성주가 아니란 말이지."
"……."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말해 줄 수 있소."
"……?"
"우리는 더 이상 싸움을 원하지 않소."
"……!"
"설령 천마신교가 진정 마도천하를 이룬다 한들 우리는 그네들과 싸우지 않을 것이오.
사실상 싸울 힘도 없거니와, 더는 분란을 일으켜 제 살을 깎아 먹고 싶지 않소이다."
"……그런가."
"그렇소. 그 증거로, 우리는 이미 신교의 총군사와 손을 잡았소이다."
"……!!"
"놀라신 모양이군. 하지만 어쩔 수 없소. 천마신교의 힘은 역대 최강이오.
마도천하를 직전에 두고 있는 그들을 억지로 막는 것보다는, 손을 잡고 공생(共生)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이득 아니겠소?"
"그렇구려."
"그렇소."
"미안하오. 내 다소 날카로운 언행으로 황 군사의 기분을 언짢게 했소이다."
"하하하! 전혀 언짢지 않소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때 서 교주가 우릴 도우러 오지 않았다면 철혈성은 그대로 멸망의 길을 걸었을 것이오."
"……."
"싸움을 부르는 격동의 시기는 이미 지났소. 이제는 회복의 때요. 중원의 환란이 막바지로 들어섰으니, 그 싸움판에서 내려온 사람들끼리 도우면서 지냅시다."
"……그 말씀은?"
"음?"
"그 말씀은, 아직 중원의 환란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오?"
"담사영이 살아 있잖소?"
"……!!"
"모르셨소? 하긴, 워낙 정신이 없었을 테니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하셨을 거요."
"그렇다면, 서 교주가 세상에 나온 까닭이……?"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소. 누가 있어 그의 심중을 들여다볼 수 있겠소이까.
다만 담사영의 시체도 보지 못한 서 교주가, 패배 선언을 받아 냈다는 이유 하나로 마음 놓고 제국을 만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이다."
"……."
"자, 말이 길었구려. 이만 가 보시오. 여비와 군마(軍馬)는 미리 준비해 두었소이다."
"……고맙소."
"은원은 갚으면 그만이오."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합시다."
"가족분들은 잘 챙기겠소."
"……."
"다녀오시오."
"그럼."
* * *
고요한 여정이었다.
천마의 마차 안은 실로 정숙했다. 워낙에 잘 만들어서 그런지, 따로 보수를 하지 않았는데도 수천 리 길을 돌파한 지금껏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주청은 생각이 많은지 하루 대부분을 눈을 감고 있었다. 명상을 하는 건지, 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서량 역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고, 가장 수다스러운 채여민도 무공에 심취하여 종일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주서윤과 종리영은 애초에 활기찬 성격이 아닌지라 자연 마차 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한 때가 잦았다.
때가 되면 식사를 했고, 두 시진에 한 번씩 마차를 멈춰 휴식을 취했다. 마차를 끄는 말들은 놀랍게도 여물을 얼마 먹지 않고도 천 리를 달렸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을까.
"음."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재미있군."
주서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네?"
"저쪽 정보망은 이제 고물이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긴, 그래도 날고 기었던 세월이 수백 년이었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마부석에서 마동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주님."
"알고 있다."
"어떻게 할까요?"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할 사이 아니던가. 그냥 그대로 가."
"알겠습니다."
주서윤의 눈이 번뜩였다.
"혹시 적이?"
서량이 서늘하게 웃었다.
"글쎄다. 칼을 뽑으면 죽일 것이요, 이죽거리면 박살을 내 줄 것이며, 설설 긴다면 엉덩이나 한번 걷어차 주고 말아야지."
"……어디죠?"
"사천당가."
주서윤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아직 사천에 진입하기도 전인데요?"
심지어 사천으로 가는 방향도 아니었다. 서량은 관평부터 만난 이후에 사천으로 진입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당가에서 먼저 찾아왔다?
"언제나 그랬지. 소교 때도 그렇고, 내가 중원에 나서기만 하면 상대방도 허를 찌르고 들어올 때가 많았어."
서량이 피식 웃었다.
"결국 세상일이라는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경우는 별로 없어. 그건 이 경지에 오르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는군."
세상일이 내 마음 같지 않다. 그렇다면, 상상치 못했던 변수라도 통제 가능한 선이라면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서량은, 이제 어떤 변수가 터져도 놀라지 않을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가장 먼저 박살을 내 버려야 할 놈들이로군."
주청의 얼굴에 확연한 불쾌함이 어렸다.
"당가는 과거 제국의 영향력이 막강했을 때도 국법(國法)을 어기고 화기(火器)를 만들었던 가문이야.
심지어 나라에서 금한 염상(鹽商)을 만드는 등, 무도한 무림인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악랄한 놈들이었지."
"그랬었나?"
"잘 몰랐던 모양이군. 황궁 서고에 천년제국사(千年帝國史)라는 책이 있네.
권수만 삼백여 권에 달하지. 그중 황조실록(皇朝實錄) 편(篇)을 보면, 저 당씨 놈들이 저지른 온갖 불법적인 역사가 한가득 적혀 있다네."
"호오? 제국의 힘이 강성했을 때도 그 난장을 쳤다……. 그런데도 당가를 가만히 뒀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은가. 황궁은 수 대에 걸쳐 몇 번이고 당가를 박살 냈다네. 하지만 놈들은 쥐새끼처럼 약삭빨랐고, 독하기로는 어떤 독사 못지않았어."
"뿌리를 뽑지 못했군."
"염상, 인신매매 등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재산을 불리고, 그 재산으로 독과 암기, 화기 등을 만들었어.
애초에 놈들은 무림이 아니라 또 하나의 무력 국가를 만들 속셈이었을 거라고 유추하고 있네."
"오……?"
"수 세대 동안 멸문과 확장을 반복한 놈들은, 기어이 국가 설립을 포기하고 무림으로 기어들어 갔다고 하더구먼.
물론 실제로 본 건 아니지만, 황조실록은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로 악명이 높다네.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커."
"악명이라니?"
"악명이지, 황제들에게는. 하늘의 대리인이라는 황제의 치부 하나하나까지 다 적어 놨으니."
"대단하구만."
주청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놈들이 담사영 같은 놈과 손을 잡았어. 다른 문파는 몰라도, 당가 놈들은 담사영 휘하에 들어가진 않았을 걸세. 잘해야 동맹 정도겠지."
"그 새끼들 자존심 하나는 국보급이긴 해."
"조심하게. 자네는 당대 무림 최강자 아니던가.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자신이 있으니 보러 왔을 걸세."
"자신도 있고, 복수도 하고 싶겠지."
"복수?"
"소교 시절에 당가 수뇌부 몇 놈을 잡아들였거든. 가주는 개박살을 내 놨고. 불행히도 내 손에 죽진 않았지만."
주청의 눈이 흔들렸다.
"……그 망할 놈들, 작정하고 달려들겠군."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쿠구궁.
마차가 멈추었다.
동시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산길 전체를 울렸다.
"희대의 악종 마교주는 당장 모습을 드러내거라!!"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생각보다 노쇠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분명 노인의 목소리임에도 강철처럼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
"천하를 뒤흔든 것도 모자라, 감히 당문의……!!"
그때였다.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노인의 목소리가 묻혔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마동필은 어느새 흑혈마검을 뽑아 든 채 당당하게 서 있었다.
"교주님께 저지른 무례는 목숨으로 받겠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찍찍거리지 말고 당장 이 앞으로 기어 나오너라."
"……이 애송이가!!"
터어어엉!
산길 너머에서 당당한 체구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수염과 백발을 늘어트린 노인은 나이를 나이를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는 주름 가득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폭발적이었다.
마동필의 눈이 깊어졌다.
"교주님."
마차 안에서 서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늙은이를 제외하고 총 일흔두 명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폭약이라도 들고 온 모양이야."
"……."
"어떻게, 네가 할래?"
화르르륵.
흑혈마검에 핏빛 화염이 일렁이며 짐승의 것인지 괴물의 것인지 모를 포효가 들려왔다.
마동필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개 떼에 불과합니다. 존체를 드러내실 필요는 없습니다."